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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제일 무난하고 '카메라 발' 잘 받는다는 감색 정장을 입었다. 동대문과 명동에서 이틀 꼬박을 발품 팔아 마련한 옷이었다. 나는 키가 160cm 조금 못 미치는 탓에 평소 잘 신지도 않는 10cm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힐을 신고 서 있을 땐 몰랐지만, 걸을 때마다 발바닥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발가락이 모인 발바닥 앞쪽이 꽉 조여 왔다. 불편한 발을 이끌고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미용실에 갔다. 이렇게 공들여 나를 '치장'한 지난 9월 16일, 그날은 대체 어떤 날이었나.

 아나운서 면접을 보러가던 날, 평소 잘 신지도 않는 10cm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아나운서 면접을 보러가던 날, 평소 잘 신지도 않는 10cm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 조정숙

그날은 한 방송국 신입 아나운서 공개 채용 입사 전형일이었다. 내가 지원한 방송국은 올해 공개 채용에 '학력·연령 제한 없음'이라는 지원 자격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기에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다니고 있는 나도 응시가 가능했다.

이날 아나운서 공개 채용 지원자 한 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5초. 나는 그 15초를 위해 10만 원 상당의 메이크업을 받았다. 난생 처음 긴 속눈썹도 붙이고,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인다는 서클렌즈도 꼈다. 내가 보기에도 내가 아닌 것처럼 어색했지만, 마냥 어려 보이는 학생 이미지는 벗어난 듯해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집을 나섰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목동에 있는 그 방송국으로 향했다. 그 방송국의 신입 아나운서 공개 채용 지원자가 6000명 가까이 된다는 정보를 얻었던 터라 방송국이 있는 역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숫자를 체감할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텔레비전에 나올 것만 같은 아나운서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 지하철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빨간색·주황색·다홍색 등 붉은빛 계열의 정장을 입고 단정한 단발머리, 깔끔한 올림머리에 전문가의 손길을 빌린 메이크업을 한 지원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다들 연예인 같이 곱고 참 예뻤다. 다른 세계에 온 듯 낯설지만 신기하기도 한 이 광경이 나를 설레게 했다.

'여기가 진짜 아나운서 시험장이구나.'

대기실에 펼쳐지는 그들만의 '인맥'

 대기실 속 아나운서 지원자들의 모습.
대기실 속 아나운서 지원자들의 모습. ⓒ 박미선

나는 방송국에 도착해 아직 순서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에 들어갔다. 높은 구두를 벗고 '아.에.이.오.우'를 외치며 발성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안녕하십니까'를 몇 번이나 외치며 인사를 반복하는 이도 있었다. 대개 신문을 들고 뉴스를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지원자들 대다수가 서로서로 안면이 있는 듯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OO아카데미 다녔던 분이죠? 저도 거기 다녔었어요"라며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아카데미를 한 곳만 다니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닌다고 하던데…. 이는 스스로에게 가장 잘 맞는 학원을 찾기 위해서란다.

지난 학기에 현직 아나운서 분이 학교에 특강을 하러 왔는데, 그때 들었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요." 

정말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카데미 같은 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기실에서 왠지 모르게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불안함 반, 설렘 반으로 신문 기사를 몇 번 소리 내어 읽어보고 고개를 왼쪽 오른쪽 돌려가며 두리번두리번 사람 구경도 하면서 감탄도 몇 번 하고, 한숨을 몇 번 쉬고 나니 벌써 내 차례가 됐다.

시험장에는 10명의 지원자가 들어갔다. 지원자들은 심사위원 앞에 서서 차례대로 주어진 뉴스 원고를 읽는데, 나는 10명 중 세 번째였다. 원고를 읽기 전에 "안녕하십니까, 수험번호 몇 번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 여기저기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지원자가 걸어 들어와 수험번호와 이름을 말할 때, 이미 합격·불합격의 여부가 정해진다고 한다. 그만큼 첫인상이 중요한 시험인 것이다.

드디어 다가온 내 순서, 머릿속은 '하얘졌다'

10명 중 세 번째, 내 순서가 됐다. 앞서 두 명이 어떻게 읽었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 차례가 된 것. 나는 긴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아나운서가 눈앞에 있고, 나를 비추는 카메라가 보이고, 또 큰 스크린에 내 모습이 나오는 걸 보니 내 손에 쥐어진 원고가 뿌옇게 보였다. 상당히 진부한 표현일 수 있는 '머리가 하얘지다'라는 말은 이때의 상황과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앞을 보고 수험번호와 이름 말하기를 수없이 연습했건만…. 결국 나는 손에 쥔 원고를 보고 시선은 땅으로 떨어뜨린 채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아차!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내 순서는 끝난 뒤였다.

10초. 참 짧은 시간이었다. 순식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렇게 1차 시험은 끝났다. 20만 원 주고 산 감색 정장, 10만 원짜리 메이크업, 10cm의 하이힐…. 모두 나 때문에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시험을 준비하고 기다렸던 시간은 참 길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시험이 끝나고 방송국을 빠져나오는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에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1층 로비에 멍하니 서서 뻥 뚫린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빨간색·주황색·다홍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2층 대기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곤 생각했다.

'저 사람들 중 아직 시험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좋겠다. 다시 하고 싶다…. 아쉽다. 여기에 온 누군가는 진짜 아나운서가 되겠지….'

간절히 바랐던 내 오랜 꿈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간절한 꿈이었다. 나에게만 소중한 것인 줄 알았고 나 혼자만 간절히 바라는 줄만 알았다. 나와 똑같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아나운서 시험에 지원한 사람 중 '허수'가 많다고 한다. 재미삼아 한 번, 궁금해서 한 번 그냥 그렇게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날, 나는 허수였다. 그 누구에게도 긴장을 주지 못하는, 경쟁자가 아닌, 그냥 시험 보러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경쟁률만 높여주는 사람, 바로 허수였던 것이다.

대학을 서울로 오게 돼 부모님과 떨어져 산지도 벌써 3년째.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 집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시험을 잘 봤는지, 못 봤는지 너무나도 궁금해 하실 부모님께 뭐라도 얘기는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다.

지금은 '허수'지만 '진짜'가 되렵니다

"잘하고 왔지? 우리 딸?"

오늘 어땠는지 얘기하려고 걸었던 전화인데, 막상 이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많이 죄송했다. 시험 본다고 옷 사입으라고, 화장하라고 돈까지 보내주셨다. 가까이 있지 못해 챙겨주지도 못한다며 미안해하셨다.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해 전화하고 싶었는데 내가 부담스러울까봐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다. 내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엄마는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차마 울고 있다는 말은 못 하고 둘러댔다. 매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9월에 매미가 웬 말. 엄마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러고는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수고했어."

나는 아직 허수다. 수많은 아나운서 지망생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나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두 명을 뽑기 위해 수천 명이 몰리는 아나운서 시험에서 아직 나는 보이지 않는 감춰진 존재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목소리도 좋고, 발음도 정확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나는 허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진짜'다. 내 의지·내 간절함·내 꿈은 모두 '진짜'다. 새해엔 나의 진짜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더 이상 스스로 허수임을 인정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간절함을 따라 묵묵히 간다면 어느 순간 '진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나운서#SBS#언론고시#취업#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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