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 일상생활과 밀착한 지방자치는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작 기초자치단체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정치인에 비해 크지 않은 편입니다.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의 조명이 기초단체장보다는 주로 정치인에게 집중한 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구 50만 명이 넘는 수도권 기초단체장은 조 단위 예산을 집행하고 지역구 국회의원 수도 서넛을 웃돕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365일 전국 기초단체장을 찾아가 공약 사안을 중심으로 이렇게 묻기로 했습니다. 시장(군수-구청장)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하면, Mayor, what matters most?, 편의상 '기초단체장 인터뷰 MWMM?'로 이름 붙였습니다. [편집자말] |
[ 기사 수정 : 18일 오후 3시] 아, 구청장 취임사도 이렇게 멋질 수 있구나. 유종필(55) 관악구청장 인터뷰를 앞두고 읽어본 취임사가 그랬다. 구청 업무의 태반이 교통과 주택 그리고 청소인데, 유 구청장은 취임사에서 "지식과 정보가 권력이 되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돈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면서 "보이는 것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것이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부가가치 300조 원이 넘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K. 롤링과,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조국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다"고 말한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를 예로 들었다. 이어 그는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뛰노라"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노래처럼 "관악의 아이들이 무지개 다리를 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키워야 한다"면서 "'사람 중심 관악특별구'는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궁금했다. 취임사는 이렇게 멋있지만, 과연 관악구 주민들도 '사람 중심 관악특별구' 메시지에 감동을 받고 있을까? 과연 관악구의 아이들도 워즈워스처럼 가슴이 뛸까? 정치인 출신이 아니랄까 봐, 그는 첫 질문에 초장부터 '나꼼수'에서 유행시킨 '깔때기'를 들이댔다.
도서관을 '메인 공약'으로 내세운 유일한 기초단체장"선거에서 법정공약서라는 게 있다. 16쪽쯤 되는데 절반을 도서관 이야기로 채우고 나머지는 교육과 보육 문제만 했다. 다른 구청장들의 공약은 보통 교통·주택·재개발·청소 등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데 나는 과감하게 차별화했다. 주위에서 그렇게 해서 선거 치르겠냐고 걱정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서울시청 출입기자들도 취임사가 좋다고 하더라. 단체장들이 보통 공무원들이 써준 것을 토대로 취임사를 한다. 나도 취임사를 써가지고 왔길래 밀쳐두고 내가 그냥 짧게 썼다. 또 그런 메시지가 동네에서도 먹히냐고 물었는데 동네에서도 먹히더라."- 동네에서 어떤 게 먹히던가, 구체적인 반응을 전해 달라."첫째는 짧아서 좋다고 한다. 그다음에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좋다고 하더라. 모르긴 몰라도 전국 230개 기초단체장 취임사 중에서 가장 짧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선거에서 도서관을 주공약으로 내세운 유일한 후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관악구를 '도서관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과장성(?) 공약에 펄쩍 놀랄 일은 아니다. 신문 기자와 기업 홍보실을 거쳐 정치에 입문한 지 15년 된 그가 구청장이 되기 직전까지 역임한 직책은 한국학술정보협의회장과 국회도서관장이었다. '도서관 천국'은 자신의 '전문성'을 살린 공약인 셈이다.
- '사람 중심 관악특별구' 공약은 지식문화특구, 교육혁신특구, 일자리복지특구, 주거환경특구, 행정특구 등 5대 부문 사업으로 돼 있던데 우선순위를 매긴다면?"다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지식문화와 교육혁신이 1, 2위를 차지한다. 우리 구청에 '지식문화국'이 있고 그 안에 '도서관과'가 있는데 '지식문화국'이 있는 자치단체는 관악구가 유일하다. '도서관과'를 설치한 곳도 전국 자치구에서 처음이다.
교육혁신 분야에서는 '관악175 교육지원센터'를 들 수 있다. 올해부터 초중고교 전면 주5일제 수업이 실시되어 학교 안 가는 날이 175일로 거의 절반(48%)이다. 공교육은 기회균등이 생명이다. 학교는 기회균등이 보장되지만 학교에 안 가는 날은 집집마다 천차만별이다. 그걸 챙겨보자는 취지에서 '175교육지원팀'을 만들어 방과후 교실, 관내의 서울대·중앙대·숭실대 재학생들과 연계한 멘토링 자기주도학습 등을 운영하는 데 예산을 11억 원 정도 책정했다."
유 구청장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배석한 홍보과장이 깔때기를 들이민다.
"주 5일제 수업을 전면 실시하면 사설학원이 난무할 것에 대비해 자치단체로서는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전주MBC에서 취재해 가는 등 해 벤치마킹 사례가 좀 있다. 방과후 교실은 해당학교 시설을 활용하거나 지역아동센터 등 곳곳에서 이뤄지는데 특히 저소득층 자녀들을 흡수하는 효과가 크다."'걸어서 10분 거리 작은도서관' 사업으로 '상복' 터져- 지식문화특구 사업 중에서 역점 사업이 '작은도서관 확충'인데 '걸어서 10분 거리 작은도서관' 사업은 어느 정도 이행했나? "임기 중에 40개 이상을 짓기로 했는데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 기존의 새마을문고를 작은도서관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기능전환을 포함해 현재 총 13개를 설치했다. 주민 반응도 좋다. 사실 도서관은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이 가장 좋다. 시설은 서초동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여의도의 국회도서관이 좋지만 관악구민에게는 '강 건너 고층 빌딩'일 뿐이다."
- 작은도서관이라고 하지만 돈이 꽤 들 텐데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 "도서관을 제대로 새로 지으려면 땅값을 포함해 1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재원을 절약하기 위해 주로 동사무소, 체육센터 같은 기존의 공공건물을 활용해 도서관을 설치하고 있다. 또 구민 어린이집을 새로 지어서 옮겨 가거나 동사무소가 통폐합되어 건물이 비거나 하면, 그곳에 작은도서관을 설치하는 식이다."
- 도서관 신축에 100억 원이나 든다면 작은도서관은 평균 얼마나 들었나?"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기에 돈은 많이 안 든다. 그렇지만 일률적으로 얼마라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구민체육센터 빈 공간에 작은도서관을 설치하는 경우는 4천만 원 정도 들었다. 또 주민센터(동사무소)를 새로 지을 때 건물 한 켠에 작은도서관을 설치한 경우는 도서관 공간만 딱 잘라서 얼마가 들었다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또 관악산 입구 매표소를 사용하던 10평짜리 공간을 리모델링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詩) 전문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여긴 도서비까지 포함해 1억 원 조금 넘게 들었다. 또 낙성대 공원의 폐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낙성대 공원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도서구입비(3천만 원)를 포함해 9300만 원 정도 들었다. 낙성대 공원도서관은 공원을 찾은 주민들에게 아주 인기 있다."
- 작은도서관은 접근성은 좋지만 아무래도 자료의 한계가 있지 않나."작은도서관은 자료가 불충분하기에 통합운영이 중요하다. 그래서 관내의 작은도서관을 통합 시스템으로 운용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관내의 모든 도서관 자료가 나오는데 거기서 자료를 신청하면 다른 동네의 도서관 도서나 자료를 신청한 곳으로 배달해 준다. 이것을 '책 나래 서비스'라고 하는데 초창기에는 이용자가 월 1천 명이었는데 지금은 1만 명으로 늘었다. 장애인은 집까지 책을 배달해 준다.
또 관내 지하철 2호선 전철역에 '무인 유비쿼터스 도서관'을 설치했다. 주민들이 스마트폰으로 도서 신청을 하면 전철역 무인도서 대출기에 넣어주고 주민들이 찾아서 읽고 반납하면 된다. 서울대입구역에 설치했는데 이용자가 많아 행자부 U도서관 공모에서 1등을 해 2억4천만 원을 지원받아 올해 신림·낙성대·봉천·신대방 등 네 곳에 추가 설치한다. 그러면 관악구 전철역에는 모두 U도서관이 설치된다."
- 도서관 이용은 관악구민들만 가능한가?"도서관 회원이면 이용이 가능하다. 회원 8만 명 중에서 우리 구민이 70%이고 나머지는 인근 자치구 주민들이다."
구민들이 '도서관 천국'에 100% 공감하는지는 모르지만 유 구청장은 도서관 공약 덕분에 '상복'이 터졌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공약 실천을 평가한 '매니페스토 지방선거부분 약속이행 대상', (사)한국출판인회의에서 창의성을 발휘한 도서관 설치를 높이 산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 그리고 다산연구소가 행정안전부 후원 아래 풀뿌리 민주주의 구현과 지방재정 건전화에 앞장선 기초자치단체를 발굴해 시상하는 '다산목민 대상'이 그것이다.
전국 자치단체 30여 곳이 관악구 '작은도서관' 벤치마킹
지난 13일 맹형규 행정안전부장관이 시상한 다산목민대상은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을 기려 전국 기초자치단체를 엄격히 실사해 평가하는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졌다. 올해는 관악구와 부산 해운대구 그리고 충남 서천군이 수상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불과 며칠 전에 따끈따끈 상 받은 '자랑질'을 누가 말리리.
"실사단이 암행감찰까지 하면서 세게 조사하더라. 서울 자치구에서 다산목민대상 받기는 처음이다. 지방에선 예산으로 특색 있는 사업을 할 수 있지만 (예산이 한정된) 서울 자치구는 사업으로 상 받기 어렵다. 아무튼 '걸어서 10분 거리 작은도서관'으로 격려를 많이 받았고, 이를 벤치마킹한 자치단체도 30여 곳이나 된다."- 그런데 전국 및 서울시로부터 관악구가 받은 사업평가와 수상 실적을 보면, 첫해인 2010년은 21개 사업/11억 원이었는데, 2011년은 17개 사업/6억 3천만 원이더라. "사업평가의 성적은 좋은데 서울시의 인센티브 사업 규모가 24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줄어들어서 그렇다."
자랑은 길게, 해명은 짧게! 단순 명쾌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다소 과장되었다. 예를 들어, 관악구청이 연거푸 수상한 서울시의 그물망 복지사업 시상금은 1억5천만 원(2010년)에서 8천만 원(2011년)으로 줄었다. 그러나 옥외광고물 개선사업 등의 시상금은 큰 변화가 없었다.
- 교육혁신특구 사업 중에서 '서울대를 활용한 평생교육도시 건설' 사업은 흥미로운 정책이던데 잘되고 있나? "관악구는 2004년 서울시에서 최초로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되어 관내에 평생학습관이 있다. 제가 구청장이 되어서는 '학관협력사업'을 구축했다. 서울대와 연계한 관악시민대학·시민대학원 등이 있고, 서울대 미술관·박물관·도서관·규장각에서 하는 강의는 관악구와 서울시의 예산 지원으로 저렴하게 하는데 수준이 높고 인기가 많다. 서울대와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는 평생학습관에서 연간 80개 프로그램을 운용하는데 인터넷에서 모집하면 즉시 차버린다. 그 밖에도 서울대 체육관에서 하는 건강프로그램, 서울대 사범대에서 운영하는 초중등 학생을 위한 관악영재교육원도 있다. 과학과 수학을 중심으로 물리학 교실·공학 캠프 등이 운용된다."
"임기 내 '관악벤처밸리' 기반 조성에 역점"유 구청장은 '상상력과 창의력만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라고 강조하지만 구민들은 당장 주거환경 개선 같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로 구정을 평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만 중시하다간, 구민들에게서 '도서관이 밥 먹여 주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도서관 사업은 궤도에 올라 순항 중이다. 교육 사업은 '175교육지원센터'를 성공시키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 역점을 두는 것은 임기 내에 가칭 '관악벤처밸리' 조성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관악구는 전형적 주거지역이라서 산업시설이 없다. 구로구나 은평구는 군부대 이전 등으로 빈 땅이 많은데 우리는 빈 땅도 없다. 그래서 남부순환로 변에 도시 공간구조를 개편해 도시계획상 '지구중심'에서 '지역중심'으로, 준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용도 변경할 계획이다.그리고 작년에 공을 들여 낙성대 주변 연구단지를 2배 이상 늘리는 지구단위 계획이 서울시 도시계획위에서 통과되었다. 삼성 R&D센터(지하 4층, 지상 10층)가 2014년에 준공되면 연구원들이 들어와 3000명 정도의 고용 유발효과가 있다. 그러면 IT, BT, NT 같은 첨단산업과 연계하는 가칭 '관악벤처밸리'의 기반이 조성되는데 이것은 선거공약이었다." - 구청 단위에서 일자리 늘리기가 가능한가?"사실 구청에선 '일자리다운 일자리'를 만들기가 어렵다. 관내에 사회적 기업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세스넷'(유승삼 이사장)이라고 있다. 여기와 연계해 창업보육작업을 하고 있다. 또 구청 안에 '일자리사업과'가 있어 강당에서 매년 구인구직 취업박람회를 개최한다.
또 해외 도서관에 가보니 미국에는 '잡(job) 인포메이션' 코너가 있더라. 도서관은 잘 나가는 사람들보다 구직자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래서 도서관에 일자리를 알선하는 '잡 오아시스'를 설치했다. 전문직업상담사 2명을 배치해 상담해주고, 직업 관련 도서 300여 권을 비치해 놓고 있는데 여기를 통해 일자리 구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 구청장은 바쁜 직업인 것 같다. '구청장 24시'는?"보통 오전 6시 30분에 집에서 나와 운동하러 간다. 관악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서울대 운동장에서 뛰기도 하고, 서울대 체육관에서 헬스나 수영 등등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한다. 나는 단체장 중에서 청사에 가장 늦게 오고 일찍 나가는 타입이다. 9시 전에 출근해 퇴근은 이변이 없는 한 6시 전에 한다. 늦게 오고 일찍 나가니 공무원들은 좋아하더라.(웃음) 그러나 구청장은 집에 누워 있어도 구청장이다. 휴가가 따로 없다. 피고용자가 아니기에, CEO는 집에 있든 뉴칼레도니아에 가 있든 CEO인 것이다."
- 집에서는 좋아하는가?"집에서는 이래도 좋아하고, 저래도 좋아한다."(웃음)
"저는 주민들이 포장마차에서 부르면 안 간다"- 평소 자신만의 주민과의 소통 방법이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인지?"매주 목요일에 '목요 동장'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날은 제가 동에 가서 새벽에 주민들과 같이 청소하고 여러 단체들과 회의를 하면서 '각본 없는 민원 청취'를 한다. 그 후엔 민원이 제기된 현장을 직접 방문한다. 경로당,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어린이집, 공부방 등 각종 복지시설과 수급자 가정에 가서 간담회를 갖고 민원을 청취한다. 작년 1년 동안 청취한 민원이 1천 건이 넘는데 그중 200여 건은 불가능한 것이고 800건은 처리했거나 처리 중이다.
구청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머리와 가슴, 그리고 손발로 할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그런데 주민들은 보통 손발이 하는 일만 원한다. 머리를 써서 좋은 기획을 내고 가슴으로 현장에서 부딪쳐야 하는데 단체장들이 그렇게 길을 들인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친목회나 자율방범대 같은 각종 모임에서 와 달라는 요청이 많은데 그런 데 찾아다니면 해야 할 일을 못한다. 관내에 동이 21개인데 각종 친목회만 1천 개 이상이다. 저는 구민들께 손발이 할 수 있는 동 단위 행사에는 안가겠다고 했다. 일부에선 반발도 있지만 지금은 많이들 이해한다."
- '구관'들이 친목회만 다녔던 모양이다."구관(전임 구청장)들을 비판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민선 구청장을 뽑은 지 17년이 되어 구관들이 많이 거쳐 갔다. 그런데 구관들이 필요한 곳을 다니지 않고 주로 표가 되는 곳 위주로 다닌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제가 관내 경로당 108개를 다 방문해 160회 간담회를 했다. 그런데 '경로당 생긴 이후로 국회의원이나 구청장이 찾아오기는 처음'이라고 하는 곳이 많더라. 왜? 단체장과 정치인들이 가는 곳만 가기 때문이다.
경로당도 천차만별인데 행사가 열리는 곳은 대개 규모가 큰 곳이다. 그런 경로당에는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거기 가서 '오래오래 사시라'고 덕담하는 것이 어르신들께 얼마나 보탬이 될까? 그래서 나는 '표'가 아닌 '일'을 중심으로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경로당 간담회 해보니 건의사항만 200개가 되는데 다 처리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우리 관악구에 초등학교 22개, 중학교 16개, 고등학교 17개가 있는데 다 방문해 학부모들과 100번 넘게 간담회를 했다. 학교도 역시 구청장이 온 것은 처음이란 곳이 한둘이 아닌데 그런 곳일수록 대개 열악했다. 왜? 정치인들은 주로 대로변에 있는 큰 학교를 가기 때문이다. 그런 데서 행사가 많으니까 그렇다."
- 취임사에서 "낮은 곳에서 시작하고 그늘진 곳을 살피는 행정을 펼치겠다"고 했던데 그 일환인가?"민간 복지시설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하다. 구청장이나 국회의원들도 그렇지만, 중앙당 대표도 대통령도 큰 곳만 다니다 보니 맨날 가는 데만 간다. 저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한 방과후교실 공부방에 가보니 주위에서 '이런 데는 표가 안 된다'고 하더라. 표만 의식하면 가기 어렵지만 우리가 보살펴야 하는 곳이다.
그 대신 저는 주민들이 포장마차에서 부르면 안 간다. 표를 좇지 않고, 발로 뛰는 구정으로 일로써 평가받겠다고 했다. 이제는 주민들도 '목요 동장'을 인정해준다. 과거에도 '1일 동장' 프로그램은 많았다. 어깨띠 두르고, 주민등록초본 떼어주고, 30분 만에 사진 찍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관내에 언덕이 많아 하루 종일 등산화 신고 돌아다닌다. 몸은 피곤하지만 보람이 많다."
"그동안 단체장들이 주민들의 즉자적인 요구에 부응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 일보다 구민들이 꿈을 꾸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구름 잡는 얘기할 수 있지만, 취임사에서 강조한 것처럼, 자라나는 세대에게 창의력을 길러주고 꿈을 키워주는 '감성행정'을 펼치고 싶다. 그래서 관악산에 시(詩) 도서관을 만들고, 화장실에 시집을 비치하고, 구청 현관에 시가 흐르는 유리벽을 붙였는데 주민들 반응이 좋다."
유종필 구청장은 "도서관 사업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에 꿈을 주고 싶다"면서 시(詩) 전문도서관과 '화장실 도서관'을 만든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는 지난해 구민의 날 행사에 구민이 1천 명 가까이 모였는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도종환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낭송했다. 지역 유지들과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많은 자리였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가 시 전문도서관을 만든 배경이다.
내친김에 화장실에서도 시를 읽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신대방역 화장실을 리모델링해 '시와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 간판을 붙여서 FM음악을 틀어 놓고, 시집을 비치했더니 하루 만에 시집이 다 없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쇠줄로 묶어서 비치하는데 그것마저 뜯어가는 시민들이 있을 만큼 절절한 한국인의 시 사랑을 절감하고 있단다.
- 기초단체장으로 당신만의 행동강령은 무엇인가?"구청장 하면서 세 가지 행동강령을 세웠다. 첫 번째는 진정성이다. 표를 의식하면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도 진정성을 갖고 만난다. 아무리 바빠도 통장 위촉장을 줄 때 30분 대화한다. 공익근무자들이 신고하고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이 한 달간 근무하고 가도 10분 이상 대화한다. 두 번째는 현장성이다. '우문현답', 즉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국·과장과 동장들에게도 늘 현장을 강조한다. 세 번째는 지속성이다. 적어도 1년 이상 4년을 할 수 있을 일을 하자는 것이다. 예전에 자전거 출퇴근한다는 단체장과 정치인 많았다. 그런데 지금도 자전거 출퇴근 하나? 불가능하다. 일과성 이벤트는 안한다. 아직은 이 세 가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2년 해보니 서울 구청장이 주민들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농촌 시장군수들은 좋은 아이디어로 열심히 뛰면 중앙정부 예산을 몇백억씩 끌어오고 산업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청장이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다. 주변에서는 국회로 오라고 덕담을 하지만, 저는 관악구민들 삶의 질을 높여서 구청장 재선하고 싶다. 물론 영원히 국회의원 안 한다고 할 순 없지만."
그는 정치인 출신답게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벌써 쐐기를 박듯, 구청장 재선 의지를 강하게 밝히면서도 마지막에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종필은 누구?]전남 함평 출신으로 광주 제일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오랜 시간 위대한 사상과 진리에 취해 책을 탐닉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기자'라는 직함으로 온갖 데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한동안은 청계천 헌책방을 누비며 잡지 창간호를 수집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때 책을 탐독하며 쌓은 '내공'으로 정당에 들어와선 '명대변인'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책과 도서관은 그의 운명이었다. 사서였던 그의 아내를 만나게 해준 곳도 도서관이고, 정치에 입문해 삐딱선(?)을 타는 바람에 국회의원과 단체장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그에게 최고의 직장(국회 도서관장)을 제공한 곳도 도서관이다. 저서로 <세계도서관기행>(웅진지식하우스) 등이 있다.
"정치는 '입'으로 하는데 행정은 실사구시다"- 때가 때이니만큼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행정을 해보니 정치와 행정의 큰 차이가 뭐라는 생각이 드는가?"정치는 입으로 하는데 행정은 성과를 말을 해줘야 한다. 중앙당 대변인만 5년 했고 대변인 아닐 때도 노무현 대통령 경선후보의 대변인 등 주로 '입'으로 했다. 그런데 행정은 실사구시다. 행정은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그게 가장 큰 차이다."
- 구의회와의 관계는 어떤가? 또 관악구는 국회의원이 2명인데 같은 당적의 의원이냐에 따라 구정에 영향을 크게 받나? "저는 당적을 초월해서 행정을 하기에 영향을 거의 안 받는다. 관악구의회에 4개 정당 의석이 있는데 초당적으로 도와준다. 오히려 새누리당 의원들이 (민주당보다) 더 잘 도와준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에서도 초당적으로 도와준다.
국회의원도 한 곳(관악갑)은 새누리당이고 한 곳(관악을)은 민주통합당인데 전혀 갈등이 없다. 서울시에서 다른 지역은 대부분 국회의원은 새누리당, 구청장은 민주당인 곳이 많다. 얼마 전에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다른 곳은 국회의원과 구청장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 좋다'고 하더라."
- 상당히 의외다."제가 처음부터 '동네 일'은 초당적으로 합시다, 그랬다. 처음에는 초당적 운영에 민주당의 불만도 있었는데 6개월쯤 지나니 인정해 주더라. 이번에 수상한 '다산목민대상'의 경우도, 주최 측이 실사를 나와서 의견을 청취했는데, 오히려 야당 의원들이 저에 대해 좋은 평을 해줘 좋은 점수를 받았다."
- 지방자치 선거 때만 되면 기초단체장과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구청장의 견해는 어떤가?"정당공천 배제도 일리가 있다. 말만 지방자치고 중앙정치에 예속돼 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출마 희망자를 줄 세우고, 구청 인사에 개입하는 폐단을 극복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정치고 대의정치 주인공은 정당이다. 정당이 문제가 있더라도, 브랜드 있는 회사가 상품을 생산해야 제조 책임도 지고 A/S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정당 공천이 배제되면 정당이 힘을 잃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정당 공천에 찬성하는 쪽이다."
- 서울시장이 오세훈에서 박원순으로 바뀐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무상급식은 다 아시는 것이고, 뉴타운 출구전략 마련이 큰 변화다. 그런데 우리와 철학을 공유하는 분이 시장이 되어 심리적으로는 좋은데,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직 없다.(웃음) 박 시장이 오세훈보다 구청의 자율성을 인정해주는 '워딩'을 많이 하더라. 그런 워딩이 예산(지원)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앞으로는 그럴 것으로 기대한다."
"내가 '오리지널 친노'... 노 대통령에게 마음의 빚 있다"
정치인 출신 구청장다운 '워딩'(어휘 선택)이다. 그는 '여의도'(국회)와는 담쌓고 24시간 '동네'(관악구)에서만 산다고 너스레를 떠는 한편으로, 최근 일본의 한 통신사 기자가 엉뚱하게 자신을 찾아와 구정이 아닌 4·11 총선 전망을 인터뷰해 갔다고 은근히 '자랑질'이다. 그래서, 구민주당, 본인 표현으로는 '정통민주당' 출신으로서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친노'가 최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을 지켜보는 소회가 궁금했다.
- 한때 '폐족'이었던 '친노' 세력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부활했고 이번 총선에서 만개할 조짐을 보인다. '친노의 부활'에 대한 소회는? "제가 금강캠프(노무현 대선후보 캠프가 있던 여의도 금강빌딩)에서 일한 '오리지널 친노'다. (웃음)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친노'들이 설친 측면이 있다. 금강캠프 시절에 노무현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넣어서 항의 안한 사람은 천정배뿐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이름을 넣었다고 항의하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도 나중에 노무현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출세하고 그랬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는 인기가 떨어져 본인 스스로 실패했다고 얘기했고, 열린우리당도 실패로 규정했다. 내세운 좋은 정책들도 뜻이 앞선 나머지 실천이 따라가지 못해 역량 부족을 시인했다. 그때는 저도 야당(구민주당) 대변인으로서 본의 아니게 노 대통령을 매섭게 공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그만 둔 순간, 공격은 끝난 것 아니냐.
노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는 좋은 뜻과 정책들이 실정으로 인해 빛이 바랬지만, 퇴임 후에는 국민들이 낙향한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를 좋아했다. 또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한국인의 정서 등이 영향을 미쳐 평가절하된 부분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정책도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이 겹치면서 '친노 부활'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왜 DJ(김대중)쪽 사람은 죽고 '친노'는 부활하느냐? DJ만 해도 탄압받는 어려운 시절에 정치를 해서 시킨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을 썼다. 동교동계가 노쇠하기도 했지만, 창의성 있는 사람을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동교동계가 고위직에 많았지만 DJ가 물러난 뒤에 경쟁력이 없어진 것이다. 반면에 친노는 노 대통령의 장점인 도전하는 용기와 창의성을 가졌다. 그것이 친노의 경쟁력이다."
- 과거 구민주당 시절에 쌓인 '친노 486'들과의 앙금은 풀었나?"사적인 만남도 없지만, 앙금을 가질 이유도, 현실적으로 부딪칠 이유도 없다. 실은 노 대통령 퇴임 이후에 봉하마을로 찾아뵈려고 했다. 섭섭한 점도 솔직히 이야기하고 재임 중 야당 대변인으로서 비판한 것도 사과해 풀려고 했다. 그러나 구걸하듯이 찾아가서 만나기는 싫었다. 굳이 채권채무 관계로 따지면 제가 채권자 아니냐? 노 대통령 시절에 내가 야당한 것은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내가 야당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냐? 솔직히 여당하고 싶지, 야당하고 싶은 정치인이 있느냐? 그런데 차일피일하다가 뵙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마음의 빚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