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의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
글 : 박순옥·송주민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한국 사람들이 영국 병원에 가면 놀라는 게 있죠.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거. 그리고 변변한 의료기구도 없어요. 최신식 의료 설비들이 있는 한국 병원과는 너무 비교되는 거죠."영국에서 산 지 8년 됐다는 어느 유학생의 말이다. 그렇다면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료 시스템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 한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사회주의적'이라 비난하는 NHS 아래에서도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는 영국인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지난 7일(현지시각)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은 영국 런던에서 '들이대' 취재를 시도했다. 큼지막한 보드를 양팔에 들고 쌀쌀맞다고 소문난 영국인들을 만나러 런던 도심으로 진출했다. 그 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Survey: UK Medical Service(영국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조사)그리고 물었다.
"NHS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택지도 간단했다.
Pro/Against'(지지/반대) 자기가 생각하는 곳에 스티커를 붙이는, 아주 간단한 설문조사였다.
[좋아요] "집도 사고 차도 사야 하는데... 의료는 정부가""공짜니까 (NHS가) 좋다."취재팀이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이었다. 여든이 훌쩍 넘어 보였던 코쓰(Coath)씨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라고 짧게 답했다. 왜 NHS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런던 사람들은 '뭐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당연히 "공짜가 좋아"를 외쳤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판타스틱"이라고 외친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린 파크 근처에서 만난 관광버스회사 직원 테일러(Tayler)씨도 NHS 찬양론자였다.
"런던은 모든 게 비싸 살기 어렵다. 우리는 집도 사야하고 차도 사야하고 옷도 사야한다. 거기다 세금도 낸다. 그러니 정부가 의료 정도는 공짜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년 남성 제임스(James)씨는 "생명과 직결된 의료 없이 어떻게 살 수가 있겠나? 모든 사람이 무료로 제공받는 NHS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다른 나라는 돈을 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NHS는 참 좋은 제도"라고 평했다. 대학생인 테레사(Theresa)도 당연하다는 듯이 "학생들은 돈이 없는데,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좋을 수밖에"라고 답했다.
이런 공짜 찬양론(?) 말고 구체적인 경험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원을 산책하던 70대 노인 로빈슨(Robinson)씨는 "얼마 전 남편이 갑자기 고열이 나 응급실을 이용했는데, 기다리지도 않고 서비스를 잘 받았다"며 "엑스레이, 피검사 등 모든 처치를 편하게 받아 고맙고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대학생 조나스(Jonas)씨도 "진료를 기다려야 할 땐 힘든데 아프거나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시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공원에서 만난 브라운(Brown)씨는 "다른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이게 생활이고 익숙할 뿐"이라고 짧게 답했다. 1948년에 시작돼 60년이 넘게 이어온 NHS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외에도 "내가 지금 NHS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느냐"고 웃으며 답한 중년 여성도 있었다. NHS는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 등 170만 명이 일하는 영국 최대 공공부문이기도 하다.
[나빠요] "취지는 좋지만 손 볼 데가 너무 많아"
"GP(일반의)들이 아파도 약을 잘 안 지어준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표정으로 '지켜보자'는 소리를 자주 한다. 제왕절개 수술을 했는데, 방 하나에 환자 30명이 들어차 있었다. 간호사들은 친절했지만 일손이 부족해 서비스 질은 나빴다."프랑스에서 온 수잔나(Susanna)씨의 열변이었다. 열정적이라는 프랑스인의 기질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말을 걸기가 무섭게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미국처럼 개인 돈이 많이 드는 시스템에는 반대하고 유럽식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NHS는 취지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정부에서 운영을 제대로 못해 서비스 질이 떨어지는 측면이 큰 것 같다"고 지적했다.
NHS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손 볼 부분이 많다는 지적은 또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니콜라스(Nicolas)씨는 "시스템의 콘셉트 자체는 좋은데, 더 발전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정부에서 너무 많은 돈을 써야 하기에 비합리적인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뉴질랜드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며 GP와 같은 주치의가 있다는 점에서 영국과 유사하다.
브라질에서 온 에디컬(Ethical)씨는 "병원에 3일 있었는데, 증상을 잘 짚어내지도 못하고 서비스도 별로였던 기억이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개인의 건강은 자기 돈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게 옳다."미국에서 여행을 왔다는 청년 브로디(Broady)씨는 취재진에게 먼저 다가와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정부에서 해주는 건 좋지 않은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무상의료뿐만 아니라 국민보험 자체도 '사회주의적'이라고 본다.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국가 차원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려다가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생명 걸린 일인데 돈에 좌우돼서야 되겠는가"이분법을 거부하고 '중도'를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어느 퀵 서비스 기사는 "아파서 의사한테 갔는데 기다리라고 하면 힘들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우리는 다른 걸 경험해 보지 못했고 경험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럼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며 스티커를 지지/반대의 중간에 붙였다.
런던 한복판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대부분 NHS에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NHS를 자연스럽게 누리는 공기이자 익숙한 친구처럼 여기며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적이건 아니건, 비효율적이건 아니건 간에 영국인들에겐 60년 넘게 함께 해온 일상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논란은 있지만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자연스러운 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저 느낌상, 익숙한 친구에게 호의를 표하듯 'Pro(지지)'에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물론 NHS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의 경우, 불만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라면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내의 생명이 걸린 일인데 그게 돈에 좌우되어서야 되겠는가."공원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의 말이다. 건강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는, 그 낯선 생각을 영국인들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