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다. 유신과 인혁당 관련자들 사법살인 등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나 홍사덕 전 의원이 행한 발언을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과 독선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한구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그게 그렇게 관심이 큰 것인가.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이한구 원내대표 9월 11일 오찬간담회"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유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 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 달러를 못 넘었을 것이다." - 홍사덕 전 의원, 8월 2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배만 부르게 해주면 어떤 일도 용납될 수 있다는 투다. 그리고 이제는 배가 불러서 5.16 쿠데타니, 유신이니, 인혁당이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떠든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런 논리라면 북한의 세습 체제와 역사상 온갖 독재와 파시즘을 어찌 비판할 수 있을까. 국민들 배만 부르게 하면 무슨 정치체제든 별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으니.
그러면서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면, 으레 과거에 매달려서 무얼 하자는 거냐고 묻는다.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의 노력을 그렇게 비판했고, 군부독재 시절의 가해자들이 그 시절의 피해자들에게 '과거는 모두 묻고 이제는 화해·대통합을 해야 한다'며 과거사 문제를 청산·극복하자는 주장을 분열과 증오, 한풀이로 보았다.
그런 생각이라면 일본에 대해서도 '과거사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묻어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박근혜의 생각과 주변 인사들의 '종박적' 자세박근혜 의원의 핵심 측근들 생각이 이 모양인 것은 그 중심에 있는 박근혜 의원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 자신이 이런 역사관과 인식의 수준을 그동안 일관되게 보여 왔기 때문이며, 그의 주변 인사들은 박정희 시대처럼 그렇게 박근혜 의원에 대해 추종적이기 때문이다. 친박(親朴)이 아니라 종박(從朴)이다.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조아리는 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수평시대의 인간관계가 아니라 왕조시대 군신 간의 알현처럼 보인다.
유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근혜 의원의 5.16 쿠데타와 유신, 인혁당 사법살인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떠한지 그의 발언을 한번 보자.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이라 말한 것은 1989년 5월에 이미 시작됐다. 1989년 5월 19일 밤, 그는 MBC TV의 '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 박정희를 말한다'에 출연해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며칠 뒤인 5월 24일 <동아일보> '독자의 편지' 난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편지가 실렸다. 이 편지를 쓴 이는 경북 안동에 사는 권인수씨였고, 독자 편지 내용을 보면 그는 박근혜씨와 대학 동창이다.
"5·16은 구국" 운운 어불성설박근혜씨 TV 발언에 분노지난 19일 밤 MBC TV 박근혜씨와의 대담을 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 나만이 아니라 많은 시청자들도 같은 뜻이었으리라.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있지만, 어쩌면 딸이 저렇게도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5·16이 구국이었다니 말이 되는가. 5·16은 군사쿠데타였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정치군인들이 합법적인 정부를 뒤엎고 만행을 부린 행위였음에도, 국민앞에 사죄는커녕,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었다니, 가난을 구제한 지도자라니, 하는 망언을 일삼는 박근혜씨의 언동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오만불손했다. 대학동창생으로 부끄럽게 여긴다."박근혜의 일관된 생각 "5·16은 구국의 결단"
박근혜 의원은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말을 그 뒤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도 박근혜 후보는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밝혔다.
올 7월 16일 새누리당 경선 때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에서도 표현은 조금 달랐으나 5·16에 대한 평가에는 변함이 없었다. "5·16은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8월 8일 청주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선주자 TV 토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5·16을 옹호했다. 비박(非朴) 주자들이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을 비판하자 "과거에 사시네요"라며 비꼬았다. 그리고 5·16 쿠데타가 헌법 질서를 유린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나라 전체가 공산화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5·16은 쿠데타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기존 생각을 고수했다.
9월 10일, 박근혜 의원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6 쿠데타, 유신체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밝혔다.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평가에 대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유신에 대해서도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말함으로써, 유신까지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완강한 자세를 보였다.
5·16과 유신에 대한 그의 일관된 완강한 태도는 딸로서 아버지 박정희를 절대 추종하면서 생긴 확신, 이로 인한 폐쇄적 독선, 거기에 우리 사회 수구기득권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은 오만, 여기에 역사와 사건 내용에 대한 무지까지 모두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인 치명적 무지와 독선이렇게 완강한 태도를 보인 그는 인혁당 사건에서 치명적인 무지와 독선을 보였다. 최근 방송 출연 등에서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 대표적인 사법살인인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발언에서 사건 자체뿐 아니라 사법체제에 대한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있고, 민청학련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몰아세운 '2차 인혁당 사건'이 있다. 박근혜 의원이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인혁당 1차 사건'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군부독재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사건은 1차 사건이 아닌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8명에 대해 대법원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가 사형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할 만큼 국제사회의 비판도 거셌다. 사형집행을 당한 8명은 혹독한 고문으로 신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그래서 사형집행 뒤 유족에게 시신이 바로 전달되지 않고 화장처리된 뒤 전해졌다.
유신 치하의 꼭두각시 사법부가 사형판결을 내렸던 인혁당 사건에 대해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는 유신정권 때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한마디로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조작 발표가 있은 뒤 2005년 12월, 법원은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했고, 2007년 1월 서울지방법원은 이미 형이 집행된 피고인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근혜 의원은 1975년 유신 때의 꼭두각시 법원에 의한 사형 판결과, 그것이 잘못되어 '무죄' 판결을 내린 2007년의 판결을 별개로 보고 있다. 앞의 판결이 잘못된 것이어서, 뒤의 재심에서 그것을 바로 잡았는데도, 별개의 판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법에 대한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로 2007년의 무죄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완강한 독선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박근혜의 근원적 한계, 아버지 박정희
박근혜 의원이 이처럼 인혁당 사건을 평가하자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은 울부짖으며 그들의 피맺힌 한과 고통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유족들은 "박근혜가 우리를 두 번 죽이고 있다"며 오열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새누리당은 12일 대변인 공식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선후보의 인혁당 평가 발언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새누리당 홍일표 대변인은 이날 국회 정론관 브리핑에서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서 "(박 후보의) 역사 관련 발언이 미흡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원외당협위원장 워크숍 참석 후 홍일표 대변인의 브리핑 소식을 접하고 "홍 대변인과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했다. 박근혜 의원의 뜻을 전달한 이상일 대변인은 "홍 대변인의 개인 견해인지는 몰라도 박 후보와 전혀 얘기가 안 된 상태에서 나온 브리핑"이라면서 "(박근혜) 후보는 전혀 모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이날 밤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의 생각은 과거 수사기관 등 국가 공권력에 피해를 입은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끝내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태 과정을 지켜보면, 박근혜 의원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인식에는 변화가 없음이 거듭 확인된다. 그러기에 그가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해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를 전한다는 말에도 진정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참혹한 사법살인 사건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냉혹한 태도를 취하는 박근혜 의원의 모습에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보인 그 단기와 결기, 독선과 오만이 고스란히 겹쳐진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그냥 속담이 아니다. 뼛속까지 유신과 박정희의 디엔에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박근혜의 문제는 결코 연좌제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본질의 문제인 것이다.
[참고] <한겨레> 9월 10일자 정연주 칼럼 '
종박의 추억 - 유신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