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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 나의 꾸며진 겉모습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는 활자가 빽빽한 인문학 서적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만화광이었다. 글자가 빼곡한 책장 넘기기는 고역이었고, 책꽂이에 있는 엄마의 세계문학 전집을 꾹 참고 읽어보려 했으나 읽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그나마 대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봤으나 끝까지 읽지 못했다. 많이 빌리고 많이 펼쳐봤다고 그 책을 읽었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읽었단 사실만 남지 내용은 머릿속에 남지 않으니까. 난 정말로 책과 친한 성격은 못 되었다. 단지 책을 읽는다는 모습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겉모습을 포장했을 뿐이다.

무식하게 독서하던 친구 K

대학 졸업할 무렵 만나게 된 친구 K. 그는 시사 문제와 각종 역사 지식에 해박(역사를 전공한 나보다도)했으며 TV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비판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정치 부패, 친일역사 청산, 경제 재벌 비리 등등, 사회과학서적을 따로 읽지 않아도 각종 사회문제에 대해 그에게 들은 지식만 해도 책 몇 권 분량은 될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진정한 독서광이었다. 그는 책을 급하게 읽고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보다 제대로 독서할 줄 알았다. 심지어 만화책까지 그는 정독해서 읽었다. 마치 책 속에 들어 있는 내용 하나하나를 통째로 씹어 먹을 것처럼.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책 읽는 데 목숨을 걸지?

책 읽는 데 어째서 오랜 시간이 걸리냐는 내 물음에 K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용 하나 하나를 다 이해하고 싶은 걸. 칸 구성은 어떻게 했는지, 인물 표정은 어떤지, 이 상황에서 인물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해보거든."

그 말을 들은 순간 개그 프로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의 표정과 동선, 코믹한 대사와 몸동작까지 전부 체크하는 '오덕후'를 만난 심정. 킬링타임 용으로 손에 드는 만화책마저 그에게는 탐구 대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던 K가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야근과 잦은 술자리로 책 읽을 시간이 없어졌다. 어쩌다 쉬는 날도 몸이 힘들어 구토와 어지러움 등을 호소한다. 자주 만나지 못하다보니 예전처럼 그의 잡학다식한 수다를 듣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의 말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었고 촛불집회 등 다양한 현상을 접하면서 생전 안 보던 인문사회과학책까지 읽게 되었건만. 책을 읽고 신이 나서 그 내용 얘기를 해주고 싶어 전화해도, K에게는 더 이상 내 대화에 맞장구쳐줄 기력이 없다.

그러니까 서경식과 김상봉 선생님의 대담을 담은 책 <만남>을 읽고, 그 친구가 한 말이 연상되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 바뀐 즐거운 경험을 자랑하려고 해도 K가 들어줄 여유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 책을 읽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책은 재일 조선인 지식인 서경식과 서로주체성의 철학자 김상봉의 대담을 통한 한국 사회 해부다. 광주의 기억과 역사 저변에 살아갔던 민중들의 역사, 역사 청산을 둘러싼 망각의 문제, 결국에는 한국에서의 진정한 해방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본다.

이 책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키워드는 '고통'과 '기억'이다. 5.18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한국사 전반에 걸쳐 한국인이 겪어온 고통을 망각하지 않고 고스란히 자신을 성찰하는 힘으로 쓸 수는 없는가에 대한 물음이 책 속에 드러난다. 책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하나같이 묵직했다. 두 저자가 제기한 역사적 굴레에서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 때문에(사실 내용이 어려워서) 좀더 집중하면서 읽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국가는 민중의 고통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주체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국민들에게 기생해 온 권력이다. 일본과 미국처럼 외부에 식민지를 건설하지 못한 기득권층은 그 식민지를 자국 안에 만들고 다수의 사람들을 노예화한다. 그 속에서 역사를 살아낸 민중의 삶은 고되지만 제대로 고통을 직시한 적도 없고, 그 고통을 제대로 기억하려 애쓴 적도 없다.

서경식 선생은 대화를 통해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풍토에 실망했다고 토로한다. 그에 대해 김상봉 선생은 민중이 현실의 벼랑 끝에 몰리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호출된다고 설명하지만, 필요한 시기에 과거가 호출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며 회의감을 드러내는 서경식 선생의 말에 보다 동감이 갔다.

이 책에서 마치 지금의 현실을 예감하기라도 한듯, 서경식 선생이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든 구절은 지금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의 참여정부에 참고가 될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일본에서도 1994~1995년 짧은 기간 사회당이 여당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100석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교원 노조라든가, 지방자치단체 하급공무원들이 사회당을 여당으로 만들어준 것이죠.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지지기반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당은 정권을 잡자 국기나 국가에 대한 격렬한 저항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회당의 의석은 10석도 채 안 됩니다. 한가지만 더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그런 식으로 조직이 퇴각해버리고 나자 이제 남은 것은 고립된 개별적인 저항뿐입니다."

2007년도의 시점에서 쓰여진 서술이라, 지금에서야 드러난 참여정부의 여러 정책적 성과를 생각하면 전부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현 정권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때 진보 진영이 노무현에 대해 느꼈던 어떤 실망감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 정권을 향하는 시민단체의 비판도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적확한 지적이다.

타인과 자신의 고통을 망각하지 않고 그 고통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두 사람의 자세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봉 선생은 울 수 없는 민중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이가 학자라고 했다. 수많은 과오를 통해 비틀려진 현실을 꿋꿋이 살아내려는 두 지식인의 각오,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마음이 동했다. 책의 문장과 현실의 감각이 일치한 순간 진지한 독서를 회피하던 예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나는 K가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K는 자신이 처한 형편없는 기업 문화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어그러짐 탓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함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직은 역사나 정치에 대해 정합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나지만, 내용이 어렵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현실에 물음표를 던지며 많은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고통을 통해 삶을 성찰하다 보면 잦은 술자리와 야근으로 K가 비틀거리지 않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K가 다시 책을 읽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만남#김상봉#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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