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 대부분 채무자예요. 중산층 빚은 탐욕 때문이고 저소득층 빚은 무능 때문이라고 서로 갈등하는데 다 똑같이 당한 거예요. 범인은 따로 있어요."
지난 13일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이란 채무자 단체가 탄생했다. 그동안 '빚쟁이(채권자)' 서슬에 눌려 살던 '빚쟁이'(채무자)들이 가혹한 빚 독촉을 멈춰달라며 반기를 든 것이다.
그 중심에는 '가계 재무 주치의' 제윤경(41) 에듀머니 대표가 있다. 제윤경 대표는 때마침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이헌욱 변호사와 함께 쓴 <약탈적 금융사회>(부키)란 책에서 금융회사들의 '묻지마 대출'과 비인간적인 채권추심 행태를 고발했다.
18일 오후 제 대표를 만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에듀머니 사무실은 일반 단독주택이었다. 마당은 푸른 잔디로 덮여있고 강아지가 낯선 손님을 맞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내 집 마련' 꿈에 등장할 법한 장면이지만 이런 환상 때문에 숱한 이들이 '하우스 푸어' 함정에서 빠지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연락이 오고 선물을 보내주는 분들이 계세요. 그때 집 팔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재테크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2006년부터 제 대표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상대로 이른바 '빚테크'의 환상을 버리고 감당할 수 없는 금융상품이나 부동산은 처분하라고 조언했다. 집값과 주가가 덩달아 뛰던 당시 과감히 집을 처분했거나 '내 집 마련'을 포기했던 이들로선 제 대표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상담자들이 그 말을 따른 건 아니었다. 금융회사뿐 아니라 언론, 정부까지 가세한 '빚테크'의 유혹은 그만큼 강력했다.
가계부채 1000조 원, 하우스 푸어 150만 시대. 제 대표가 채무자 권익 보호에 나선 건 이 모든 책임을 채무자들에게만 돌리고 탈출구 없이 가혹한 채무 독촉마저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계형 대출로 가정 파탄 위기에 몰린 채무자들을 이대로 방치하다간 금융회사 역시 온전할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다.
"대부업체들 채권추심으로 눈 돌려... 협박전화 받기도"- 채무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탓에 단체 결성이 쉽지 않았을 텐데."단체 활동을 돕겠다는 채무자들 전화는 많은데 생계가 힘들어 잘 나서지 못해요. 창피한 건 둘째고 시간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에요. 당장 먹을거리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죠. 지금까지 채무자 3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했고 도우미, 변호사들까지 합하면 80~90명인데 도우미들도 둘 중 하나는 채무자에요. 참여한 국회의원들 가운데도 사채를 쓰거나 주택담보대출 같은 빚이 있고요. 사실 신용카드도 엄밀히 빚이라고 보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채무자인 셈이죠(웃음)."
빚갚사 카페(cafe.daum.net/edufp) 게시판에는 지난주부터 채무자들의 절박한 사연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 실업 상태인 한 20대 여성은 10년 전 사망한 부친 빚 4천만 원을 갑자기 떠안게 돼 절망에 빠진 사연을 올렸다. 다행히 그동안 법이 바뀌어 채무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상속 포기(한정승인)가 가능하다는 전문가 답변을 얻었지만 이처럼 뒤늦게 채무 독촉을 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10년 전 얻은 카드 채 때문에 연락이 오기도 해요. 금융권에서 오랫동안 방치하다 부실채권이 돼 채권추심업체로 넘어가면서 뒤늦게 회수에 나선 거죠. 요즘 대부업체들도 장사가 안 되다보니 채권추심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어요. 채권추심법 개정을 서둘러야 해요." 우리나라도 과다 채무자들을 위한 개인 워크아웃, 파산, 회생 같은 신용회복제도를 두고 있지만 그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또 대상이 신용불량자로 한정되다보니 이런 제도를 이용하려면 최소 3개월에서 1년 넘게 채무 독촉을 견뎌내야 하는 한계도 있다. 제 대표가 불법 채권추심 문제를 지적하자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다.
"방송에 나가 채무 독촉 전화를 반복적으로 하는 건 불법이라고 했더니 며칠 전 협박 전화가 왔어요. '악덕 채무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우린 적법하게 한다'며 밤길 조심하라고 따지더라고요. 악덕 채권추심업자가 훨씬 더 많은데 말이죠."
"채무자 도덕적 해이? 빚이 자산이라고 꾈 때 언제고"사실 채무자 권익 운동에 가장 큰 어려움은 채무불이행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다. 빚을 졌으면 일단 갚아야지, 회피하는 건 잘못이란 논리다.
"주로 금융회사에서 퍼뜨리는 논리예요. 물론 사소한 도덕적 해이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준은 아니에요. 대부분 생계형 대출로 모든 걸 빼앗긴 선량한 채무자들이죠. 오히려 채무자들 상담하다보면 제가 답답할 정도에요. 파산이 빚을 안 갚는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라 재기해서 나중에 갚도록 돕는 방법인데 말이죠. 그분들이 재기 못해서 자살이나 범죄로 이어질 때 사회적 손실이 훨씬 더 커요. 도덕적 해이 잣대는 오히려 돈 빌려주는 쪽에 들이대야죠."-'약탈적 대출'이란 말이 아직 낯설다. 아무래도 아쉬운 건 돈을 빌리는 쪽인데, 돈을 잘 빌려줬다고 문제 삼을 수 있나. "친구가 못 갚을 거 뻔히 알고도 돈을 빌려주면서 돈 대신 친구가 가진 비싼 귀금속을 가져가려 한다면 선량한 행동일까요? 친구가 돈을 못 갚더라도 과감히 포기하는 게 선량한 거죠. 금융회사도 상환 능력을 잘 보고 빌려줘야지 다른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그건 약탈이죠. 부동산 같은 현물 가치를 평가 절하해 빼앗거나 대부업 등으로 갚을 수 있다는 전제로 빌려주는 것도 그래요. 빌린 사람도 책임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충동적일 수밖에 없어요. 금융회사도 집값 오르니까 돈 빌려서 사라, 적당한 빚은 자산이라고 꾀었고요."
지금까지 금융회사는 기업 대출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반면 주택담보대출 같은 가계대출에는 경쟁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최근 집값이 떨어지자 대출원금 일부 회수에 나서는 등 '비올 때 우산 걷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투명하지 못한 개인신용등급제도와 대출 가산 금리를 통한 채무자 차별 행태도 문제가 되고 있다.
"개인신용정보를 왜 채권자가 독점하죠? 신용등급은 공적 정보인데도 채권자 자의로 무원칙으로 운영돼 왔어요. 정부에서 관리하고 책정 원칙도 공개해 내 신용 수준이면 얼마나 빌릴 수 있는지 알게 해줘야 해요. 작은 돈이라도 성실히 갚은 사람에게 높은 등급을 줘야지 돈 많이 빌린다고 높아선 안돼요. 독립적인 금융소비자보호기구를 설치해서 거기서 관리하게 해야 해요."미국은 비영리기구인 전미신용상담협회(NFCC)를 통해 합리적인 채무조정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연체 전이라도 채무 상환 방식을 조절할 수 있고 부채 상환을 늦춰주거나 원금 일부를 탕감해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금융권에서 만든 신용회복위원회가 있지만 '채권자 단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개인 파산이나 회생 조건은 너무 까다로워요. 채무조정을 돕는 사적 조정 기구도 활발해져야 해요. NFCC는 NGO 단체가 주도해 채무자 우호적인 채무 조정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채권자 단체가 만들다보니 채권자를 대변해요. '잔인한 워크아웃'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거죠. 금융회사도 엉터리 장사하면 망한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채무 조정 6개월 만에 원금을 탕감해주기도 하는 외국처럼 과감한 파산 제도가 필요해요. 개인 파산이 늘면 금융권에서 더 신중하게 대출해 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파산 제도는 완벽한 시장 제도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시장주의자들이 반대하고 있죠.""하우스 푸어 문제, 집값 올라도 해소 안 돼"평소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출을 끼고 '내 집'을 장만한 '하우스 푸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집값이 떨어져 대출을 갚기 어려운 집을 대신 사서 집주인에게 월세를 주는 '세일 앤 리스 백' 방식까지 등장했다.
"대상이 700가구라고 하는데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죠. 나중에 집주인이 되살 수 있다고 하지만 푸어 해법을 가로막는 꼼수죠. 국가가 사서 공공임대로 바꾸면 되는데 왜 은행을 끼고 하죠? 은행도 (대출금액 일부를 탕감하는 방식으로) 일부 책임을 져야 해요.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면 더 큰 손해를 보니까 조금은 손해 보라는 거죠. 이참에 공공주택도 많이 확보하고 주거약자 보호대책도 될 수 있고요."하지만 여전히 집값이 다시 오를 거란 기대를 버리지 못한 '하우스 푸어'들에겐 일침을 가했다.
"하우스 푸어 문제는 집값 올라도 해결 안돼요. 집값이 올라도 어차피 못 팔아요. 더 오를 거란 생각에 취하게 되니까. 결국 손해 봐야 손을 털 수 있어요. 집값이 오르면 모두에게 손실이에요. 집값 올릴 생각 말고 사회적 대타협 방안을 찾아야 해요."
"소액 펀드라도 추천한 건 잘못"... '착한 재무 주치의'의 '반성'9살, 16살 두 아이를 둔 제윤경 대표에겐 한동안 '덕성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란 이력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학생운동 때문에 출석을 못 채워 결국 제적당했고 졸업장도 최근에야 받았다. 덕분에 취업이 어려워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다 2003년 재무 상담과 금융 상품 판매를 병행하는 재무 설계 일에 뛰어든 게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 방송을 통해 금융소비자주권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나름 '합리적인 재테크'를 강조했지만 금융 상품 판매 유혹을 완전히 떨칠 순 없었다. 제 대표 역시 최근 5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아버지의 가계부> 개정판을 내면서 "당시 펀드 투자의 위험을 간과했다"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다.
제 대표는 지난 5년 이런 '반성'을 몸으로 실천했다. 2007년 사회적 기업인 에듀머니를 만든 뒤에는 기존 재무설계사 대안으로 '착한 재무 주치의' 교육을 진행해 왔고 올해 들어서는 사단법인 희망살림에 이어 '빚갚사'를 출범시키는 등 '돈 안 되는' 공익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경험 탓일까. 이날 제 대표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약탈적 금융사회'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소액도 권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소액도 맛보면 커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