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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와 나 사이에 세상이 있었는지
세상과 나 사이에 네가 있었는지
너무 밝아서 나는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결코 너를 격하고 있는 세상에게 웃는 것은 아니리
너를 보고
너의 곁에 애처로울 만치 바싹 다가서서
내가 웃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너를 보고 짓는 짓궂은 웃음인 줄 알아라

음탕할 만치 잘 보이는 유리창
그러나 나는 너를 통하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려운 세상과 같이 배를 대고 있는
너의 대담성―
그래서 나는 구태여 너에게로 더 한걸음 바싹 다가서서
그리움도 잊어버리고 웃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밝은 빛만으로 너는 살아왔고
또 너는 살 것인데
투명의 대명사 같은 너의 몸을
지금 나는 은폐물 같이 생각하고
기대고 앉아서
안도의 탄식을 짓는다
유리창이여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1955)

이 시의 주인공은 '너'로 의인화한 '유리창'입니다. 이 '유리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 밝은 빛만으로"(4연 1, 2행) 살아 온 "투명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세상과 배를 대고 서"(1연 1행) 있지요. 그 '세상'은 화자에게 '두려운' 곳입니다. 화자가 그 "세상과 같이 배를 대고 있는 / 너의 대담성"(2연 4, 5행)이라며 '유리창'을 추어올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너에게로 더 한걸음 바싹 다가서서 그리움도 잊어버리고 웃"(3연 6, 7행)습니다. '유리창'을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은폐물같이 생각하고 / 기대고 앉아서 / 안도의 탄식을 짓"(4연 5~7행)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힘주어 묻습니다.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고 말이지요.

화자는 지금 '유리창'처럼 되고 싶습니다. 거대한 세상에 기죽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밝고 투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시의 처음과 마지막 행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가 반어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말 그대로 화자는 "세상과 배를 대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앞의 <거리>에서 세상을 향해 나온 수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영은 그 작품에서 어지러운 세상의 모든 것을 조그만 '물방울'에 담아 껴안으면서 지리멸렬한 현실을 타개하려고 했지요. 저는 그 모든 것이 세상에 당당히 맞서려는 수영의 몸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몸짓이 더 크고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에게 어떤 변화의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요.

수영이, 친구 이종구와 동거하던 아내 현경과 재회하여 새살림을 차린 곳은 성북동 산자락이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난 여섯 살짜리 아들 준이 있었지요. 그런 대로 소박한 가정의 꼴은 마련된 셈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은 고달팠습니다. 이 시기에 수영은 시를 쓰거나 부정기적으로 번역을 해서 잡지사와 '거래하는' 일 외에 생활의 특별한 방편이 없었습니다. 수영 부부에게, 성북동 북한산 자락의 산음(山陰) 속에서 "솔방울로 밥을 지어먹고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다 마"(<김수영 평전 236쪽)시는 '낭만'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거래'가 끊기면 생활이 금방 무너지는 위태로움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수영은 거대한 세상의 현실에 맞서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즈음 그가 술을 마실 때마다 광적으로 주사를 부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지요. 그래도 그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평북 개천의 훈련소에서 인민군 소년 병사의 모멸을 견뎌낸 것도, '악귀'보다 어둡고 무서웠던 탈주 과정을 이겨낸 것도 그런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수용소에 처음 들어왔을 땐, 악귀보다 더 어둡고 무서웠던, 무섭도록 춥고 굶주렸던 탈주 경로 때문에 처음엔 그곳이 안도의 보금자리였지. 아, 그러나 나는 온갖 것이 다 정지된, 포로수용소에서의 그 침체의 연속을 벗어나기 위해서, 내 손으로 매일 내 생니 하나씩을 흔들어 뽑았어. 그 답답한 시간을 나는 이를 빼는 아픔을 스스로에게 가함으로써 견딜 수 있었고, 또 견디어내야 했어. 나에게 이가 빠지는 아픔이 있다는 것은 바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었어.
나는 내 이를 빼면서 큰 힘을 얻었지. 그리고 나날이 한 개씩 없어지는 이빨을 보면서, 새롭게 내 정신을 가다듬고 내 시의 구심점이 사랑에 있다고 굳게 마음먹었지." ('가슴에 누운 풀잎, 그리고', <김수영의 연인>, 책읽는오두막, 168쪽)
 

이즈음 수영이 재결합한 아내 현경에게 들려준 전쟁 체험담입니다. 저는 스스로 생니에 충격을 가해 흔들리게 한 후 그것을 뽑아낼 때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 친 모습이 그려지는지요.

위 글에서 수영이 생니를 뽑아내는 고통 속에서 새 힘을 얻었다는 고백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특히 이빨을 하나씩 없애가는 고통의 시간이 정신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바뀌는 과정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사랑'에 다다릅니다. 시의 중심이자 시인으로서의 삶의 이유를 찾은 셈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지 않을까요. 세상과 타협하기와 세상에 맞서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수영은 스스로 생니를 뽑아내는 고통과 어두운 밀실에 자신을 유폐하는 절망을 뚫고 나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과 삶을 사랑한 수영의 30대 중반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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