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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km를 걸어와서 한쪽이 터졌다.
▲ 낡은 운동화 1000km를 걸어와서 한쪽이 터졌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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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한쪽이 터졌다. 누쿠스에서 지작까지, 1000km 가까이 걸어오면서 운동화가 더이상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이 운동화는 사실 도보여행 출발할 때부터 이미 낡아있던 운동화다. 출발 전에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하면서 걷기에 적당한 새 신발을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흔히 말하는 기능성 운동화나 워킹 슈즈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포기했다. 새 신발이 발에 적응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동안 발도 고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보여행하면서 꼭 걷기에 최적화된 신발을 신을 필요는 없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장거리를 걷기에 적당한 신발은 내가 그동안 많이 신어서 익숙해진 신발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터져버린 운동화, 유씨부인처럼 '조침문'으로 애도할까

이 운동화는 몇 년 전부터 나와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여행한 신발이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해서 멀리 마다가스카르까지. 이 운동화는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고생을 해온 것일까.

그 기간 동안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무사했던 이 신발이 이제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모양이다. 타슈켄트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마 버틸 수 있겠지만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가면 이 운동화도 더이상은 신지 못할 것같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해진다. 조선시대 때 유씨 부인은 자신이 아끼던 바늘이 부러지자 <조침문>이란 명문을 남겨서 바늘을 애도했는데, 나도 그런 글로 엉망이 된 운동화를 기념해야 할까.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물건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도보여행의 귀중품이라 할 수 있는 운동화라면 더더욱. 운동화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니까 여기저기가 낡아 있다. 뒤축도 많이 닳았고 바닥도 펑크나기 직전이다. 사막과 도시를 걸어오면서 한번도 빨지 않았기 때문에 몰골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이 운동화도 참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 운동화를 다시 신고 끈을 단단히 묶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다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에 가면 영원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터져버린 운동화를 생각하며

중심가의 조형물
▲ 지작 시내 중심가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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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가 늘어선 도로
▲ 굴리스탄 가는 길 가로수가 늘어선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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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꾸려서 호텔을 나온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길을 찾았다. 지작 시내의 중심가에는 대로가 있다. 그 대로 양옆에는 작은 샛길들이 주욱 있다. 마치 나무기둥에 붙어 있는 수많은 잔가지처럼.

"굴리스탄?"

현지인들에게 묻자 이들은 친절하게 굴리스탄 가는 길을 알려준다. 철로가 깔려있는 길을 따라서 버스정거장 방향으로 향한다. 정거장답게 수많은 차량과 인파로 붐빈다. 이곳에서 운전사들에게 다시 굴리스탄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운전사들이 서로 자기 차에 타라면서 권한다.

"고맙지만 걸어갈 거예요!"

호텔을 나와서 1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굴리스탄 가는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제 타슈켄트에 도착할 때까지 더이상의 큰 도시는 없다. 대도시를 빠져나오면서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찌 보면 이런 부대낌도 혼자하는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10월 1일이다. 도보여행을 시작한 것이 8월 28일이니까 두번째로 달이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국군의 날인데 때마침 여기서도 나한테 이런 저런 생각할 만한 일들이 생긴 것이다.

지작에서 굴리스탄 가는 길은 역시 쭉 뻗은 포장도로다. 길의 옆에는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서있고, 그 길을 넘어가니까 가로수가 사라지고 일직선의 지평선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지평선을 이곳에 오니까 신물이 나도록 보게 된다.

우즈베키스탄의 위도는 한반도 북쪽의 위도와 비슷하다. 대신에 지형에서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인데, 우즈베키스탄은 국토의 70%가 황무지다. 그 황무지는 우즈베키스탄의 중서부에 몰려 있다. 그러니 그쪽에서 걸어오다 보면 지겹도록 지평선을 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어제와 그저께 이틀 동안 비가 내렸고 오늘은 맑게 개었다. 도보여행하는 나에게는 비가 장애물이겠지만, 건조한 대륙성 기후인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가 반가운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기후가 건조하면 좋은 점이 하나있다.

여름에 아무리 기온이 높이 올라가더라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는 것이다. 습도가 많아서 끈적끈적하고 불쾌지수가 높은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아무튼 나는 더이상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만 오지 마라, 그러면 최대한 힘을 발휘해서 남은 거리를 주파할 수 있다.

종일 걸어서 작은 마을에 도착하다

가로수가 사라지고 지평선이 나타난다.
▲ 굴리스탄 가는 길 가로수가 사라지고 지평선이 나타난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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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지작을 떠나면서 양고기국 한 그릇 먹은 것이 전부다. 가다보면 길가에 식당이 있겠지 생각했는데 걷다보니까 그게 아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지평선과 허허벌판뿐. 길가에는 식당이 없다. 어쩌다가 식당 같은 건물이 보여서 다가가면 어김없이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다. 오늘만 쉬는 건지 아니면 아예 망해서 폐업을 한건지 모르겠다.

나는 물과 빵으로 배를 채우면서 계속 걸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 한 시간 후면 해가 지는데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하나. 뒤쪽에서 누가 날 부른다. 러시아어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날 부른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까 중년 남성이 한 어린아이와 함께 소떼를 몰고 오고 있다. 족히 수십 마리는 되보이는 소떼. 하루 종일 소년이랑 같이 소떼에게 풀을 먹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오늘은 수요일인데 이 소년은 학교에도 안 가고 하루종일 일을 했나. 아무튼 이 근처 어디에 마을이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잠을 잘 만한 식당도 있을지 모른다.

그는 이곳에 살고 있는 이스마이로프다. 여기는 빡따꼴 지역이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나브루즈 마을이란다.

"마을에 혹시 식당 있어요?"
"없어요. 잘 곳을 찾는 거면 우리집에 가요."

그는 대번에 나를 초대한다. 소년은 날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두팔을 벌리고 신나게 달려간다. 소떼들은 줄을 서서 걷지만 종종 대열을 이탈하는 놈들이 있다. 그때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소를 때리면서 무리 안으로 집어넣는다. 소가 정말 많다. 이 많은 소를 두 명이 하루종일 돌보았단 말인가.

"이 소들이 전부 아저씨 집 소예요?"
"아니에요. 이 마을 소예요. 마을에는 전부 150 마리의 소가 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거리로

나를 초대해준 이스마이로프 집
▲ 나브루즈 마을 나를 초대해준 이스마이로프 집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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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도로 안쪽에 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서 울퉁불퉁한 흙길로 접어들자, 옆에 있는 목화밭으로 뛰어들어가는 소들도 있다. 소년과 이스마이로프는 그 소들을 길로 내모느라 바쁘다. 집이 한두 채씩 나오자 소들은 알아서 자신의 집으로 찾아들어간다. 마을의 소를 전부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 얼마 남지 않은 소들은 이스마이로프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스마이로프는 나를 자신의 집 거실로 들여보냈다. 짐을 풀고 앉아서 소년이 가져다 주는 녹차를 한 잔 마셨다. 외국인이 왔다는 소문이 작은 마을에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한두명씩 거실로 들어와서 나를 바라본다. 마치 동물원의 오랑우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또 다른 사람은 앉아서 이곳 남성들의 기호품인 '나스와이'를 꺼내든다.

나스와이 가격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주먹으로 한줌 쥐는 시늉을 하면서 500숨(1숨은 한화 약 1원)이라고 한다. 나와 함께 온 소년은 13세의 올름이다. 오늘 10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의 공휴일이라고 한다. 뭐라고 말하는 데 휴일이라는 것 밖에는 알아듯지를 못하겠다. 그래서 올름은 오늘 학교 대신에 소떼를 돌보러 나간 것이다. 어쩌면 길가의 식당들도 그래서 문을 안 열었던 것일까.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나는 이스마이로프와 함께 거실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면서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춰둔다. 새벽 5시 30분에. 직장이 어디길래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건지 궁금하다. 나는 편하게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잠깐 잔 것 같은데 요란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간은 5시 30분. 이스마이로프는 일어나서 옷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도 일어났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집주인이 일하러 나가는데 내가 여기 남아서 뭐하나. 나는 밖에서 대충 얼굴을 씻고 안으로 들어와서 옷을 입고 짐을 꾸렸다.

그리고 이스마이로프와 함께 집을 나섰다. 얼굴을 때리는 차갑고 상쾌한 새벽 공기. 이스마이로프와 함께 마을을 돌아서 거리로 나왔다. 그는 일터로 나는 굴리스탄으로 향한다.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다.


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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