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 반쪽 몸으로 성한 몸인 것처럼 견뎌온 지난 세월이 비참하고 또 비참해 눈물이 난다. 지척에 서로의 반쪽을 두고서 왜, 무엇이 무서워 모질게 외면하며 살아왔던가. 북녘 동포를 등지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남과 북, 한민족이 서로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내 한다.
서울서부터 우리를 마중 나온 남편 친구와 보낸 북경에서의 하루도,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침울함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 역시 한숨으로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여행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접해봤으나 이토록 마음을 비통하게 한 여행은 난생처음이다. 서로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형제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에 가득했다. 남과 북, 우리는 같이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고통을 덜어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가슴을 가득 채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행서 돌아와 보낸 며칠. 이 시간은 마치 무의미한 영상필름을 보는 것처럼 스르르 지나갔다. 여전히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밥맛이 없다'며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금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집 안 청소를 했다. 침울함이 지배하는 내 마음도 깨끗이 청소하고 싶어서... 깨끗한 빈자리를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채울 생각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 가방을 먼저 정리하고, 빨랫감을 다 빨아 해치우고 나서야 잠이 오는 나였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몇 날 며칠을 방치해놨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여행 가방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갈 때와는 달리 헐렁해져 있는 가방 때문인지, 북한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내 호기심 보따리 때문인지 내 마음도 허전하다. 가방 속을 정리하자니,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수십 년을 방치해뒀던 민족애에 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더미와 같았던 내 마음은 이내 활활 타올랐다. 애잔한 미소가 뜨거운 입김이 돼 내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다. 내 마음속 '호기심'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사명감'이 차지했다.
북한 사람들의 미소에 친구들은 '충격'
전혀 연락도 닿지 않는 '무서운 나라'에 간 우리를 두고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게 돼 버린 가족·친구·친지 그리고 지인들이 우리 부부의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빗발치게 전화를 해댄다. 외국인 친구들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인 친구들은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우리도 북한 여행을 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듣겠다고 난리다.
우리는 여러 팀으로 그룹을 나눠 사람들을 초대해 그곳에서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마치 비밀리에 촬영된 첩보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마냥 흥분에 들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처음 느꼈던 심정을 이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됐다. 아마 자신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습과 실상들이 확연히 달라서 배신감도 실망도 클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이나 사진 속에서 그들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북한에 다녀오기 전에는 그랬으니까.
그러나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사람,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가족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순간들. 이런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그들은 북한을 '우리와 똑같은 한 세기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 나라',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또 다른 반쪽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민족'이라고 느끼며 충격을 받는 듯했다.
도깨비가 사는 북한? 정말 그럴까요
내가 자라던 시절의 반공 교육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도깨비 악당'들이었다. 그들은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연민도 인정도 웃음도 모르는, 그저 빨간 깃발 아래 총부리 겨누며 행진하는 무서운 로봇들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일 것만 같았던 '짐승'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학교 교과서에서 본 북한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이든 공장이든 어디서든지 무서운 인민군들이 총대를 메고 감시하며 서 있는 곳, 자식이 부모를 신고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꽁꽁 묶어 잡아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미술시간에 북한 사람들을 그릴 때면 나도 그들의 얼굴을 도깨비같이 그렸으며, 얼굴에는 어김없이 빨간 색깔을 덧칠했다.
예전 한국에서 받은 반공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은 세대인 내 친구들. 그들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었다.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 부부의 여행 사진을 접하는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오래 전 여성들로 구성된 북한 응원단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기자가 한 응원단원에게 다가가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기자가 "북한에서도 연예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응원단원은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시 나도 호기심을 품고 북한 여성의 대답을 기다리다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여성 응원단원이 왜 그 기자를 단박에 외면했는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시 기자는 비합리적인 반공 교육이 초래하는 부작용이나 역효과 또한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북한 여행사진을 보던 한 어르신이 한쪽에서 눈물을 닦으신다. 그분의 고향은 북녘땅. 그동안 꽉 닫아뒀던 '묵은지병'을 따듯 마음의 병뚜껑을 여니 슬픔과 그리움이 복받쳐 흐르셨나 보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민족의 비극이 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힘없고 무능한 내 자신이 너무 속상해서 나 역시 흔들어진 샴페인처럼 눈물을 쏟는다.
미국인 친구들은 미소 짓고 있는 북한사람들의 사진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 사람이 웃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본다'고 한다.
그렇다. 미국 언론에 비친 북한의 모습 또한 왜곡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패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걸어가는 시민들, 텅 빈 평양 거리, 인상 쓰고 있는 군인들, 호전적으로 비치는 군대의 행진...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북한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지만, 미국은 왜 북한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군산복합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위협이 되는 '대상'이 필요하며 북한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북한 국방비의 몇백 배에 달하는 돈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미국이 북한을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니...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된다.
한국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친구들도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사진을 보니 북한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다시 가자'... 다시 밟고 싶은 우리 땅슬라이드 쇼를 하는 동안 9명의 한국 친구들(모두 미국시민권자)과 7명의 미국 친구들이 '북한 여행을 함께 다시 하자'며 간절히 청했다. 나 또한 지난번 여행 때 북한의 동포들과 나눴던 따뜻한 인간적인 교분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갈 날을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기념관의 여성군관 해설원이 추천한 '민족의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백두산을, 남의 나라인 중국 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을 밟고 가 보리라'는 깊은 바람도 마음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여행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다시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 중순부터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두 번째의 북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논의와 조정 끝에 어렵사리 2012년 5월 8일부터 5월 19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이 잡혔다.
그러던 중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시간 특집으로 이 뉴스를 온종일 내보냈다.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가리키며 '진짜가 아닌 가식'이라는 등의 해설을 붙이며 장례식 장면도 보여줬다.
극소수이긴 하나 일부 미국 전문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북한 사람들의 통곡이 진심 어린 행동일 수 있다'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어떤 미국 방송에서는 정치학자들과의 좌담을 통해 마치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1월 10일께가 되니 9명의 한국 친구들 중 4명이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북한에 갈 수 없겠다며 두려운 심정을 전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이 열심히 여행계획을 짜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가 나오자 또 다른 3명의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7명의 미국 친구들은 모두 '계획에 변화는 없다'며 혹시 '우리 부부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 매일 우리를 떠보려 전화를 걸었다.
오히려 그들은 북한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호기심에 더 흥분이 된다'며 마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들떴다. 이들은 '왜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취소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이 미국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땅에서 지척에 철조망을 쳐 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언제든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나보다 힘센 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전전긍긍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한국인 부부 한 쌍과 미국인 친구 7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해 모두 11명이 됐다.
어느새 내 마음은 이산가족이 돼 평양에 두고 온 딸, 설경이와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리만룡 안내원,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그리고 스쳐 지나간 정겨운 북녘 동포들을 향해 날개치듯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