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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주방 쪽에 있는 등이 자꾸 깜박거렸다.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등인데 하나는 깜박거리고 나머지 하나는 괜찮아 그럭저럭 버텼다. 그렇게 며칠을 견뎠지만, 주방이 어두워지자 음식 만들기도 싫어졌다. 남편에게 부탁했지만 도구가 없어서 못한다고 한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 '만물박사'였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냈다.

"아빠, 우리 집 주방 쪽 등이 자꾸 깜박거려. 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안전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박 서방은 그런 거 못 고치잖아. 아빠가 와서 좀 고쳐줘."

아버지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알았어. 너 언제 집에 있을 거야? 내일 갈까?"
"응. 내일 와도 돼. 그리고 발코니에 선반도 좀 만들면 좋겠어. 선반이 없으니 물건을 정리할 수가 없어."
"알았어. 내가 연장 가지고 갈 테니 일 끝나고 바로 와."

딸 바보 우리 아빠, 30대에 혼자가 됐다

 아버지 젊었을 적 당시 사진.
아버지 젊었을 적 당시 사진. ⓒ 문세경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딸바보라던데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3녀 1남 중 첫째 딸이다. 세상의 첫째들은 누구나 부모로부터 특별한 기대를 받고 크나 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내게만 "너는 꼭 커서 여판사가 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러나 현재 나는 판사가 아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조금은 사회에 눈을 돌릴 줄 아는 평범한 아줌마일 뿐이다.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28세에 결혼했다. 사실, 결혼식도 못했단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젊은 시절, 아버지는 유난히 똑똑해 가난한 시골 살림에도 대학교에 들어가셨다. 하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쌀독에 쌀 떨어지는 날이 훨씬 많았을 텐데 어떻게 졸업을 할 수 있으랴.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먹고살 일이 걱정이다. 아내가 할 줄 아는 건 밥 짓기와 빨래·육아가 전부. 하루하루 연명할 끼니 걱정을 하면서도 아이를 넷이나 낳았다. 물론 다 낳고 싶어서 낳은 건 아니다. 중간에 두어 번 중절 수술을 하라고 아내에게 수술비를 구해 주기도 했건만, 철없는 아내는 남편이 3대 독자라는 부담 때문에 아들 하나 더 낳겠다는 게 내리 딸 둘을 더 낳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네 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거기다 네 아이들 모두 얼마나 예뻐하며 키웠는지 툭하면 물고 빨면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해외에 나가 돈을 벌 결심을 한다. 한창 '중동붐'이 일던 때로 현대중공업이 인력을 파견하던 1970년대 후반이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넷을 떼어놓고 머나먼 타국 땅으로 돈을 벌러 갈 결심을 한 아버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타향길에 오른다. 아이들은 아내가 잘 키울 것이라 굳게 믿고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아내는 오로지 남편만 믿고 아이 넷을 홀로 키웠다. 한 달에 한 번씩 송금되는 급여로 생활을 이어가며 말이다. 가끔씩 정갈한 글씨로 편지를 보내오는 남편의 소식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아버지에게 편지 왔으니 답장이라도 보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큰딸이었던 나는 유독 아버지에게 정이 많아 아버지가 보내오는 편지에 꼬박꼬박 답장을 써서 보내곤 했다.

몇 년 동안 계속되는 해외 노동자 생활이 이어지면서 아버지는 어느새 현장 노동자가 아닌 중견 간부직으로 진급한다. 아마도 대졸 중퇴의 학력과 꼼꼼한 성격이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럭저럭 자리도 잡아가고 보고 싶은 아이들을 보러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즈음, 고국에서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만다.

남편이 몇 년씩 집을 비우고, 비록 올망졸망한 아이들 넷을 키우고 있지만 혼자 사는 젊은 여성에게 별 일이 없다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귀국한 아버지는 결국 해외에서 갖게 된 안정된 직장을 잃게 된다. 그리고 아내와 이혼 후 아이들 넷을 혼자 도맡아 키운다.  

아버지의 계란말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믿었던 아내를 원망할 틈도 없이 아버지는 그때부터 졸지에 홀아비 신세가 돼 아이 넷과 씨름하며 살아가기 바쁘다. 30대 후반에 이혼남이 돼 아이 넷을 키우며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버지는 홀어머니(내겐 할머니)에게 아이들의 육아 도움을 요청하며 '꾸역꾸역' 살아간다. 한창 커가는 아이들이라 먹는 것은 오죽하겠으며 넷이나 되다 보니 학비는 또 얼마나 들 것인가. 그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며 살아왔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큰소리 내신 적도 없고 속상하다고 술 마시고 술주정을 한 적도 없다.

그 당시만 해도 급식이 없어서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일이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큰딸인 나는 한 번도 일찍 일어나 스스로 도시락을 싼 적이 없다. 내 것도 안 싸는데 동생들 것을 싸는 것은 언감생심이기도 했고…. 아버지는 그 일을 도맡아 하셨다. 행여 김치 국물이라도 샐까봐 랩으로 꽁꽁 묶고 반찬 때문에 아이들 기죽을까봐 햄이며 계란말이를 넣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때 아버지가 만드신 계란말이는 얼마나 예쁜지 지금 생각해봐도 보통 남자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다. 고등학교 때는 종종 늦었다고 도시락을 깜박하고 등교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수위실에 도시락을 맡겨놓고 가기도 하셨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외출할 때 옷을 다려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다려주셨다.

올해로 아버지의 연세는 70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혼자 사신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 먹이고 입히느라 여성에게 눈 돌릴 틈이 없었을 테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모두 커서 자기 앞가림 다 하고 사는데도 혼자 살고 계신다.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멀쩡한 여자 하나 고생시키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지만 상식적으로 흔한 일이 아닌 것은 맞다.

나도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자를 보는 눈이 조금 생겼다. 주변에 많은 남자들을 봤지만 아버지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며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앉아서 밥상을 받는다. 술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버지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는 좋은 남자들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보고 그런다. "너는 너무나 좋은 아버지 밑에서 컸기 때문에 아직도 남자 보는 눈이 없다"고.

집안 곳곳에 남은 아버지의 흔적

퇴근하기 30분 전, 아버지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빠 지금 너네 집 앞에 왔어. 넌 언제 오니?"
"나 오늘 일이 있어서 좀 늦게 갈 거야. 비밀번호 알려 줄 테니 들어가서 일봐."
"알았어."

하필 이날따라 친구가 급히 부탁할 게 있다며 만나자고 한다. 늦게 돌아온 집, 오자마자 주방 불부터 켜보니 전등이 환하게 빛난다.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반듯하게 선반이 놓여있다. 못을 박지 못해 바닥에 뒹굴어 다니던 플라스틱 채반도 벽에 걸려있다. 남편 놔두고 아직도 아버지를 부려 먹기만 하지만 역시 아버지가 최고다.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출간 기념 기사 공모] 글입니다.



#아버지#딸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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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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