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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중인 도로가 나온다
▲ 지아딘을 지나서 공사중인 도로가 나온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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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200달러 남았다. 도보여행을 위해 처음 누쿠스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있던 돈이 600달러였으니, 그동안 400달러 가량을 쓴 것이다. 누쿠스에서 여행준비하면서 2박 3일 그리고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26일, 그러니까 대략 30일 동안 400달러를 쓴 셈이다. 물가가 싼 곳이라서 그런지 비교적 적은 비용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곰곰히 따져보니까 그렇지도 않다. 잠은 대부분 공짜로 잤고, 음식도 저렴한 현지식만을 먹었다. 밤에 현지인들과 어울려서 보드카나 맥주를 마실때도 내 돈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돈이 더 남았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돈이 가장 크게 들어간 곳은 대도시의 호텔비용이다. 누쿠스, 우르겐치, 부하라에서 각각 2박 3일간 머물며 쉬었다. 이 세 도시에서 6일동안 지불한 호텔비가 합해서 130달러다. 그리고 나보이 공항과 나보이에서 들렀던 호텔도 비용이 싼 편은 아니었다.

그외에는 어디에 큰 돈이 나갔는지 모르겠다. 사막을 걸어오는 동안에는 별로 돈 쓴 기억이 없다. 거기서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음식값, 음료수값, 맥주값이 상대적으로 싸다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무절제하게 사먹었나 보다. 옛사람들 말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 없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알아야 하는데.

앞으로 남은 일정은 약 15일이다. 그 도중에 대도시는 사마르칸드, 지작, 굴리스탄 세군데다. 그중에서 사마르칸드에서만 2일 머물 예정이고 나머지는 그냥 통과다. 그러니까 사마르칸드에서만 좀 주의하면 타쉬켄트에 도착할때까지 이 돈으로 버틸 수 있을 것도 같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비상용으로 챙겨온 비자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도시의 은행에 가서 직접 달러로 현금서비스를 받으면 될거다. 물론 그러기 전에 내가 아끼고 절약해야 한다. 식당에서 배부르게 음식을 사먹는 것은 하루 1번으로 만족하자. 나머지 끼니는 빵이나 삶은 계란으로 대체하면 된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따라서 사마르칸드로 향했던 상인들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도보여행하면서 쓴 비용을 점검해보고

거리의 동상
▲ 양기쿠르간 가는 길 거리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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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칼리지
▲ 양기쿠르간 가는 길 길가의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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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에 지아딘을 출발한 나는 오후 5시 30분 경에 양기쿠르간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식당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마침 한 현지인이 그곳에서 나오길래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여기서 하룻밤 잘 수 있어요?"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간다. 문앞에 있는 커다란 돌에 앉아 쉬면서 기다리자, 그가 다른 현지인과 함께 나온다. 동행한 사람이 식당 주인인 것 같다. 주인에게 다시 물어보았지만 여기서는 잠을 잘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일어서려고 했는데 처음에 날 맞아주었던 사람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권한다.

그는 올해 39세의 바흐티오르다. 그는 옆의 건물을 가리키면서 손씻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좀더 기다리라고 역시 손짓으로 말하고 그 건물로 들어갔다. 따라가서 그가 들어간 건물을 보았더니 그곳은 자동차 정비소 같은 곳이다. 이곳이 바흐티오르의 직장인가보다. 옆의 식당은 그가 식사 때나 휴식 때 이용하는 장소일테고.

그래서 기다렸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안좋다. 일을 모두 마치고 손을 씻고 나온 바흐티오르는 자기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 얼마나 먼곳일까. 도로 안쪽의 작은 마을로 구불구불 들어가니 바흐티오르의 집이 나온다. 이 집에는 그의 세딸도 함께 있다.

바흐티오르가 들어가면서 무슨 말을 하니까 큰 딸은 집 안쪽으로 향했다. 이 집에도 개가 두마리 있다. 내 옆에서 나를 보며 웃던 작은 딸은, 개들이 나를 보고 짖어대니까 마당의 돌멩이를 집어서 던진다.

나는 짐을 놓고 바흐티오르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건물 한쪽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빈 실내가 나온다. 큰 딸은 빗자루를 들고 와서 바닥을 청소한다. 바흐티오르는 창문을 닫고 거기에다가 커튼을 설치하고 있다. 원래 이 방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왔으니 특별히 이렇게 준비하는 걸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나도 바흐티오르를 도와서 창문 두곳에 커튼을 설치했다. 큰 딸이 청소를 마친 바닥에는 구석에 세워져있던 커다란 카펫을 두개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잠자리를 두개 만들었다. 바흐티오르는 그 자리를 가리키며 자는 시늉을 한다. 오늘은 그와 함께 여기서 자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천정에 매달린 작은 전구의 불이 꺼졌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라서 큰 문제는 없지만 왜 전구가 나갔을까? 바흐티오르는 전구를 가리키면서 안된다는 손짓을 한다. 전구가 망가지거나 수명이 다했으면 나가서 하나 사오면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정비소 직원 바흐티오르 집에서

바흐티오르와 세 딸
▲ 바흐티오르 집에서 바흐티오르와 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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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를 마친 큰 딸은 우리에게 녹차를 가져다 주었다. 바흐티오르는 1970년생인데, 큰딸은 1994년생이라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젊은이들이 대부분 일찍 결혼하는 것처럼 바흐티오르도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벌써 4명의 자식을 두고 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의 부인은 보이지 않는다. 안보이는 부인에 대해서 물으면 실례가 될 것도 같다.

"부인은 어디 있어요?"

그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카타쿠르간'이라는 인근 도시에 가있다고 한다. 아들이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 뒷바라지를 위해서 평일에는 집을 떠나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은 마을에도 학교가 있다. 그의 딸들은 모두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다. 그런데 아들은 좀 특별대접을 해서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는 대도시로 보낸 것이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우즈베키스탄판 기러기아빠?

어느덧 시간은 저녁 8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바흐티오르는 양초를 2개 가지고 오더니 불을 붙였다. 창밖을 내다보니까 마을 전체가 새까만 것이 아무 불빛도 없다. 나는 천정의 전구를 올려다 보았다. 전구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정전이 되었다. 아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 이 시간에 정전이 됐는지 의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전기가 공급되다가 밤이 되니까 전기가 안들어오는건 또 무슨 경우인가. 캄캄해지고 나면 딴짓(?)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의미일까.

이렇게 어두운데도 바흐티오르의 큰딸은 접시에 소시지요리와 빵, 과자를 담아서 연신 내온다. 정비소에서 일하는 바흐티오르의 양손은, 비록 아까 씻었지만 기름때로 까맣다. 그 손으로 빵을 죽죽 찢어서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준다.

촛불 속에서 빵과 소시지요리를 먹으며 녹차를 마셨다.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음식을 먹자니 기분이 묘하다. 이런 정전이 자주 일어나는지 이 집에는 정전 때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 양초와 성냥, 라이터는 기본이고 기름을 담아서 사용하는 등잔과 작은 휴대용 랜턴까지.

나스와이를 즐기는 현지 남성들

촛불을 켜고 음식을 먹는다
▲ 바흐티오르 집에서 촛불을 켜고 음식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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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티오르에게 형제가 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그의 동생은 '나스와이' 만드는 일을 한단다. 나스와이라는 것은 이곳의 성인 남성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기호품 같은 것이다. 정체모를 녹색풀을 곱게 빻아서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조금 손에 덜어서 아랫니와 아랫입술 사이에 집어넣는다. 그 상태로 10분 가량 입에 머금고 있으면, 시쳇말로 '뿅가는'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10분 후에는 그 풀을 길가에다 뱉어낸다. 그런 일을 보통 하루에 7~8차례 반복한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이 나스와이를 입에 넣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중 일부는 나에게 보여주면서 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뿅가는 기분이 된다는 걸로 보아서 분명 마약성분이 있는 풀로 만들었을 텐데, 한 번 해보았다가 중독되면 곤란한 일이다.

내가 나스와이를 싫다고 하면 이들은 우즈벡 담배를 권하면서 피우라고 한다. 담배를 끊은지 어언 10년, 그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면 팔에 주사바늘 꽂는 시늉을 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냥 웃어 넘기는 수밖에. 내가 모두 싫다고 거절하면 이들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나스와이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피우고 거기다가 결혼도 안 하고. 그럼 어떻게 사냐? 그냥 걸어다니기만 하는 거냐?"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걷고, 밤에는 맥주 한잔 마신다. 때로는 보드카도. 그러면 훌륭한 것 아닌가.

한번 정전이 되더니 다시 전기가 들어올 생각을 안한다. 촛불도 이제 점점 약해져 간다. 전기가 들어왔더라면 바흐티오르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훨씬 더 좋은 시간을 가졌을텐데 아쉽다. 하긴 살면서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빈접시를 치우고 우리는 잠자리에 누웠다. 정전이 됐으니 따로 불을 끌 필요도 없다. 이거 하나는 좋은 점이다. 내일은 걸어서 어디까지 가야할까, 아니 내일은 어디에서 자야할까. 밖에서는 개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쪽의 작은 문 안쪽에서 잠을 잔다
▲ 바흐티오르의 집 오른쪽의 작은 문 안쪽에서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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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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