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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가 늘어선 포장도로
▲ 나보이 가는 길 가로수가 늘어선 포장도로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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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저쪽으로는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어제 나디르가 했던 이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나디르와 함께 녹차와 볶음밥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디르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 앞에는 사막이 보이지만 길은 사막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막을 한쪽으로 우회해서 포장도로가 뚫려있다.

양쪽에 가로수가 늘어선 멋진 길이다. 길 옆으로 작은 집과 상점도 보인다. 나디르도 아마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제 저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을까. 늦은 시간에 외국인 혼자서 길을 걷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아니면 그냥 나한테 호기심이 생겨서 친절을 베풀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쪽이건 나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로 저쪽에 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하더라도, 어제 그 시간에 사막으로 향하는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상상해본다. 어제 저녁에 나디르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디르의 호의를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고 하더라도 내가 뭐 위험에 처하거나 노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원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집으로 들어가서 재워달라고 부탁하면 십중팔구는 아마 들어줬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디르가 정말 고맙다. 내가 부탁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재워주겠다는 말을 하면, 내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거기다가 나 혼자 사용하라고 넓은 방을 내주고 푸짐한 음식도 함께 제공해주었으니. 그리고 엄청나게 매운 토종 고추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이 다 떨어져서 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먹은 볶음밥과 보드카의 값을 지불하려고 했는데 나디르는 거절했다. 결국 나는 나디르의 집에서 생수와 음료수를 한 병씩 구입해서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도로에 있는 경찰검문소를 지나니까 다시 사막이 나온다. 그런데 이 사막은 내가 열흘동안 지나왔던 그 사막이 아니다. 거친 사막이라기 보다는 개발이 덜된 황무지, 아니면 개발이 진행중인 사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사막 저편으로는 드문드문 마을도 보이고 모래벌판을 관통하고 있는 물줄기도 있다.

허리와 다리에서 아프다고 아우성

사막같은 황무지가 펼쳐진다.
▲ 나보이 가는 길 사막같은 황무지가 펼쳐진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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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잠도 잘 잤는데 아무래도 몸상태가 이상하다. 지치거나 탈진한 것이 아니라, 몸의 구석구석이 아프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발목의 앞, 뒤쪽 그리고 발바닥이 욱신거린다. 무릎 뒤쪽의 근육도 당기는 느낌이고 허벅지도 쑤신다.

무엇보다도 허리가 아프다. 왼쪽 허리를 중심으로 그 위아래에 번갈아가면서 통증이 생긴다. 핸드카를 손으로 밀면서 걷기 때문에 팔의 근육도 조금씩 아프다. 간단하게 말해서 내 몸 곳곳에서 장거리 도보여행에 따른 이상신호를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신호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아마 이런 얘기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못해 먹겠다. 이제 그만 걷자."

못해 먹긴 뭘 못해 먹냐, 그냥 해먹으면 되지. 힘들다고 정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의 이상반응을 줄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걷는 시간을 줄이고 휴식시간을 늘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도시에 도착하면 호텔에서 깨끗하게 씻고 하루이틀 푹 쉬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계속 가고 싶다. 쉬어야 한다는 본능이 있는 반면에, 가고 싶다는 의지도 있다. 지금 나는 의지가 더 강한 상태다. '걷기'라는 마법에 중독이라도 된 듯이 나는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두발로 걸어서 오늘 하루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두발에만 의지한채 1200킬로미터를 주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계속 앞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래전에 전성기를 누렸던 육상실크로드를 직접 걷는다는 기쁨도 있다. 낙타를 몰고 터벅터벅 걸어갔던 상인들처럼 나도 걷는다. 그 길에서 변해가는 풍경과 조금씩 기울어져가는 태양을 바라본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상상한다. 그러다보면 하루이틀 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쉽게 말해서 길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길에서 생기는 호기심이 나를 계속 걷게 만드는 것이다.

혼자 먼길을 여행하는 매력

황무지를 관통하는 물줄기
▲ 나보이 가는 길 황무지를 관통하는 물줄기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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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주변 사람들한테 '그 길을 왜 혼자 걷는 거야?'라는 질문을 여러차례 들었다. 여행을 떠나는데 이유가 어디있나. 아니 때로는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항상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니까. 그것을 실현할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다.

때로는 현실이 지겨워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서 여행길에 오른다. 어떤 사람은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걸고 홀로 먼길을 떠난다.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싶어서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어떤 이유로 떠나건 혼자서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보면 자신을 들여다 보게된다. 혼자하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는 여행이 된다. 거리에서 하는 생각은 자신에 대한 생각이고, 떠오르는 후회는 이미 지나버린 자신의 옛모습이다. 현지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옥신각신하다보면,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즐거운 장소에서는 자신과 함께 기뻐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여행이 끝나면 분명히 자신을 좀더 잘 알게 된다. 그 결과가 성숙함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을지라도.

'모든 여행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여행'이라는 말도 아마 그런 맥락일 것이다. 여행하면서 발견하는 것들은 새로운 문화와 풍광이 아니라, 깊숙히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또다른 모습들일 것이다. 내가 걷는 이 길도 타쉬켄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드리워져 있던 나 자신의 색다른 이면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하는 이런 생각들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 길을 왜 걷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답은 말하지 못했다.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도 이유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말하고 싶다. 혼자서 낯선 길 위에 서있는 지금,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

공항 앞의 작은 호텔에서

나보이 공항 앞의 작은 호텔
▲ 나보이 가는 길 나보이 공항 앞의 작은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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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어느새 황무지는 사라지고 도로변에는 마을과 목화밭이 나온다. 저 멀리 공항 관제탑이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 활주로에서 오락가락하는 비행기들도 있다. 여기는 나보이 공항이다. 이 공항에서 나보이 시내까지는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궁금하다.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다.

키질테파에서 나보이까지 50킬로미터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하루 묵어도 괜찮을 듯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잡생각을 하면서 족히 30킬로미터는 걸어온 것 같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오전중으로 나보이에 도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 호텔에 들어가서 푹 쉴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눈앞에 호텔이 나타났다. 크고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그냥 작고 아담한 호텔이다. 어쨋거나 호텔은 호텔 아닌가.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영어를 하는 젊은 남자가 앉아있다.

"방 있어요?"

그는 나한테 직접 방을 안내해준다. '호텔'이라고 써진 건물 뒤쪽에 'ㄷ'자 모양으로 낮은 건물이 뒤뜰을 둘러싸고 있다. 그 건물에 여러개의 방이 놓여있는 형식이다. 그중에서 한 방을 나에게 보여준다. 혼자 쓰기에는 넓고 깨끗한 거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침실에는 침대 두 개가 놓여져 있다.

한쪽에 있는 화장실은 좀 상태가 안좋다. 수세식이기는 한데 벽에 웬 파리와 거미줄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는지. 옆에 있는 샤워시설도 그렇다. 마치 녹물이 떨어져 내릴 것 처럼 파이프와 수도꼭지가 녹 투성이다. 하루만 참자, 샤워는 내일 나보이 호텔에 가서 하면 될거다.

"이 방은 얼마에요?"
"하룻밤에 10,000숨이요."

우리돈 만원 가량이다. 싸서 좋기는 하다. 여기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하고 호텔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우즈베키스탄 짬뽕이라 부르는 라그만과 맥주 한병을 주문했다. 가격은 합쳐서 2,500숨이다. 잠시후에 나온 라그만을 보고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국물이 하나도 없는데다가, 볶은 듯한 면을 접시에 담아 준 것이다.

"이거 라그만 맞아요?"

내가 묻자 종업원이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제서야 기억이 되살아났다. 라그만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간단하게 구분해서 국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다. 국물있는 것을 우즈베키스탄 짬뽕이라고 한다면, 국물없는 것은 볶음짬뽕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먹기 시작했다. 이 라그만은 또 색다른 맛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낯선 곳에서 독특한 현지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다.

이건 국물있는 라그만
▲ 우즈베키스탄 음식 라그만 이건 국물있는 라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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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물 없는 라그만
▲ 우즈베키스탄 음식 라그만 이건 국물 없는 라그만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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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즈베키스탄, #도보여행, #중앙아시아, #라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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