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1일 밤(현지 시각)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9·11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빈 라덴을 죽여 "정의"를 실현했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에 미국 전역이 환호하는 분위기다. 일요일 밤 늦은 시각에 발표됐는데도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들고 백악관 앞에 모여들어 "USA"를 연호했다. "미국과 전 세계에 정말 멋진 날",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며 빈 라덴 사살을 축하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오바마의 재선 가도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빈 라덴 사살은 치솟은 기름값, 재정적자 문제, 더딘 경기회복 속도 등으로 하락하던 오바마의 지지율을 반등시킬 만한 사건이라는 분석이다.
빈 라덴 사살 소식은 이렇게 오바마도, 평범한 미국 시민들도 웃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권력자와 시민들은 이 소식에 마냥 즐거워해도 괜찮은 것일까? 의문이 든다.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9·11테러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였다. 무엇보다 죄 없는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다. 그런 '테러'의 대명사로 각인된 빈 라덴은 미국이 가장 잡고 싶어 한 인물로 꼽혔다. 그렇지만 빈 라덴은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체포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빈 라덴이 버젓이 살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9·11테러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을 잃은 이들의 속이 더 시커메졌을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빈 라덴을 9·11테러가 발생한 지 10년 만에 죽였다는 소식에 환호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해 보였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인들, '괴물' 키운 역사 돌아볼까
그런데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크게 보면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빈 라덴이라는 '괴물'을 키우는 데 미국이 일조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 말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슬림 전사들이 소련에 맞서고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무자헤딘'으로 불린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미국이 베트남에서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곤욕을 치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결국 진이 빠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해야 했다.
그런데 불똥이 미국으로 튀었다. 미국이 키운 반소 무자헤딘의 상당수가 각기 본국으로 돌아간 후 반미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의 주축이 된 것이다. 이슬람권을 쥐락펴락하려는 세력은 소련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이 적이라는 논리였다.
빈 라덴도 그중 하나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미국이 파키스탄 정보기관을 통해 양성한 반소 무슬림 전사들이었다. 미국이 제거한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빈 라덴과 마찬가지로 한때 미국의 '동지'였다. '미국 헌병'이라고 조롱당할 정도로 친미 노선에 충실했던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1979년 혁명으로 무너지자, 미국은 후세인을 후원해 이란을 견제했다.
과거사를 되새기는 이유는 미국 정부와 국민이 자국의 외교 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극단주의가 이슬람권 일각에서 일정하게 유지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한 '괴물'을 키워낸 미국의 책임은 없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 테러 세력은 최근 들어 이슬람권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아랍 민주화 바람에서도 잘 드러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시리아와 예멘 등에서 독재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극단주의 테러 세력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감안해 미국 정부는 이날 자국민에게 여행경보를 발령하고 해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도 경계 강화 지시를 내렸다. 빈 라덴 사살을 계기로 반미 테러 움직임이 늘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어 보이지만, '괴물'을 키워온 과거를 미국인들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땜질식 처방에 그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빈 라덴 사살 소식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빈 라덴 사살을 계기로 자국의 외교 정책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드디어 복수했다'는 쾌감에만 젖는다면 또 다른 '괴물'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복수의 쾌감 넘어 아프간·이라크 아픔 공감하는 모습 보여주길
두 번째는 빈 라덴 사망을 계기로 기억돼야 할 것은 9·11테러 희생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9·11테러 발생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던 2001년 10월 7일 미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고, 그 희생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9·11테러를 계기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희생되는 민간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주요한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 내에서도 나오는 비판이다(
관련 기사 : "아이 9명 죽은 건 주요 뉴스가 아닌가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을 억울하게 잃은 것은 9·11테러로 죄 없는 미국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두 사안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도에선 커다란 격차가 느껴진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2003년 시작된 이라크 전쟁으로 희생된 이라크 사람들 문제에서도 이 점은 공통적이라는 지적도 그동안 여러 번 나왔다.
빈 라덴 사살 소식에 환호하는 미국인들. 그들이 복수의 쾌감을 넘어 국적에 관계없이 테러와 잘못된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이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국이 벌인 전쟁 범죄를 진정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미국 바깥의 세계인들이 그 환호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전 세계에 정말 멋진 날"은 바로 그런 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