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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이시내 중심가에 있다.
▲ 알리셰르 나보이 동상 나보이시내 중심가에 있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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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나보이 시내를 빠져나오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 대도시에 오면 장단점이 있다. 일단 깨끗한 호텔에 들어가서 씻고 쉴 수 있다는 점은 좋은데, 복잡한 도심을 나와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에 접어들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나보이를 지났으니 이제 다음에 나올 도시는 그 유명한 사마르칸드다. 나보이에서 사마르칸드까지는 약 160km, 무리하지 않고 걷더라도 5일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다. 나보이 시내를 벗어난 나는 길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기운차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점 지루해진다. 오늘로 도보여행 25일째, 매일 비슷한 풍경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걷다보니까 식상해진 것일까. 도보여행 길에도 권태기가 있다면 나는 지금 그 권태기에 빠져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최대의 난코스이자 가장 기대했던 구간인 키질쿰 사막을 돌파했기 때문에 이런 증상이 생긴 것인지도.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이든지, 아니면 곤죽이 되도록 술을 한번 퍼마시는 것도 괜찮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처럼, 그런 과정을 거쳐서 머릿속에 눌어붙은 찌꺼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내가 걷는 이 길이 좀더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촌구석에서 무슨 수로 대단한 일을 벌이나.

장기간 도보여행을 했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다. 특히 집을 떠나서 8년째 전세계 도보여행중인 캐나다의 장 벨리보의 경우가 그렇다. 나는 타쉬켄트까지만 가면 끝나지만, 장 벨리보는 그게 아니라 계속해서 정처없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여행은 그다지 장거리도 아니다. 그래서 25일 만에 지루해진 것인지도.

사막 통과라는 1차 목표를 이루었으니 이제는 다른 목표를 잡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관계없이 신체의 통증은 계속 된다. 오전에는 괜찮지만 오후가 되면서부터 허리 한가운데에 통증이 밀려온다. 오늘 어디서 자게될지 모르지만 자기전에 반드시 허리에 파스를 한 두 장 붙여야겠다.

오후 1시에 경찰 검문소를 지났다. 이 검문소를 기준으로 나보이주와 사마르칸드주가 나뉘는 모양이다. 검문소 앞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라그만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계속 걷는다.

거대한 유목제국은 왜 망했을까

포장도로가 다시 펼쳐진다
▲ 나보이를 빠져나와서 포장도로가 다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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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이 내 여권을 검사한다.
▲ 경찰 검문소 경찰들이 내 여권을 검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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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드는 수백년 전에 이 지역을 장악했던 티무르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당시의 유적과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티무르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미르 티무르의 혈통은 칭기즈칸에 닿아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티무르제국은 몽골제국의 뒤를 이은 유목제국인 셈이다.

그 유목제국은 티무르가 죽으면서 함께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유목민들이 더이상 정주민들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유라시아를 통일했던 거대한 유목제국들이 사라져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학설은 그들의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포의 대상이던 유목의 기마궁사들이 서양인들의 총포 앞에서 쓰러져갔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서양의 총포에 적응하지도 못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하긴 그들이 커다란 총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유목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생활의 장점이라면 언제든지 짐을 꾸려서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단점이기도 하다. 그런 간편한 이동성을 유지하려면 군사력 또한 간소해질 필요가 있다. 쇠붙이로 만든 커다란 총포를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한다? 그것은 당시 유목민들에게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정주민들은 그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높은 성을 쌓고 길다란 성벽도 구축한다. 그안에 엄청난 무게가 나가는 총포를 보관해두고 있다가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하고 다시 넣어두면 된다.

유목민들은 거의 모든 성인남자들이 전사가 될 수 있었지만, 정주민들은 정주문명의 장점을 살려서 막강한 화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그 화력 앞에서 유목전사들의 기동성은 더이상 우세한 요인이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유목민이 정주민에게 군사적으로 제압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유목국가들로 여행을 떠난다. 몽골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한때 알려진 세상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은, 그래서 더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지중해 동쪽에서 십자군과 이슬람군이 종교의 이름을 내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중앙아시아에서는 유목에 의한 평화가 구축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평화가 탄생했던 장소를 보러 간다. 머나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긴 어떻게 보면 모든 여행은 과거로 떠나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자신의 과거로. 문명의 이기가 세상을 뒤덮기 전의 조용했던 과거로.

지아딘에서 잘 곳을 찾아서

사마르칸드주로 들어선다.
▲ 나보이주를 떠나서 사마르칸드주로 들어선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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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조형물
▲ 지아딘 도착 입구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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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5시가 넘어서 작은 마을 지아딘에 도착했다. '지요아딘'인지 '지아딘'인지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는 건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오늘 어디서 잘 수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막을 걸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면 흔쾌히 나한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었다.

그런데 도시로 들어가니까 그런 인심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물론 아무 조건없이 나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도 많기는 하다. 이 지아딘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길을 걸으면서 몇군데 식당에 들러보았지만 모두 재워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500미터를 가면 '바곤'이 있으니 그리 가보라고 한다. 열차 객차를 가리키는 말인데, 열차를 개조해서 식당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곳도 영업을 하지 않는지 굳게 닫혀있을 뿐이다.

이것 참 난감하다. 이 마을에 내 몸 하나 누울 장소가 없단 말인가. 아무튼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 길가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다시 들어갔다. 여기서 일하는 젊은 남자에게 재워달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좋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나는 짐을 한쪽에 놓고 마당에 있는 탁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재워주겠다고 말한 남자는 올해 28살의 쉬르조드다. 그는 어머니, 부인, 동생과 함께 이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형도 한명 있지만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단다.

나는 탁자에 앉아서 쉬르조드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마당 한쪽에서는 쉬르조드의 2살난 아들이 작은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뒹굴고 있다. 저러다가 고양이 발톱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작은 방에서 모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나는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의 매일 이렇게 공짜로 재워주겠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혼자 25일 동안 700km를 걸어왔다는 것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루하루 걷다보면 사마르칸드를 거쳐서 타쉬켄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쉬르조드는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나무로 만든 방문 한쪽이 박살나서 구멍이 뚫려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니까 그 구멍으로 모기들이 계속 들어와서 내 귓가로 날아든다. 오늘은 이 모기들 때문에 고생좀 하게 생겼다. 잠들기 전에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텐데.

한국에서 도보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당시 모기하고 관련된 아무런 물건도 구하지 않았다. 바르는 모기약이나 모기향 하다못해 뿌리는 살충제 작은 거 하나만 가져왔더라도 좋았을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하긴 내 인생이 후회의 연속 아니었던가.

나는 일단 실내에 들어온 모기들을 대충 때려잡고, 문에 뚫린 구멍은 점퍼를 이용해서 가로 막았다. 오늘 하루 고생한 허리에는 파스를 두장 붙이고 욱신거리는 발목에도 물파스를 발랐다. 그리고 공책과 볼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불빛 아래에서 오늘 하루의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 혼자하는 여행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다. 거기에 차가운 맥주 한잔이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다.


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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