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 네 번째 대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의 평화로운 합의'를 이루어낸 '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다. 미국식 소득의 양극화 없이 고용성장을 이룬 인간적인 모습의 사회협약모델을 심층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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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인수범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네덜란드는 1982년 바세나르 사회협약을 통해 '고용안정과 성장'을 함께 달성한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회협약은 산업사회의 기본적인 이해당사자인 노동계와 경영계가 중요 문제에 대해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노사 양측이 서로 승리할 수 있는 성과를 낼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사회협약에 정부가 나서서 노사가 협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협약의 주체는 노사단체일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에서 1980년대 이후 일련의 사회협약이 가능했던 것도 그 이전부터 노사 간에 사회적 대화 전통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최고노동위' 창설부터 1950년 사회경제위원회 설립까지
네덜란드는 역사적·문화적으로 사회적 대화의 전통이 강한 국가이다. 네덜란드는 지역적으로는 11개 주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적으로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서로 협의해야 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여건 아래에서 대화를 통한 합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사회협약의 기본 주체인 노동과 자본이 함께 참여한 노사정기구는 1919년에 아베르제 노동부장관의 주창으로 창설된 '최고노동위원회'이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재건과정으로서, 네덜란드의 노사정이 함께 당시의 정치경제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회적 대화의 전통이 분명히 20세기 초반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사회협약 기구가 생긴 것은 1945년에 노동재단이 설립되면서부터이다. 노동재단은 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쟁이 끝난 이후의 경제 재건을 위해 노사가 함께 동등한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재단은 노사가 함께 협의하는 기구라는 의미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전체적인 사회·경제적인 사안을 논의하면서 노사가 공동책임을 지고 협의해 나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점에서 1950년에 정부정책과 관련하여 정부나 의회에 정책을 건의하는 역할을 하는 사회경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사회경제위원회는 중장기 사회경제정책 제안서를 2년에 한 번씩 제출하며, 그 내용은 5년~10년까지를 전망하는 정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률적으로 노동재단은 노사 간 민간기구인 데 비해 사회경제위원회는 공법에 의해 제도화된 기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재단은 임금 및 단체교섭에 관한 사항처럼 노사가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을 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사회경제위원회는 정부정책에 대한 건의를 한다는 점에서 상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즉 노동재단은 노사 당사자만으로 구성되지만, 사회경제위원회는 노사 외에 공익이 함께 참여하는 3자기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노동재단은 노총과 사용자연맹으로 구성되어 노사 각각 10명의 대표로 총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와는 연 2회(봄, 가을)에 걸쳐 사회경제발전에 관련한 논의를 하고 있다. 노동재단이 주로 하고 있는 기능은 노사 간의 수시적 대화 및 현안 논의, 노사 간의 임금·노동조건에 대한 합의, 정부와 기타 문제에 대한 노동재단의 의견 제시, 정부 및 기타 기관과의 협의, 정부와 노사단체간의 연락소 등의 역할이다.
이에 비해 사회경제위원회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사회경제정책에 관여하며 기본적으로는 정부 및 의회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경제위원회의 참여주체는 노총, 사용자연맹, 정부가 각각 추천한 11명 총 33명으로 구성된다.
네덜란드 노사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바세나르협약'
이처럼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화 전통과 노동재단 및 사회경제위원회의 지속적인 기능에 기반하여,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하게 된 여건은 전반적인 경제위기 상황에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자본주의 호황기를 겪은 네덜란드 경제는 1970년대 들어 석유위기, 국제적 경기침체, 사회복지 부담 증가로 1980년대 초에 대규모 재정적자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임금과 물가의 급격한 상승은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1970년대 초에 이미 조선이나 섬유산업의 경제활동이 더 이상 매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초과하는 공공지출, 높은 실업률(11.6%)로 나타났으며, 세계적으로는 이를 두고 '네덜란드 병'으로 지칭하였다.
여기에 1970년대 후반에는 전 세계 경제를 경기 후퇴로 몰고 간 2차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실업률, 특히 청년실업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위기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민-자유 연립정부의 루버스 총리의 주도 아래, 당시 노사대표였던 빔 콕과 판 베인이 1982년 11월 24일에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판 베인 살고 있던 헤이그 인근 바세나르 지역에서 협상이 진행된 것을 감안하여 바세나르 협약으로 명명되었다.
바세나르 협약은 협약 체결 자체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1970년대 내내 노사 간의 협약 체결이 시도되었고 정부도 이를 촉구하였지만, 제대로 협약이 체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82년 협약은 향후 15년 이상 네덜란드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협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 노조가 투자와 고용의 활성화를 위한 지배적인 전략으로 임금인상 억제를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노조가 이 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경기침체 상황에서 임금보다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확대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바세나르 협약은 전통적인 중앙단체협약은 아니지만 중요한 조직적·규범적 의미를 지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임금인상 억제를 강제로 합의한 것이 아니라 소속노조가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협약에는 합동의견, 권고사항과 함께 직장에서의 음주, 비기독교 휴일의 인정, 소수인종 보호, 시간제 근로자의 권리, 청년실업, 교육, 질병휴직, 임금인상 억제 등 78개 분야의 가이드라인뿐만 아니라 지엽적 협상결과까지 모두 망라하고 있다.
바세나르 협약의 핵심 내용은 근로시간 단축 및 시간제 고용 활성화를 통한 고용창출이다. 노동조합은 임금인상 억제를 감수하는 대신에 근로시간을 종전의 40시간에서 38시간으로 단축하고 시간제 고용을 확대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가족중시주의 속에서 여성의 시간제 고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간제 고용의 비중은 여성의 경우에는 2008년 현재 75.2%에 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도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시간제 고용의 비중이 높은 나라이며 약 47.0%의 노동자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성의 경우는 시간제 고용 비중이 20% 대에 머물고 있다.
임금인상 억제 측면에서는 법정 최저임금을 동결하였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임금연동제를 폐지하였고, 공공부분 임금은 1984년까지 3%를 삭감하였다.
노조 반대파업 있었지만, 노사정은 사회협약으로 복귀
1980년대 바세나르 협약에 의해 경기침체를 극복한 네덜란드는 1990년대 초 들어 다시 경제 불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93년에 '신노선 협약'(A New Course Accord)을 체결하게 된다. 신노선 협약은 다시 임금인상 억제, 단체교섭 분권화, 근로시간 단축(주 38시간에서 주 36시간으로 단축), 인적자원투자 확대, 근로소득세 경감을 내용으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재단과 사회경제위원회는 임금인상 자제, 일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낮은 노동참가율 극복, 공공부문 축소, 실업문제 해결,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추진을 중요 과제로 권고한 바 있다. 신노선 협약도 임금인상 억제로 노동비용이 6% 감소하는 등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지만 전체 경제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을 누리는 성과를 내었다.
이 사회협약을 기반으로 1990년대에는 다양한 노동·사회정책 개혁이 추진되었다. 첫째,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중반 이후 경제호황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노사갈등의 모습을 보이면서 노사 간 임금인상 자제를 위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둘째, 1998년에 '고용유연성 및 안정법'을 도입하여 고용 및 해고 기간을 단축하여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 셋째, 사회복지제도를 개혁하여 실업급여 지급요건 및 상병보험제도의 수급자격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기존의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에서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회협약은 단순히 임금 및 근로시간 단축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사회정책의 변화에도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네덜란드 경제는 다시 2000년 들어 경제성장률이 급감하고 실업률도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2002년 3월 노동자와 사용자 대표는 노동재단에서 만나 경제침체 극복을 위해서 기업경쟁력 증대를 위한 다양한 조치에 합의하였다.
노사 대표 간 기본적 합의사항에 대한 기초 안은 사회경제위원회에서 노사 및 공익위원 간의 자문보고서 형태로 작성되었다. 이 점을 보면 사회협약의 형성 과정에 노동재단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2003년 '노사 간 고용조건정책' 및 2004년 '고용조건 협상에 관한 노동재단 성명서'에 합의하였다.
이번 사회적 합의에서도 노동조합에서는 임금인상 수준 동결을 희생하면서 대신에 조기 퇴직 및 장애자 수혜제도 등 취약계층 근로자를 위한 사회정책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얻는 성과를 보였다. 이 합의에서는 정부가 이미 발표한 사회정책 개혁안을 노사 대표의 요구에 따라 유보할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노사 대표의 합의를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4년에는 정부가 전통적인 사회합의 방식으로는 근원적인 사회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조기퇴직제도·상병급부제도·실업보험제도 개혁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으나 2004년 가을 노동조합의 대대적인 반대 파업을 좌절된 바 있다.
결국 노사정은 전통적인 사회협약 방식으로 복귀하여 원래 정부안보다 매우 후퇴한 개혁안에 합의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고용 분야에서 일을 보다 많이 하는 쪽으로 인센티브 시스템을 개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왜 경제 호황·안정기에 '사회협약'은 실패하는가?
사회협약이 체결된 시기는 경제적으로 불황인 상황에서 이루어져 왔고, 네덜란드 경제가 호황 및 안정기에는 노사합의에 매번 실패하였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네덜란드는 노사관계에 이미 전통적인 산업별 단체교섭 관행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경제가 호황인 국면에서 임금인상 억제를 포함한 노동자의 양보를 내용으로 하는 중앙 사회협약을 체결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협약은 노사 간에 단체교섭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제 및 노동시장이 특수한 조건에 처해 있을 경우에 노사가 함께 단기간에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 사회협약이 가능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네덜란드에는 문화적으로 사회 합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노사 간 사회적 대화가 제도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노동재단 및 사회경제위원회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사가 주요 관심사항에 대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고, 국가의 사회경제정책에 대해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한다는 점이 사회협약이 정기적으로 체결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구영식 기자(팀장), 조명신 기자, 인수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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