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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사람'은 우리 경제의 각 분야에서 독자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현장 노동자부터 학자, 관료, CEO, 사회단체 등 그 누구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편집자말]
 명동성당에서 향린교회로 내려오는 골목길 2층에 자리잡은 티베트 전문음식점 '포탈라'를 운영하는 민수씨(본명 텐진 델렉)와 이근혜씨 부부.
명동성당에서 향린교회로 내려오는 골목길 2층에 자리잡은 티베트 전문음식점 '포탈라'를 운영하는 민수씨(본명 텐진 델렉)와 이근혜씨 부부. ⓒ 권우성

이근혜(31)씨는 22년 전 아버지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1989년 10월 16일이었다. 수업 중간에 나와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부산의 한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57일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근혜씨의 부모는 경남 거제에서 핫도그와 호떡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그날 단속반이 좌판과 손수레를 뒤엎었고, 아버지는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 "오늘 강제철거 당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 몸 불사른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오늘, 근혜씨가 운영하는 '포탈라 레스토랑'이 철거 위기에 처했다.

서울 명동에 있는 포탈라는 근혜씨와 티베트 망명자인 그의 남편 민수(34·본명 텐진 델렉)씨가 지난 2008년 6월 열었다. 근혜씨의 아버지가 2007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받은 보상금이 종잣돈이 됐다. 포탈라는 국내 유일의 티베트 음식점으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사람들에게 중국에 탄압받는 티베트의 현실을 알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티베트 전문음식점 '포탈라' 식탁 위에 '티베트에 자유를!'이라고 영문으로 적힌 종이가 놓여 있다.
티베트 전문음식점 '포탈라' 식탁 위에 '티베트에 자유를!'이라고 영문으로 적힌 종이가 놓여 있다. ⓒ 권우성

부부는 지난 4월 29일 건물주로부터 5월 31일까지 가게를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소송을 제기하고 강제 철거를 단행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도시환경정비사업(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가게들이 하나씩 철거됐다. 포탈라에도 용역직원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그러면 아버지의 목숨 값도, '자유 티베트'의 꿈도 같이 철거되는 것일 터다.

28일 포탈라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최근 이들의 사연이 언론과 트위터로 알려지고 있다. 근혜씨는 "용산·두리반·포탈라에서 보듯, 철거 위기에 처해 어려움에 빠진 곳이 많다"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싸우겠다"고 전했다. 다음은 이날 오전 포탈라에서 만난 이근혜·민수씨 부부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강제철거에 대항해 목숨 끊은 아버지 이해 못 했다"


- 어렸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했나?

이근혜(이하 근혜) : "어렸을 때라 현실감이 없었다. 사고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 원주에서 9.9㎡(3평)짜리 옷가게를 열었다. 새벽에 동대문 가서 옷을 떼어 왔다. 그런데 5년 뒤 옷가게가 있던 건물이 철거됐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공공근로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을 것 같다.
근혜 :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갔다. 중소기업에서 2년 일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에 갔지만, 또 돈이 없어서 졸업을 못했다.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왜 아버지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 국기와 포탈라궁 사진이 붙어 있는 '포탈라'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근혜씨.
티베트 국기와 포탈라궁 사진이 붙어 있는 '포탈라'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근혜씨. ⓒ 권우성

- 남편 민수씨와 어떻게 만났나?
근혜 : "매해 전국노점상총연합(전노련)에서 아버지를 추모했기 때문에, 2004년 인사하러 갔다. 그때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사무실에 이주노동자노조에서 일하던 남편이 자주 들렀다. 그때부터 알게 됐다. 남편은 그때 내가 자기를 꾄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웃음)"

- 민수씨는 2008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유 티베트'를 외쳐 이름이 알려졌다.
민수 : "티베트 망명 2세로 네팔 카트만두에 살았다. 시위로 15일 동안 감옥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창한 활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1998년 한국에 와서 공사판 등을 전전했다.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티베트 유혈 사태(중국 경찰이 반중국 시위대를 강제 진압해 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를 접했을 때, 가슴이 울었다."

근혜 : "유혈 사태가 일어난 날, 남편이 티베트 친구 3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들 티베트 라싸에 있는 가족과 전화가 안 된다고 울먹였다. 이를 계기로 민수씨가 티베트 친구들에게 연락해,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 시위를 하게 됐다."

- 당시 경험이 포탈라 레스토랑을 만든 계기가 됐나?
민수 : "티베트에 대한 관심이 2달 지나니 줄어들었다. 티베트 현실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다. 그래서 한국에 없는 티베트 음식점을 열자고 생각했다."

"강제 철거는 아버지 목숨 값을 잃는 것"

- 돈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겠다.
근혜 : "2007년 아버지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1억4000만 원을 받았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아버지 목숨 값이었다. 이 돈 중 빚을 갚고 전셋집을 구하는 데 쓴 돈을 빼고 1억 원가량으로 2008년 6월 가게를 열었다. 남편은 남는 시간 부업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민수 : "여러 문제로 티베트인 주방장이 그해 말까지 도착하지 못해서, 몇 달간은 제대로 된 영업을 못했다. 또한 금융위기가 터져 정말 어려웠다. 운영비가 부족해 지인들한테 돈을 빌려 가게를 꾸렸다. 시설 투자비를 합쳐 포탈라에 들어간 돈만 2억4000만 원이다."

- 사실 티베트 음식은 생소하다.
근혜 : "생소한 음식이라 손님을 끌어들이고 단골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사가 안돼 가게를 팔 생각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유일한 티베트 음식점으로 알려져, 그나마 장사가 잘됐다."

이들 부부에게 행복은 잠시였다. 명동 2·3·4 구역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명동 3구역은 4월부터 철거가 이뤄졌고, 14일 상인들이 카페 '마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고 있다. 포탈라가 있는 명동 4구역의 경우, 4월 25~26일 가게 15곳에 5월 31일까지 가게를 비우라는 통고문이 날아들었다.

- 3구역 철거될 때 어땠나?
근혜 : "지난 4일 3구역에서 2차 강제 명도(철거)가 있던 날, 그곳 상인들과 함께했다. 400명의 용역직원들이 상인들의 가게를 강제로 철거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울었다. 힘이 없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 그 후, 직접 명도 통고문을 받았을 어땠나?
근혜 : "이제 장사가 잘되려는데 내쫓긴다니 큰 충격이었다. 철거는 아버지 목숨 값을 잃는 것이다. 딸 새옴이(5살)와 아들 대옴이(14개월)를 어떻게 키워야 되나 걱정이 컸다."

민수 : "2007년 5월 결혼 이후, 신혼집이 철거된 것만 4번이다. 돈이 없어 재개발지역에서 집을 얻은 탓이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적도 있고, 철거 현장에 많이 가봤다. 철거민들은 정말 힘들게 싸웠다. 통고문을 받았을 때, 정말 막막했다."

"한국에서 살기 왜 이리 힘드나? 용삼 참사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

 점심식사 시간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 하느라 분주한 민수씨.
점심식사 시간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 하느라 분주한 민수씨. ⓒ 권우성

- 2008년 6월 임대계약을 맺을 때, 건물주가 재개발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근혜 : "당시 건물주는 '1983년부터 개발계획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개발이 안 되고 있다, 5년은 문제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8년 8월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 주식회사가 건물을 사들이더니, 이제 재개발을 한다며 명도 통고문을 보낸 것이다."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은 국민은행(49%)과 대우건설(44%)이 주요 주주로 참여한 부동산 개발 회사다. 이미 KTB 부동산 펀드와 새마을금고 등으로부터 2500억 원가량의 대출을 받았다. 이 회사는 명동 3구역(4131.7㎡)에 지상 25층 업무용 빌딩을 짓는 내용의 사업시행인가를 받았다. 4구역에 대해서는 개발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 용산 참사 이후,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근혜 : "용산 참사 이후 토지 보상법이 개정됐지만, 영업손실보상금이 3개월 치에서 4개월 치로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마저도 사업시행인가 전에 세입자를 내보내면, 한 푼도 내주지 않아도 된다.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은 그걸 노린 것이다. 우리가 투자한 금액은커녕 한 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할 수 있다. 회사는 우리 세입자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민수 : "용산 참사 이후에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나? 정치인들의 말만 많았지,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사람은 죽었지만 용산 재개발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직도 세입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알려야 한다."

- 앞으로 힘겨운 싸움이 남았다.
근혜 : "용산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다. 두리반에서는 한 세입자가 보상을 받았다. 명동에서는 더 많은 세입자가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싸워야 한다. 아버지에 이어 내가 다시 강제철거를 맞닥뜨린 것은, 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민수 : "한국에서 살기 왜 이렇게 힘드나. 없는 사람 살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높은 건물 세우면 선진국 되나?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자살·이혼 1위인 이유를 외국인인 나도 아는데, 한국 사람은 모른다. 철거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포탈라를 통해 많은 것이 변하고, 약자 편드는 사회로 바뀌면 좋겠다."


#포탈라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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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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