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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최고 권력자, '날 좀 도와 주오'

태풍이 지나갔다. 허나, 아직 바람이 거세다. 언제 어느 순간에 후폭풍을 맞을런지 모른다. 세자빈을 사사하라는 명이 내렸지만 누구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살얼음판이다. 헌납 장응일이 혼자 나섰다.

"신은 임금을 사랑할 줄만 아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신이 오늘 말하면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임금을 저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사형시키는 것과 사사(賜死)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평범한 사람도 죄목을 억지로 정할 수 없는 것인데 지친(至親)에게 어떻게 억측으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부를 거두소서."

당돌하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직언이다. 최근세사에서 이승만이 '조봉암을 처단하라.'고 할 때, 박정희가 '감대중을 납치해 처치하라.'고 할 때, 전두환이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사형시키려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세례를 받았다는 현대인들이 옛 선인들보다 더 비루하고 용렬했다는 반증이다.

양화당 인조 임금의 집무공간이다
양화당인조 임금의 집무공간이다 ⓒ 이정근

인조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맞받아치고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헌납이라면 사간원의 정5품 벼슬이다. 비록 간쟁을 주 임무로 하는 관리라 하지만 정5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군주의 체통이 아니다. 임금이 관망하고 있는 사이 분위기를 파악한 최명길이 차자를 올렸다.

"죽을죄가 있으면 반드시 삼복(三覆)한 다음에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중시해서입니다. 더구나 지친에게 어찌 이와 같이 빨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뭇사람들의 뜻은 폐출은 옳게 여기지만 사사하는 것은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억지로 시행한다면 후회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소신 생각에는 먼저 폐출하여 왕실의 호적에서 지우고 외딴섬에 축출하여 잠깐 동안 목숨을 살려 두어 고복(考覆)의 의미를 부여하다가 처단하신다면 인심이 복종해 유감이 없게 될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나라의 일이 우려되는 점이 많습니다."

역시 산전수전 심양 인질전 까지 치른 역전 노장이다. 우선 목숨부터 살리고 그 다음은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최명길에 이어 이경석, 신경진, 이경여가 임금의 조치는 부적절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자신이 처결하면 대소신료들이 동조하리라 믿었던 인조는 당황했다. 이슥한 밤. 소의조씨가 품속을 파고들었다.

"전하! 왜 이리 떨고 계십니까?"
"떨긴 무슨...날씨가 좀 추워서 그러느니라."

인조를 빤히 올려다보는 소의조씨의 눈동자가 '너, 혁명 공포증에 떨고 있니? 걱정 하지 마. 내가 있자너' 라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저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한방에 보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잔뜩 궁한 인조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모습을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조소의가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몇 놈 골라서 벼슬을 쳐버리면 즉효라는 것이다.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시고 좌상을 들라 이르십시오."

이튿날, 가장 신뢰하는 심복 김자점을 양화당으로 불렀다.

"절해고도에 있는 느낌이다."
"황공하옵니다."
"사대부의 여론이 어떠한가?"

"신이 오랫동안 대궐 안에 있다가 어제 겨우 밖에 나갔으므로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 어떻게 기색과 논의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일을 시원하게 푸신다면 신민(臣民)들이 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

"최명길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끝 부분에 '나라의 일이 우려되는 점이 많다.'고 하였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종용을 받고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을 위협하고자 말한 것인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인조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위아래가 의심하고 서먹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말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비록 위협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세자빈과 최명길의 관계에 대하여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혁명으로 집권한 자, 혁명 공포증에 떤다

"심려를 놓으소서."

"대신으로 하여금 미쳐 날뛰고 허둥대게 하는 등 평상시의 성품을 잃게 하였다니 강씨의 기세가 막중하다 하겠다. 무릇 대신이라고 하는 자는 시퍼런 칼날이 앞에 닥치더라도 동요되지 않아야 하는데 일을 논하는 시기에 당초에 가졌던 견해를 지키지도 못하니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근일의 흐름은 우려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이다."

혁명으로 집권한 자는 혁명으로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반정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 역시 반정으로 쫓겨날까봐 노심초사다.

"신이 전하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감히 숨길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명길과 이경석은 일찍이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어찌 글 솜씨가 모자라서 그랬겠는가. 우상이 올린 석 장의 상소마다 말이 각각 다르니 이것이 어찌 군자(君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옛말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했다. 비록 벗의 사이라도 신의를 귀하게 여기는데 임금을 섬긴다는 자가 아침저녁으로 말을 변경하고 어제와 오늘 한 말이 다르니 놀라운 일이다. 강씨의 죽고 사는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지만 조정이 이와 같으니 윤기(倫紀)를 어떻게 밝힐 수 있겠으며 분수를 어떻게 정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이경석의 어짐을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실로 눈 먼 소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조가 탄식하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최명길의 차자 가운데 '계복(啓覆)'이란 말이 있는데 이른바 '계복'이란 말은 살인, 강도에 적용하는 것이다. 어찌 강상(綱常)의 변에다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강씨의 일은 큰 변이므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달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큰 변이라고 말하는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큰 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것은 군부(君父)가 본디 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감히 실없는 의논에 동요되어 임금을 위협하려고 한단 말인가?"

노기를 띠던 인조의 안색이 굳어졌다.

"오늘의 일은 위에서는 너그럽게 봐주고 아래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투어 간해야 옳습니다. 신의 의견은 본래 이와 같았는데 여러 신하들은 오직 후세의 논의가 어떻게 평할 것인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말을 가려서 하는 선비는 비록 손님을 상대할 때도 신중히 생각하여 하는데 하물며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어찌 감히 망발을 할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해야 합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내말을 믿어라

"나는 일찍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덕과 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중에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이 죄가 있으면 법에 따라 시행했고 공이 있는 재상이라 하더라도 관대하게 처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죽이고 친속은 용서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요즈음 말하는 자들이 진실로 소견이 있어서 말한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 임금이 소망하였기 때문에 찬성한다.'거나 아니면 '간사한 사람이 참소하였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국록을 먹은 관리라면 일의 허실(虛實)을 명백히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물어물 말하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만 하니 이러고도 임금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의 실체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면 임금의 말만 믿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강씨 당의 말에만 의거하여 임금을 천박하게 여기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인조가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그것은 강빈 개인에 대한 성토보다도 비호세력에 대한 공격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삼복(三覆)-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을 3번 심리하는 일. 초복, 재복, 삼복.
고복(考覆)-죽을죄에 해당하는 죄인을 재심리하는 것
신민(臣民)-백성과 신하
계복(啓覆)-사형수의 사형집행을 재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
윤기(倫紀)-윤리와 기강



#인조#소현세자#강빈#양화당#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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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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