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살아오셨던 아버지의 나이를 제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느덧 제 막내가 중학교 3학년 16살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던 초등학교 시절의 아버지는 지금의 저보다도 훨씬 더 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 당시의 아버지를 만난다면 새까만 후배 보듯이 하겠지요.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에 아버님은 대략 40대 중반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 첫 기억의 아버지는 40대 초반이군요.
그날은 봄이 무르익은 5월이었을 겁니다. 저는 집 뒤뜰에 있는 향나무에 올라갔지요. 혹시나 저 멀리 신작로를 따라 아버지가 오시나 해서요. 아버지일 것으로 생각하고 달려갔는데 동네 아저씨였어요. 그냥 그렇게 오늘도 아버지가 오시지 않는가보다 했는데 마당으로 성큼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술과 도박에 빠져 방황하실 때 얼마나 미웠는지...보따리 하나와 하얀 얼굴,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뱅뱅 돌려주셨습니다. 6개월 만의 재회였지요. 소도둑 누명을 쓰고 6개월형을 받으셨는데, 정작 누명을 씌운 소도둑은 동네를 활보하고 다녔지요. 아버지 없이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는 소도둑에게 악에 받쳐 "이 소도둑놈아, 천벌을 받을 거야!"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소도둑은 지팡이로 어머니의 팔을 내리쳤습니다. 어머니는 깁스를 한 채로 농사일을 하고, 채소를 팔아 끼니를 해결했지요.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소도둑은 또다시 소를 훔쳐 팔려고 하다가 소 뒷발에 차여 병원 신세도 지고 죗값도 받았다고 했지요.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땅이 갚지 못하면 하늘이 갚아주는 것, 천벌은 존재한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 이후, 술과 도박에 빠져 10년 이상을 방황하셨습니다. 얼마나 미웠던지요. 제가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이력을 듣고 이해를 했습니다만, 탈출구가 그 방법밖에는 없었는지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저는 여쭙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셨던 여인에게 버림을 받고 식음을 전폐하고 술에 찌들어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30대 젊은 나이에 위장병이 도지고 위 절제 수술만도 몇 차례를 하셨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셨는데 여태껏 건강하게 살고 계시지요. 폐인처럼 살다 어머니를 만나 살림을 차리셨지만, 얼마 되지 않아 소도둑으로 몰리면서 울화병을 이겨보려고 도박과 술에 빠져 들어가셨지요. 그때는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야!" 그것이 제가 어렸을 적 마음에 담았던 것이었습니다.
좋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썰매를 만들어 주시고, 방패연도 만들어 언덕에서 함께 날리던 기억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패싸움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너 안 다쳤으니 되었다" 하시며 거금 50만 원을 합의금으로 선뜻 내주셨던 아버지. '계집앤 줄 알았더니 사내는 사내여!" 하고 웃으셨던 아버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제가 고2가 되었을 때 술과 담배를 모두 끊으시고 가정에 충실하셨지요. 그러나 그때는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기에는 늦어도 많이 늦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여태껏 어머니가 아버님에게 큰소리를 치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건강하셨을 때가 좋았습니다.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야 잘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세월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어머님도 아버님도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하셨습니다. 지난해부터 어머니가 깜빡하시는 것들이 많아지더니 요즘은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계시지요. 어머니 혼자서 그러시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는지 아버지도 동병상련, 마음만 같이 아프시지 몸도 함께 아프시지요.
이젠 노구의 몸, 자식들의 도움 없이는 거동하시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야 아버지께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이젠, 잘해 드려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기운이 남아 있으셨을 때 잘해 드려야 했는데, 이제야 철이 들었으니 철이 든 것이 아니겠지요.
아버지와 저는 평생 이념이 달랐습니다. 이 나라에서 그놈의 이념이라는 것은 가족관계까지도 갈라놓지요.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 이념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장점보다는 단점만 떠올렸고, 아픈 어린 시절만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저의 관계는 서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념도 혈육의 정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은 1987년 건국대에서 있었던 애학투(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 때 알았습니다. 어머니께 들은 말로 아버지는 제가 거기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고, 일주일째 연락이 끊기자 앓아누우셨다고 했습니다. 첫날은 "저 빨갱이들 다 잡아 처넣어야 해!" 하셨고, 사흘째부터 시름시름 앓아누우셨다 했습니다. 학생들이 잡혀가는 뉴스를 보시면서 "저러니까 학생들이 데모하지" 하셨다지요.
그리고 이후 형사들이 집에 들락거릴 때 아버지는 형사들에게 호통을 쳤다지요. 그렇게 아버지와 저는 한편이라 생각했는데, 선거철만 되면 갈라졌지요, 지난 대선에서도 아픈 몸으로 기어이 투표장에 가시어 저와는 다른 후보를 선택하셨지요.
이젠 그것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내도 저와 아버지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합니다. 친정아버지와 살갑게 정을 나누며 살아온 아내로서는 서로 무뚝뚝하게 바라보는 부자간의 모습이 낯설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서먹서먹한 관계를 풀기도 전에 아버지는 거동을 못하실 정도로 아프시다니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잘해 드려도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실 것 같은 지금에서야 철이 들면 뭐하겠습니까?
후회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무조건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자식이 아버지를 이해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아직 당신이 내 곁에 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제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요. 해방되던 해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나이 스물 때였군요.
아버지 없이 살아오신 세월, 그 얼마나 외로우셨나요? 저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이 땅에서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아버지 때문에 웃는 것만이 내 권리인 듯 살아왔습니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웃으셨던 날들이 더 많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남은 세월, 제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시집장가 가서 증손주를 안겨 드리면 웃으실까요? 그건 제가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닌 듯하니 제가 아버지께 효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삶을 좀 더 일찍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