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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울뉴타운 지역에 있는 한 주택가의 모습. 부분 철거가 이루어져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가재울뉴타운 지역에 있는 한 주택가의 모습. 부분 철거가 이루어져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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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마무리된 줄 알았다. 지난 9월 말, 가재울뉴타운4구역 재개발조합에서 '주거 및 동산 이전비 보상 공고'를 홈페이지에 고시할 때만 해도 법에 보장된 이주 보상만큼은 문제없이 받게 될 것이라고 들떠있었다. 8월 초부터 시작해 두 달여간 끈질기게 벌여온 '세입자 권리 찾기' 투쟁이 작은 결실이나마 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관련기사 - 가재울뉴타운 세입자들이 '앉아서 당하지 않은 법')

하지만 보상 공고가 고시된 지 두 달이 지난 11월 말까지도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들은 '투쟁의 머리띠'를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 분명 지난해 4월 개정된 토지보상법에 따르면 조합은 이주를 원하는 무주택 세대주 세입자에게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4개월치의 주거이전비 및 동산이전비를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법대로 술술 풀리지 않았다.

공고 후 조합은 신청한 세입자에 한해 주거이전비를 지급하긴 했지만, 여전히 동산이전비는 신청조차 받지 않고 있다. "타구역에서 개정된 법에 따라 지급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조합에서 밝힌 이유다. 관할 행정기관인 서대문구청도 "법대로 조치하도록 조합에 건의하고 있으나 시행이 되지 않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소극적 답변만 내놓고 있다.

개발 지역에서 세입자를 강제로 몰아낼 때 늘상 최우선 기준으로 작용하던 것이 '법'이었다. 하지만 세입자 보상에 대해서는 '관습'보다 못한 참고사항 정도로 작용하고 있었다.  

2007년 4월 개정된 토지보상법에 따른 주거이전비와 동산이전비(이사비)의 산정근거와 기준.
 2007년 4월 개정된 토지보상법에 따른 주거이전비와 동산이전비(이사비)의 산정근거와 기준.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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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들에겐 법대로 보상도 힘들다

주거이전비도 미리 정보를 알고 신청한 세입자에 한해서만 지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합은 수개월째 이주 보상에 대한 공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조합 홈페이지에 게재된 보상 공고도 어느샌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이사를 갔거나 지급 기준을 모르고 있는 세입자들은 멀쩡히 존재하는 권리를 가만히 앉아서 놓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젠 웃음만 나오네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돈 없이 살면 재개발로 쫓겨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는 온갖 스트레스 받아가며 짓밟히고…" - 세입자 대화명 '로또드럼'  

세입자들은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싸움을 찬바람 부는 연말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거창한(?) 구호를 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법대로 이주 보상을 받게 해 달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당연히 보장될 줄 알았던 법적 권리는 뜻밖에도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이 돼 있었다. 적어도 집 없고 힘없는 세입자들에게는 그랬다.

"대통령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서민들이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른 것 같아요. 뉴타운을 보세요. 이것은 탈법과 무질섭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폭력입니다." - 세입자 권아무개(49)씨

11월 25일, 세입자들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투쟁'이란 단어를 버릇처럼 입 근처에서 되뇌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날이 저문 밤 8시, 4개월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세입자 6명을 모래내의 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맥주 500cc 한 잔을 거뜬히 비운 이들은 그간 뉴타운 지역에서 세입자들이 겪어야 했던 온갖 사연을 하나 둘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연 하나] 좌충우돌 투쟁기... 지역홍보부터 <손석희의 시선집중> 출연까지

25일 밤,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들과 가재울지역 호프집에서 만나 3시간여 동안의 긴 대화를 나눴다. 세입자들은 4개월여간 '권리 찾기 투쟁'을 하면서 겪은 갖가지 사연을 서스름없이 들려줬다.
 25일 밤,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들과 가재울지역 호프집에서 만나 3시간여 동안의 긴 대화를 나눴다. 세입자들은 4개월여간 '권리 찾기 투쟁'을 하면서 겪은 갖가지 사연을 서스름없이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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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철(33·인터넷쇼핑몰 직원)씨는 뉴타운개발 인가 후, 이주 시기가 다가올 때까지도 세입자 보상 관련법에 대해 잘 몰랐다. 뒤늦게 관련 기사를 통해 개정된 토지보상법 내용을 접했고, 자신에게 3가지 권리(임대아파트 입주권·4개월치 주거이전비·동산이전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조합을 찾아 법에 따른 보상을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구청에도 재차 문의를 해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거죠. 분명 법에는 나와 있는데, 왜 조합은 물론 구청마저도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걸까. 황당했어요. 백날 이들에게 항의해봤자 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죠. '다음 아고라' 등 인터넷 공간에 내가 겪은 사연을 올리기 시작했고 세입자모임을 결성해 주변인들과 공동대응에 나서기로 한 거죠."

장씨는 그간 행했던 '눈물겨운 투쟁사'를 늘어놓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한밤중에 모여 동네 곳곳에 홍보전단을 붙인 일부터 시작해 구청 항의방문, 그리고 시청·감사원·국토부 등에 민원제기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지난 10월 6일에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세입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육성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곧이어 옆에 앉아 있던 조아무개(40·개인용달업)씨가 말을 받았다.

"왜 이렇게 고생하며 싸우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아요. 우리가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법에 있는 것만 해결해 달라는 건데. 얼마 전부터는 수도와 가스마저 끊더군요. 어제도 냉방에서 잤어요. 빨리 개발을 해야 하니 너희들은 무조건 나가라, 이런 거 같아요."
  
다시 장석철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막말로 내가 조합이라도 세입자 등쳐먹을 것 같다. 행정기관조차 제재를 하지 않는 구조로 돼 있는데 조합이 굳이 보상을 해주겠냐"며 "감사원에 계속 민원을 넣으니 '우리도 구청에 권고밖에 할 수 없다. 더 이상 민원을 넣지 마라'고 직접 전화까지 오더라. 이게 행정기관이 할 말이냐"고 성토하며 술잔을 또 들었다. 

세입자들은 결국 법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행정기관이 수수방관하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사법부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산이전비'가 그리 크지 않은 액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제는 오기가 생겨 꼭 '제대로 된 결말'을 보고 싶다고 한다.

장석철씨는 "소송하는 과정도 큰 스트레스겠지만, 너무도 명백히 부당한 상황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싶다"며 "이를 통해 가재울뿐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세입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사연 둘] "MB 찍은 내가 '투쟁' 외칠 줄이야... 뉴타운은 서민 몰아내는 사업"

가재울뉴타운 지역 상가에 걸려있는 깃발의 모습. 세입자 상가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내건 깃발이다.
 가재울뉴타운 지역 상가에 걸려있는 깃발의 모습. 세입자 상가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내건 깃발이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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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경제가 어려우니까, 가장 적합한 사람이 경험 있는 이명박 후보라고 여겼고, 그를 찍었죠. 하지만 그가 행한 정책이 이런 고통을 줄 줄이야…"

최아무개(52·공인중계사)씨는 평생 세입자 및 철거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세입자임에도 남 일처럼만 느껴졌다고 한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그는 평생 한나라당 지지자였다고 했다. '투쟁'이란 단어도 "살면서 생각도 못한 말"이라고 한다.

최씨는 "늦은 나이에 정치의 무서움을 알았다"고 말하며 담배를 물었다. 곧바로 라이터 불을 당기며 "앞으로 뉴타운의 '뉴'자 공약만 나와도 그 후보는 찍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타운은 한 마디로 "'없는 사람은 지역을 떠나라'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권아무개(49·비정규 프리랜서)씨도 "처음 뉴타운 사업을 벌일 때, 주거개선사업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입자로서 직접 경험해 본 뉴타운의 실체는 "서민 몰아내는 사업이었다"고 한다.

8년 전 개인사업 실패 후, 세입자로 전락했다는 권씨. 그는 앞으로도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한다. 취기가 적당히 오른 권씨는 "이제 나라에 대한 희망을 걸지 않고 있다"며 긴 한숨을 들이쉬었다.

"세입자든 조합원이든 20~30년을 같이 어울려 살았던 동네예요. 그런데 세입자는 물론이고 영세 조합원들도 2억~3억원 추가부담 안 하면 뉴타운 못 들어가는 게 현실 아닙니까? 소득 100만~200만원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소득 500만원 이상이 사는 주거지 만들겠다, 그러니 너네는 떠나라'는 게 뉴타운의 본모습 아닌가요?" 

권씨는 또 "요즘 아파트 전세값이 떨어지고 있다고 하나, 서민들이 찾는 다세대 주택이나 연립은 방이 없어 구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서울 전체가 대규모 뉴타운 개발을 실시하면서 서민들이 살 곳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어디로 또 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장석철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뉴타운 공약을 보고 투표를 했던 세입자들 모두가 지금은 이를 가는 심정일 것"이라며 "앞으로 뉴타운 공약 내건 후보를 절대 뽑지 말든가 아니면 돈 5억~6억을 벌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 서울에 남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연 셋] 함께 뭉쳤던 4개월... "그래도 희망을 봤다"

가재울뉴타운 지역의 한 주택가 풍경. 3구역은 이미 본격적인 철거에 들어갔고, 4구역은 철거 승인이 아직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가재울뉴타운 지역의 한 주택가 풍경. 3구역은 이미 본격적인 철거에 들어갔고, 4구역은 철거 승인이 아직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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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들은 지난 4개월의 투쟁 기간 동안 절망감만 맛본 것은 아니었다고 입을 모았다. "함께 뭉쳐 외치면 현실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김광운(36·일용직 노동자)씨는 "조합에서 개정 전 법에 따라 3개월치 주거이전비만 주다가, 얼마 전 추가로 나머지 1개월분인 320만원을 입금해줬을 때는 '우리의 권리 찾기 싸움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뿌듯했다"고 말했다. 

박종수(36·아파트 설비기사)씨는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얻은 상태에서 조합으로부터 주거이전비 1개월치를 추가로 입금받았다. 둘 중 한 가지만 신청할 것을 강요하던 기존의 조합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 꿈쩍 않던 조합을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따낸 것도 정말 기적적인 일이죠. 주변 세입자들과 함께 힘을 모으고, 생전 처음 시청 앞에 집회도 나가보고, 끈질기게 민원을 넣다 보니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하더라고요."

김광운씨는 "'특공조(지역홍보)과 민원팀으로 분류해 조직적으로 싸움을 벌여나간 것이 성과를 얻은 가장 큰 비결"이라며 "최근엔 타구역 세입자들도 우리 카페에 많은 문의를 하고 있다, 우리가 얻은 성과를 최대한 많은 세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세입자들에게 "투쟁이 잘 마무리되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는 질문을 했다.

"고생한 사람들 모두 모여 야유회를 같이 떠나며 걸쭉하게 회포를 풀고 싶다."(조아무개)
"앉아서 당하고 있을 타구역 세입자들에게 좋은 조언자 역할을 해주고 싶다."(김광운)

하지만 장석철씨는 이들과 다르게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상받는다고 근본적으로 풀릴 문제는 아니에요. 이사가도 문제죠. 낙후된 지역을 보면 죄다 주민총회하고 있고 재개발 안 한다는 곳이 없어요. 세입자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릴 수밖에 없죠. 이번 기회에 서민들이 잘 깨달아야 합니다. 뉴타운은 서민 몰아내는 정책이라는 것, 이 공약 내거는 서울시장·국회의원·대통령은 절대 뽑으면 안 된다는 것을요."
 
평범한 직장에 다니면서,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장씨. 몇 해 전부터 서울서 집을 장만할 생각은 아예 포기한 상태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드리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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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태그:#뉴타운, #가재울, #가재울뉴타운,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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