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의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광장공포증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서울광장 경찰버스 봉쇄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시는 문화행사 이외에는 사용 제한을 내걸었습니다. 광장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와 야당은 광장의 위기에 맞서 주민직접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찾아오는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와 공동으로 '광장을 열어라'는 주제로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우리에게는 본디 '광장'이란 게 없었다. 우리말 중 광장과 가장 가까운 단어로는 '마당'을 꼽을 수 있겠다. 마을의 공터 마당이든, 장터 마당이든, 커다란 대갓집의 앞마당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인 마당에서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다양한 삶의 행위들이 펼쳐졌다.
씨뿌리기나 김매기나 추수를 끝낸 민초들은 마당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축제를 벌였다. 낮에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기며 풍물을 치기도 하고, 밤이 되면 횃불을 켜고 모여 앉아 밤을 새워 신명난 굿판을 벌였다. 우리의 전통예술인 탈춤, 풍물, 판소리, 남사당놀이 등은 마당에서 민초들과 함께 어울리던 마당의 예술이었고, 마당의 놀이였다. 마당에 모인 민초들은 함께 울고 웃으며 고단한 삶을 잠시 위로하고 휴식하며, 새로운 노동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당은 때로 양반이나 지배 권력에게 위협적인 장소로 돌변하기도 했다. 수탈과 억압이 행해질 때는 분노한 민초들이 마당에 모여 학정과 비리를 성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떼를 지어 관아로 행진하기도 했다. 민란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질 때는 '사발통문'을 돌려 삽시간에 수많은 군중이 농기구와 죽창과 횃불을 들고 모여들기도 했다.
이렇듯 마당은 우리 민초들의 삶의 공간이요, 축제의 공간이요, 대화와 토론의 공간이요, 저항과 혁명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초석이 된 공간, 광장
이러한 마당의 의미를 근대화를 통해 서구적 개념과 섞어서 되살려낸 공간이 '광장'이다.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아고라(agora)'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를 하던 것이 광장문화의 시작이었다. 아고라는 본래 시민들의 집회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집회가 열리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로마 시대에는 '포럼(forum)'이 아고라의 역할을 했다.
이 아고라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공간이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조금씩 발전되었다. 귀족들은 왕정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었지만, 그들 또한 시민들에게 억압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 권력에 대한 저항을 아고라에서의 대화나 토론이나 시위 등을 통해서 이루어냈다.
세계의 유서 깊은 도시에는 어김없이 아고라의 전통을 이어 받은 광장이 있다. 그리고 그 광장들은 억압적 권력과 시민들의 저항의 역사로 얼룩져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 몇 광장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은 본래 이름이 '루이15세 광장'이었는데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루이 15세의 동상을 철거하고 단두대를 세운 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와 혁명지도자인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등 1000여 명을 처형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붉은 광장'은 본래 이름이 '아름다운 광장'이었는데 사회주의 혁명 후 시위, 처형, 폭동, 연설의 주무대가 되었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체코의 '바츨라프 광장'은 1968년에 구 소련군이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프라하의 봄'의 비극을 안고 있다.
중국의 '텐안먼(천안문) 광장'은 1919년의 5.4운동과 1976년의 4.5운동의 발상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주요한 국민적 운동이 벌어진 곳이었으나, 1989년의 대규모 민주화시위 도중 진압군의 발포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광장들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아픔을 씻어내고 지금은 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세계적 이벤트나 축제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역사의 무게를 가진 '서울광장'
우리의 '서울광장'도 그 광장들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역사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서울광장이 2004년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시청 앞 광장'이라 불렸고, 그 이전에는 '대한문 앞 광장'이라 불렸다.
1897년 무렵,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했다가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펼쳐보려고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방사선형 도로를 만들고 앞쪽에 광장을 설치했다.
이 대한문 앞 광장에서 고종을 옹호하는 시위가 열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애국지사들의 3.1만세 운동이 열렸다. 그 뒤 4.19혁명이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 광장은 국민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이 시청 앞 광장을 뒤덮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대규모 거리응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반대를 위한 촛불집회와 함께 수많은 문화행사들이 계속 펼쳐지면서, 서울광장은 우리나라 광장문화의 상징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최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서울광장의 개방을 둘러싸고 시민들과 당국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다가 '노제(路祭)'를 계기로 잠시 개방된 적이 있다.
40분 동안 피가 말랐던 기억
노제가 열리던 5월 29일 오전 7시, 노제총감독이었던 나는 서울광장에 있었다. 그런데 오전 7시에 경찰차량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위진압차로 철통같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상부의 지시가 없기 때문에 철수할 수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음향기재와 의상과 소품과 대형 북을 실은 차량들과 크레인 등이 경찰차에 막혀 광장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스태프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발을 동동 굴러댔다. 오전 11시에 시작하기로 한 노제를 치르려면 음향 테스트와 가수와 무용수와 배우들의 연습과 영상테스트 등을 한 번쯤은 해야 하는데, 만약 계속 철수가 늦어지면 행사가 엉망이 되어 대실패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임자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부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행자부나 경찰청의 책임자를 수배해서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대한문 앞길에 시민들과 차량이 몰려들더니 광장을 막은 경찰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틀기도 하고, 마이크로 경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대한문 앞길이 항의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뒤덮이자, 마침내 경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이 오전 7시 40분이었다. 모두들 초긴장 상태에서 최선을 다한 끝에 노제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그 40분 동안의 피말리는 긴장과 분노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공권력에 포위된 텅 빈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다. 정부는 서울광장에서 벌이는 대규모 집회나 행사를 불허할 뿐 아니라, 졸속으로 만든 조례를 통해 광장문화를 축소시키거나 없애버리려 시도하고 있다.
민심의 용광로이며, 소통의 광장이며, 신명의 놀이터였던 서울광장은 점점 서울의 고립된 섬으로 변해가고 있다. 시위진압차에 둘러싸여 시민들과 격리된 서울광장에게 묻고 싶다.
서울광장, 너는 누구냐?
☞서울광장 사용권리 되찾기 주민조례개정운동 사이트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 김명곤 기자는 전 문화부 장관으로 5월 29일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총감독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