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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으로 향하는 차창 밖은 온통 뿌연 무채색이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전날 새벽까지 읽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나를 '천국'의 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은 나에게 낯설었다. 한센병 환자를 본 적도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버스에 몸을 실은 나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현장을 보고 싶었다. 작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소설이 나온 때가 70년대였으니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의 모습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의 모습 ⓒ 안형준

작가 이청준은 "실제 섬과 소설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록도를 방문하면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죽은 자들의 공간'이다. 몸의 상처와 모멸감의 상처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에 조백헌 원장이 부임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한센인을 위한 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왜 '삶의 희망'을 포기했나

 
“면회 행사는 곧 시작되었다. 철조망을 기준으로 병사 지대 쪽 어른들이 먼저 2미터의 거리를 물러섰다. 군데군데 감시 직원이 배치되고, 이쪽 아이들 역시 철조망을 기준해서 2미터 거리를 표시한 직선위에 일정하게 발을 머물며 섰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 중
“면회 행사는 곧 시작되었다. 철조망을 기준으로 병사 지대 쪽 어른들이 먼저 2미터의 거리를 물러섰다. 군데군데 감시 직원이 배치되고, 이쪽 아이들 역시 철조망을 기준해서 2미터 거리를 표시한 직선위에 일정하게 발을 머물며 섰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 중 ⓒ 안형준
하지만 그것은 조 원장이 생각한 '천국'이지 한센인의 천국은 아니었다. 각자 다른 운명을 타고나 살아온 까닭에 섬 주민과 조백헌 원장의 융합은 불가능했다. 소록도 주민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려는 조백헌 원장과 그를 믿지 못하는 한센인의 관계는 오마도 간척사업의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소설은 일반인 여성과 과거 병을 앓았던 남성의 결혼으로 마무리된다.

고흥터미널에 내려 녹동행 버스를 기다렸다. 남쪽이라 그런지 뺨을 스치는 바람이 매섭진 않았다. 남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녹동항. 밖에서 섬을 바라보면 작은 사슴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 '소록도'.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소설 속 한센인들은 인간적인 소망과 자기 생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한다. 외부인이 만들어가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노역과 폭압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600m 남짓 되는 거리를 나무판자를 의지해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 과거에는 소록도에 가기 위해 배를 이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소록대교가 생겨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소록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에 '국립소록도병원'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보인다.

소록도병원에 들어서서 주차장을 거쳐 맨 처음 만나는 곳이 '수탄장'이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나무와 바다 풍경이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림 같은 풍경과 달리 이 길은 과거 '탄식의 장소'라 불렸다. 70년대까지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인과 감염인의 접촉을 막는 철조망을 설치했다. 병사지대에 거주하는 환자 부모들과 관사지대에 거주하는 자녀가 철조망을 두고 먼발치에서 서로 바라보며 안부를 전하는 게 고작이었다. 소설 속 상봉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망자의 사인을 알기 위해 사용됐던 시신 해부대
망자의 사인을 알기 위해 사용됐던 시신 해부대 ⓒ 안형준
세 번 죽어야 평안을 찾았던 한센인들의 슬픔

수탄장 옆으로 늘어선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환자들이 생활하는 병원건물이 보인다. 병원은 외부인 출입을 제한해 들어가지는 못한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병원 뒷길을 빠져나오면 오래된 빨간 벽돌건물이 보인다. 색 바랜 창틀과 이곳저곳 패인 벽돌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은 환자들의 해부실과 영안실로 사용됐다.

과거에 환자들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사망시 원인을 알기 위해 해부됐다. 이런 까닭에 환자들은 "세 번 죽는다"라는 말이 생겼다. 한센인들은 발병, 시신 해부, 장례 후 화장으로 세 번의 죽음을 거치고 나서야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해부실 옆방에서 특이한 도구를 볼 수 있다. 소설 속 자주 등장하는 '단종대'이다. 출산을 통한 한센병 전염을 막기 위해 남성의 정관을 제거하는 단종수술을 하던 곳이다. 수술의 정확한 목적은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 청년을 길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방 한구석 벽에 붙어있는 실제 단종수술을 받은 환자의 시 한 편은 방문객의 탄식을 자아낸다.

소록도병원은 원장의 자의적 판단으로 환자의 자유를 억압하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 해부실 건물 옆에 자리잡은 감금실이 그것이다.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수많은 한센인이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감금실 건물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H형태 건물구조다. 수감자의 감시와 통제가 쉽도록 만들어진 건물은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내 국부에 닿을 때/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오늘도 통곡한다. -이 동 -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내 국부에 닿을 때/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오늘도 통곡한다. -이 동 - ⓒ 안형준

감금실을 나오면 소록도 자료관이 보인다. 이곳은 소록도병원의 과거 사진과 환자들의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한센병에 대한 설명이다. 과거에는 천병, 즉 하늘이 내린 병이라 생각해 한센인들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한센인들은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욱 깊었다고 한다. 한센병은 현재 의료기술 발달로 약물치료를 통해 5년~20년이면 완치할 수 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 역시 전염이 문제되지 않는 후유증 재활치료 환자가 대부분이다.

 감금실 내부의 모습.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감금실 내부의 모습.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안형준

소록도병원에서 일반인에게 개방된 마지막 장소는 중앙공원이다. 중앙공원은 1941년 4대 수호원장이 환자 6만여 명을 강제동원해 세웠다. 이곳은 병원의 중요행사가 있을 때 소록도 주민이 모이던 장소다. 또한, 4대 수호원장의 동상이 세워진 곳이며 그가 살해된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과 대만에서 가져온 관상수는 어디 남국의 섬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중앙공원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구라탑 위에는 미카엘 천사가 한센균을 짓밟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탑 아래에는 사방으로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센병 완치에 대한 환자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소설 내용이 불필요한 사회가 되길 바랐던 이청준

중앙병원을 끝으로 국립소록도병원 일정은 끝난다. 하지만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한센인의 피와 땀이 서린 '오마간척지'이다. 1962년 오마간척지조성사업은 조창원 병원장이 시작했다. 한센인에게 농사지을 땅을 만들어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주민의 정착반대에 부딪혀 64년 6월 56.7% 공정 상태에서 전라남도로 이관됐다. 88년 고흥군에서 매립사업을 마무리하며 경지 714.5ha가 생겼다. 결국, 한센인의 꿈은 좌절됐고 그 자리에는 그들을 기리는 추모공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추모공원에 새겨진 물망초의 꽃말을 보면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잊지 말아요."

작가 이청준은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은 당시 우리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우의성에 근거한 말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당신들의 천국'이 언젠가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며 제목의 사시적 표현이나 책의 존재가 무용지물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작가 이청준의 소망과 달리 36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 화가 김주영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미비된 장애인보호법 등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당신들의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추모공원 동상이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다이지만, 언젠가 푸른 논으로 변해 우리도 농사짓고 살 수 있겠지”
추모공원 동상이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다이지만, 언젠가 푸른 논으로 변해 우리도 농사짓고 살 수 있겠지” ⓒ 안형준



#소록도#한센병#나병#당신들의 천국#국립한센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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