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꽃게잡이 어부였다. 이른 봄 쭈꾸미 잡이와 대하(大蝦) 잡이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꽃게 그물을 장만했다. 꽃게 그물은 사각형의 그물코가 매우 커서 꽃게를 비롯해 큰 고기만 잡혔다.
아버지는 1톤 미만의 작은 배에 어머니와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다. 양력 5, 6월의 마량바다는 물 반 꽃게 반이었다. 꽃게는 많았지만 어획량을 높이려면 어부의 성실한 노력과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했다. 바다 속의 지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풍부한 경험, 물때에 따라 달라지는 해수의 흐름과 온도변화, 그물을 담가 두는 시간에 대한 판단력도 주요 변수였다.
아버지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뛰어난 어부는 아니었다. 우리 집의 어획량은 동네 아저씨들보다 낮았고, 잡어를 팔아 얻는 수입도 변변찮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성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어지간한 파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바다를 향해 나가는 당당한 아버지의 뒷모습.
여름은 꽃게잡이의 비수기였다. 산란이 끝난 꽃게는 빈껍데기뿐이었고, 제법 살이 찬 꽃게는 대부분 값싼 수게뿐이었다. 그렇다고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는 일. 먼 바다만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물 몇 폭(그물을 세는 단위)을 챙겨들고 여름방학이라며 빈둥대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겨우 열댓 살에 불과한 중학생이 배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비릿하고 눅눅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물에 앉아 있다가 그물을 놓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허둥지둥 그물을 던지는 일, 그리고 잡혀 올라오는 꽃게를 그물에서 분리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꽃게를 그물에서 분리하는 일을 우리는 '꽃게 딴다'라고 말했다. 꽃게 그물은 그물코가 컸지만 꽃게를 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떤 놈은 그물을 안고 발광을 해서 풀어내려면 어지간한 기술과 인내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잡은 꽃게는 보따리장수 아주머니들에게 넘기거나 때론 동백정해수욕장 백사장에 배를 대고서 피서객들에게 팔았다. 해수욕장에 배를 가져다 대면 피서객들은 신기한 듯 뱃전으로 몰려들었다. 꽃게는 비록 수게였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평소에는 판로가 없어 애를 태우던 아버지도 이때만큼은 큰소리치며 맘껏 값을 올려 불렀다.
하지만 피서철은 금세 지나갔다. 늦여름이 되면 산더미같이 잡아온 꽃게는 또 다시 판로가 없어 전전긍긍해야 했다. 매일 뱃전으로 달려오던 장사꾼 아주머니조차 없는 날은 어머니가 직접 이고 비인장, 서천장으로 팔러 갔다. 그때만 해도 하루 종일 뱃일을 한 뒤 또 다시 커다란 함지박에 꽃게를 이고 시장으로 달려가는 어머니의 고단함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팔다 남은 꽃게는 간장게장을 담거나 꽃게탕이 되어 밥상에 올랐다. 때때로 어머니가 만드셨던 무젓(양념게장)은 우리 집 별미였다. 금방 잡아 올린 물렁게(껍질을 금방 벗어서 말랑말랑한 꽃게)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물렁게회도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소식을 전하면 '무젓'을 담가 놓으신다. 고향 부근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큰누님도 종종 '간장게장'을 보내주신다. 그래서 나에게 간장게장과 무젓은 고향이고 어머니다. 폭풍우와 싸워가며 일곱 자식을 키워낸 아버지의 온기다.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사 공모' 응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