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시대의 궁중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두 왕자의 등장을 계기로 <동이>는 요즘 새로운 활력을 보이고 있다. 장 희빈의 아들인 세자 이윤(훗날의 경종, 윤찬 분)과 동이 최 숙빈의 아들인 연잉군 이금(훗날의 영조, 이형석 분) 간에 벌어지고 있는 '눈에 보이는 따뜻한 우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이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 당기고 있다.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한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 한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는다"라는 어느 CF 문구처럼, 투쟁에만 익숙한 궁중의 '학부모'들은 두 아이의 관계를 '우정+경쟁'이 아닌 '경쟁 일변도'의 관계로 바꾸려 하고 있다.
아이들의 엄마인 장 희빈(이소연 분)과 최 숙빈(한효주 분)은 물론이고, 두 아이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현왕후(박하선 분)까지도 이들의 대리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 비친 인현왕후의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세자 이윤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인현왕후가 왕실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연잉군 이금으로 세자를 교체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동이 아들을 세자로 미는 인현왕후, 실제도 그랬을까
8월 31일 방영된 제48부에서 인현왕후는 동이에게 "어떤 경우에도 연잉군을 왕으로 만들라"고 권유하는 한편, 장희빈에게는 "모든 것(세자의 불임)을 전하에게 고백하라"면서 "세자는 교체될 수 있다"고 압박을 가했다.
인현왕후가 세자 이윤의 불임을 이유로 연잉군 이금의 세자책봉을 추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인현왕후 사망 당시의 세자 이윤은 아직 14세였기에 이 시기에 그가 불임문제에 시달렸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불임문제가 크게 부각된 시기는 33세의 나이로 등극한 이후였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설령 불임문제가 없었더라도 인현왕후는 세자 이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장 희빈 때문에 한때 폐위를 당한 적이 있는 인현왕후로서는 장 희빈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최 숙빈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게 훨씬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TV 속의 상황은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다. 실제의 인현왕후는 세자 이윤의 왕권도전을 방해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세자 이윤이 인현왕후를 포함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흠잡힐 빌미를 주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자 이윤이 고도의 자기관리와 대단한 인간미로 인현왕후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경종대왕 행장>과 <인현왕후전>을 들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공격할 수 없었던 경종 이윤, 왜?
행장(行狀)이란 망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다. 왕이 죽으면 왕의 행장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경종 이윤이 왕으로서 재위하다가 죽은 뒤인 영조의 재위기에 <경종대왕 행장>이란 것이 기록되었다.
<경종대왕 행장>은 경종과 대립관계였던 영조가 등극한 후에 기록된 글이므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명제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 경종의 약점들이 많이 쓰여 있겠지'라는 선입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행장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이 행장에서 경종 이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성인군자로 묘사되어 있다.
행장에 따르면,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통치 대행)을 했을 때나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나, 이윤은 신하들이나 종친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베풀었다. 그는 자기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과의 대인관계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인간관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심지어 죄수들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위나 추위가 극심해지면, 그는 측근들을 교도소에 파견했다고 한다. 왜? 교도소에 갇힌 자기 심복이 걱정되어서? 그게 아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되면, 일반 죄수들이 혹시나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럴 때면 측근들을 파견해서 수감자들을 살펴보도록 한 뒤에, 죄가 가벼운 사람들은 그냥 풀어주도록 했다고 한다.
추위나 더위가 닥칠 때에 감옥에 있는 일반 죄수들까지 걱정하는 통치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미를 베푸는 그런 태도는 그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변치 않았다고 한다.
장희빈 선물 물리친 인현왕후, 이윤이 다시 건네자...
이토록 대인관계를 철저히 관리한 이윤이 인현왕후를 소홀히 대했을 리 없다. <경종대왕 행장>은 이윤이 인현왕후에 대해서도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고 설명한 뒤에, 왕후 사망 당시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왕후께서 영결(永訣, 죽음을 통한 영원한 이별)했다고 하자, 민진후(왕후의 오빠)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지만 왕(경종)께서는 유독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문 밖에 나와서 갑자기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셨다."참고로, 인현왕후 사망 당시의 왕은 숙종이었다. 그런데도 <경종대왕 행장>에서는 당시의 이윤을 '세자'라 하지 않고 '왕'이라 칭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방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현왕후의 시신 앞에서는 슬픔을 표시하지 않던 이윤이 밖에 나가서야 비로소 민진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했다는 이 일화는, 그가 진심을 갖고 왕후를 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윤의 행동이 위선적이라고 판단했다면,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의 입을 통해서 이 일화가 세상에 소개되었을 리 없다.
장 희빈 하면 치를 떨었을 민씨 집안의 사람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면, 이윤이 평소 인현왕후에게 얼마나 극진히 대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왕후 측에서도 이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윤과 인현왕후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인현왕후전>을 통해서 보다 더 확실하게 입증될 수 있다. 전기(傳記)라고도 하고 소설이라고도 하는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장 희빈을 철저하게 폄하한 책이다. 그런 책에서마저 이윤과 왕후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현왕후전>에서는 왕후가 세자 이윤의 효성을 기뻐했다고 말한 뒤에, 왕후가 죽기 얼마 전에 있었던 생일 잔치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잔치의 주인공은 병든 인현왕후였다. 이때 공주와 후궁들이 왕후의 생일을 기념해 옷을 선사했다. 왕후가 복위한 뒤로 후궁으로 전락한 장 희빈 역시 옷을 선사했다.
인현왕후는 공주나 후궁들이 바친 옷은 마지못해 받았다. 하지만, 장 희빈이 바친 옷은 받지 않고 그냥 물리쳤다. 중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장 희빈에 대한 앙금을 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세자 이윤이 그 옷을 갖고 있다가 다시 바치자, 인현왕후는 "세자의 간절한 효성과 얼굴을 보아" 부득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 희빈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인현왕후전>에마저 이렇게 기록돼 있을 정도라면, 이윤과 왕후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장 희빈은 미워하면서도 그 아들 이윤만큼은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희빈에게도 인현왕후에게도 세자교체는 아니될 말위와 같은 기록들을 보면, 경종 이윤의 대인관계가 매우 원만했으며 그와 인현왕후의 관계도 상당히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 3년과 재위 4년을 합쳐, 도합 7년 동안 이윤이 국정을 무난히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세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연잉군 이금을 내세운 노론당이 경종 이윤을 상대로 정치적 공격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경종의 인간적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할 건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노론당이 집권한 후에 기록된 공식 문서인 <경종대왕 실록>이나 노론당의 입장에서 기록된 <인현왕후전>에서 경종을 극진히 칭송하는 것을 보면, 경종 이윤이 인간적 측면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한껏 위축된 자기 어머니의 처지를 의식하면서 자기수양과 대인관계에 만전을 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수파인 소론당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세자 시절과 대리청정 시절을 거쳐 무사히 국왕에 등극한 사실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그를 인현왕후가 과연 미워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친어머니 이상으로 대하는 이윤을 보면서, 인현왕후는 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장희빈의 자식인 것이 무척 한스러웠을지 모른다. 설령 14세의 이윤이 훗날 불임이 될 것을 미리 알았다 해도, 인현왕후는 세자 교체를 머릿속에서마저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