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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 풀밭이 따로 없네"

 

 식탁에 늘어진 각종 채소 반찬을 보고 아빠가 늘 그렇듯 잔소리를 먼저 늘어놓는다. 강호동 못지 않게 삼시 세끼 고기반찬을 즐기시는 아버지의 눈에 김치와 나물뿐인 식탁이 맘에 들리 없다.

 

"시장에 못 가서 그래요. 오늘만 그냥 먹어요" 엄마는 미안한 듯 웃으며 아빠를 살살 달랜다.

 

 경기가 나빠지면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저녁 메뉴다. 사실 엄마는 저녁 한끼만은 언제나 살뜰히 차려냈다. 가족 모두가 바빠서 하루 한끼도 함께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가 악화되어 생활비를 줄이게 되면서 엄마가 시장에 가는 횟수도 하루 한번에서 일주일에 두 세 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엄마에겐 아직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냉장고맨'. 슈퍼맨이 지구를 지키고 베트맨이 밤을 지키듯 우리 집 식탁은 냉장고맨이 지킨다.

 

 내가 기억하는 냉장고는 언제나 정체불명의 검은 봉투로 가득 차있는 모습이다. 어쩌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 찾을라 치면, 검은 비닐의 향연에 내가 먼저 지쳐서 포기하게 되는 블랙홀 같다 해야 할까. 하지만 매번 싸움에서 패배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오징어면 오징어 떡이면 떡, 어찌 그리 신속하고 정확하게 쏙쏙 뽑아 내시는지! 마치 인형 뽑기 기계에서 귀여운 인형을 콕콕 집어 내는 집게만큼 냉장고를 뒤지는 엄마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어제는 오랜만에 엄마와 시장에 다녀왔다. 무거운 짐도 들어줄 겸 그 동안 못 나눴던 대화도 나눌 겸 우리는 천천히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정말 만원으로는 살게 아무것도 없네", "생선가격이 왜 이렇게 올랐지?" 오른 물가 때문에 씀씀이는 줄어드는데 반해 엄마의 지갑은 점점 얇아져 간다. "그냥 돼지고기 대신 냉장고에 있는 오징어나 볶아야겠다.", "아이고 상추 값도 올랐구나. 그냥 냉장실에 있는 배추로 싸먹을까?". 언제 오징어와 배추가 냉장고에 감추어져 있었던 걸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엄마는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냉장고에 있는 것만 꺼내 먹어도 아마 몇 개월은 먹을걸?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미리 사다 놓았지"

 

 불황이다, 경기가 어렵다, 주식이 폭락했다 등등. 텔레비전만 켜기만 하면 들려오는 말들이라 요새는 불황이란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듣는다. 하지만 정작 피부에 와 닿는 건 저녁 메뉴의 변화 정도이다. 아빠가 좋아하는 불고기 대신 언제부터 냉장고속 검음 봉투에 싸여 잠자고 있었는지 모를 오징어가 차려지고, 고기는 상추 대신 배추로 싸먹는 저녁에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거려진다. 아빠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당분간 보긴 어렵겠지만, 검은 봉투와 열심히 씨름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잔디밭 같은 우리 집 식탁이 오늘 내 눈에는 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불황이 OOO에 미치는 영향' 응모글


#불황#꽃보다#식탁#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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