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수의 아이 (1∼4) (이가라시 다이스케 글·그림,김완 옮김,애니북스,2008∼2010/9500원씩)2008년 8월에 1권과 2권이 나온 뒤, 2009년 9월에 3권이 나오고, 2010년 9월에 이르러 비로소 4권이 나온 <해수의 아이>를 차근차근 읽습니다. <해수의 아이>를 그린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은 <리틀 포레스트>라는 만화를 함께 그렸습니다. 저는 <리틀 포레스트>를 읽고 나서 <해수의 아이>를 읽었고, 집식구가 이이 만화책은 모두 훑고 싶다 해서 <마녀 (1∼2)>(2007)와 <영혼>(2008)을 장만하여 함께 읽었습니다.
올해에 넷째 권이 나온 <해수의 아이>를 펴낸 출판사에서는 "장대한 스케일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로 이루어진 만화라 말하고, "이야기의 완성도와 대중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넷째 권이라 말합니다.
출판사에서 누리책방에 보도자료를 띄운 그대로 <해수의 아이>는 틀림없이 큰 판을 짜서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도록 이끌어 가는 작품입니다. 이야기가 한결 빈틈없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곳곳을 가다듬으며 비로소 무언가를 밝히며 끝맺겠구나 싶습니다.
처음 <해수의 아이> 1권을 집었을 때부터 두 해가 지나 4권을 집은 엊그제까지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 다른 만화에서도 얼핏 느끼지만, 무엇보다 <해수의 아이>를 보면서 이 만화에서는 '만화 그림'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만화 <해수의 아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텐데, 바닷물 안팎 이야기를 그리면서 '사진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립'니다. 네모난 틀에 나오는 그림결과 짜임새는 으레 '사진기로 들여다본 모습'입니다.
어떠한 만화책이든 뒷그림을 그릴 때에는 사진을 찍어서 그린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서 밑그림을 그린 뒤에 펜으로 마무리하자면 힘드니까요. 사진을 찍어 놓고 일터로 돌아와서 뒷그림을 그리며, 이러한 뒷그림은 흔히 다른 이한테 도움을 받아 그립니다. 널리 알려진 만화 <요츠바랑!>을 잘 살피면, 이 만화에 나오는 뒷그림이나 무대나 자전거 그림 들은 '만화로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사진을 만화로 옮긴 그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요츠바랑!> 1권부터 9권까지 보는 내내 '처음부터 만화로 여기어 만화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찍은 다음 만화로 옮긴 그림'이었기 때문에 못마땅하다거나 거리끼는구나 하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요츠바랑!>에서는 이러한 그림결이 만화 이야기에 살며시 잘 녹아듭니다. 이와 달리 <해수의 아이>에서는 '사진 틀거리에 맞춘 그림'이 작품에 썩 녹아들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에서 옮겨 그린 그림이면서 '구도가 깨진' 그림이 있는가 하면 '조화가 어긋난' 그림이 자주 보입니다. 흔한 말로 '데생 연습이 모자란' 셈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일부러 '못 그리는 그림'으로 만화를 그리는 분이 있습니다만, 그림이 좀 어설프더라도 이야기를 슬기로우며 알차고 재미나게 이어가면 '어설픈 그림'이 외려 힘이 되거나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만화 <해수의 아이>에 고래가 자주 나옵니다. 고래를 이야기하기로는 소설 <모비딕>이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얼마 앞서 소설 <모비딕>을 새롭게 다시 읽은 적 있는데, <모비딕>을 읽는 동안 <해수의 아이>가 떠올라 이 만화를 겹쳐 읽고 보니(<모비딕> 새 번역은 2010년 1월에 나왔습니다. 새 번역을 읽으며 <해수의 아이> 1∼3권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은 '만화책에서 고래 발자국을 바탕으로 바다와 우주와 사람과 어머니와 자연과 목숨과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 하나 그리고팠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구나 그리고픈 만화를 그려야 합니다. 어느 때에 이르러 나 스스로 그리고픈 만화를 그릴 수 있고, 부딪히고 싶을 때에 부딪히며 그릴 수 있습니다. 한창 무르익은 다음에만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가 지나야만 제대로 무르익는 만화쟁이로 우뚝 서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그리는 내 만화가 나로서는 가장 무르익을 때 그리는 만화로 여길 수 있어요.
이제 5권이 나올 <해수의 아이>는 5권으로 끝을 맺을는지, 6권이나 7권으로 이어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어떻게든 끝을 내겠지요. 그런데 작품 하나를 끝맺으면서 읽는이한테 말고 그린이 스스로 무엇을 깨닫거나 보거나 헤아릴는지 모르겠습니다. 만화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읽거나 보는 사람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바야흐로 '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만, '읽거나 보는 사람에 앞서 그리는(또는 쓰거나 찍는) 사람부터 당신 스스로 당신 가슴이 뭉클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 '작품'이라고 밝히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한테 <해수의 아이>는 어떤 만화일는지요?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한테 이 만화는 '작품'으로 꼽을 만한지요?
굳이 출판사 보도자료에 적힌 몇 마디를 들었습니다만, 만화 <해수의 아이>는 가없이 크고 넓은 우주와 자연과 바다와 어머니와 삶과 사랑과 목숨 들을 골고루 뒤섞어 알뜰히 보여주고자 힘씁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우주'라는 낱말을 꺼내야 우주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듯 집에서 손수 굽는 빵 하나와 빚는 양념 하나에 얼마든지 너르고 깊은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어, 이 양념은 어릴 적에 어머니하고 …….'라 읊으며 무언가 깨닫는 사이 저절로 어머니 이야기를 너르고 깊이 다룹니다. 생각없이 숲길이나 시골길을 거니는데 '사각' 소리를 내는 가랑잎을 밟은 그때에 나 스스로도 모르게 자연을 밝힌 셈입니다. 힘든 나날이라 도쿄를 떠나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가 지내며 마주하는 사람들하고 시나브로 사랑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섣불리 내세운다고 제대로 내세워지지 않는 삶입니다. 대학교 철학과를 다녀야만 철학을 하지 않습니다. 철학교수여야 생각이 깊거나 너르겠습니까. 데생 솜씨가 온누리에서 첫손을 꼽아야 그림을 가장 잘 그리거나 만화가 가장 아름답다 하겠습니까. 가장 비싼 장비를 써야 사진을 가장 잘 찍지 않는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은 비싼 장비를 쓰고파 하는 마음앓이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더 비싸거나 더 크거나 더 빠른 차를 장만해야 서울이나 부산 같은 도시에서 출퇴근을 더 느긋하며 즐거이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은 두 다리로 출퇴근할 줄 모를 뿐더러 자전거로 출퇴근할 줄조차 모릅니다. 길이 막혀 길에서 기름을 쏟아부으며 버리는 돈뿐 아니라 애먼 시간을 헤아리면서, 아침에 삼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일찍 나서며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가면 내 삶과 삶터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살필 겨를이 없는 한국사람이고 서울사람(도시사람)입니다.
<해수의 아이> 5권이 나오면 곧바로 장만할 생각입니다. 6권이나 7권까지 나오더라도 기쁘게 장만하겠지요. 그러나 1권을 집었을 때부터 4권까지 오는 동안 '만화를 읽는 즐거움'과 '작품 하나 만나는 재미'가 자꾸 옅어집니다.
긴 작품을 그리고 싶으면 참말 길게 바라보며 길게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짧은 작품이라 해서 빼어난 작품이 아닐 수 없을 뿐더러, 짧게 끝맺는 작품을 하나둘 꾸준히 내놓다 보면, 바로 이 '짧은 작품이 끈처럼 하나로 이어지며 또다른 긴 작품' 하나로 새삼스레 태어나거나 거듭나는 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애써 힘겹게 너무 '커다란' 말과 이야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풀숲에 깃든 수많은 들풀 가운데 한 포기만 바라보아도 얼마든지 목숨 하나와 자연 사슬을 밝힐 수 있으니까요.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지구인데, 사람 이야기 하나 못 다루겠습니까. 좋은 끈은 가까이에 있어요. 바다는 늘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 스스로 참다이 느끼려 하지 못하니 못 느낄 뿐이랍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이 흘리는 땀방울이 고요하게 묻어나 촉촉해지는 작품 하나를 다시금 만나고 싶습니다. 팔에서 힘을 빼셔요. 머리에서 생각을 지우셔요. 마음에서 아쉬움을 터셔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