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기 시절 사진을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본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나왔던 감탄사. "아버지도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조금은 이질적이고 어색했지만 일련의 감동을 선사했다. 사진 속에는 여러 명의 일가 친척들이 있었지만 유독 아기(아버지)를 안고 계셨던 젊고 고운 여성분이 눈에 띄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셨다. 직접 뵌 적은 없으니 아무런 감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진 한 장은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10살 때 할머니를, 20살쯤에 할아버지를 여의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어릴 때 할머니를 여의고 증조할머니의 손에 키워졌다. 6·25 때 할아버지의 형제들을 잃은(할아버지만 살아남으셨다) 증조할머니는 늦둥이를 보셨고, 늦둥이(작은 할아버지)의 나이는 아버지 형제들과 비슷했다.
아버지는 형제들, 삼촌들과 같이 자랐다. 그래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는 달리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는 할머니 얘기가 없다. 할머니는 큰 고모를 통해 그나마 접하게 될 뿐이다. 대신 그 자리를 형제들, 삼촌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차지한다. 아버지도 현대사의 아픔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이다. 지금도 산으로 둘러싸여 여전히 개발이 덜 되어 있는 동네인데 40~50년 전에는 오죽했겠는가. 산을 넘어야 하기에 등하교에도 몇 시간이 걸린다고. 산으로 둘러싸여 소박하고 순진하고 조금은 움츠린 삶을 사는 강원도 사람이 때론 와일드하고 강건한 면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버지도 전형적인 강원도 사람이다.
아버지는 기억력이 참 좋으시다. 정확히 몇 년도에 뭘 했는지까지 기억하신다. 초등학교 때 반 60여 명 중에서 10등 안팎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이 말씀을 하실 때 나는 괜스레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이 미어진다. 지금은 별미이자 웰빙 음식이 된 꽁보리밥,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아버지에게 공부는 무엇이었을까. 증오의 대상이었을까. 잡지 못할 꿈이었을까.
아버지는 암기력도 참 좋으시다. 1968년 반포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안 빼놓고 다 외우셨다는 '국민교육헌장'을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외우고 계신다. 국영수는 몰라도 암기과목은 참 잘하셨을 텐데. 나의 암기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리라.
아버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1975~1980년의 어느 날 아버지는 서울로 상경하셨다. 먼저 상경한 큰 고모 댁에서 하숙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동차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일찍이 평생에 걸친 생존의 길을 터놓으신 것이다. 탁월한 식견이셨다. 아버지는 자동차 운전 35년의 경력으로, 지금도 매일같이 차를 운전하며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다.
한편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인 어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충청북도에서 서울로 상경하셨다. 구로공단에 취직해 열심히 일을 하셨고 동료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셨다. 그 동료는 바로 아버지의 막내 동생이자 나의 막내 고모이다.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 하는가. 그때가 82~83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막무가내이면서도 자상하셨다. 그런데 이게 다 철저한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얼마 전 큰외고모할머니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 결혼의 흥미진진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바야흐로 막내 고모의 소개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게 되어 결혼 결심을 하게 된 때이다.
아버지는 먼저 서울에 계신 큰외고모할머니께 좋은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결심하신 모양이다. 점수를 따기 위한 행동에 들어간다. 큰외고모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젊은 총각이 살살 어깨를 주물러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가진 건 쥐뿔도 없고 외려 차를 사야하니 돈을 내놓으라는데 그렇게 사람이 좋아 보일 수가 없더라. 우리 조카(어머니) 굶기진 않겠더라."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성격을 닮지 않은 게 안타깝다. 나는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다. 섬세하지만 예민하고 소심하고 두루뭉술한 성격.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가 되셨다. 15년여 동안 서울의 수많은 길을 달리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택시를 운전하셨다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그때이지만 가끔은 속으로 원망 섞인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자랑스럽고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가릴 수는 없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어느 날 뭔가를 잘못 드시고 배가 무척이나 아프셨다. 택시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루 종일 참고 참다가 일을 마치고 병원에 가보았다. 이게 웬걸. 식중독에 걸려서 배가 아픈 거였다는 의사의 말.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지만,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 아픔과 외로움, 고단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내가 조금이나마 덜어줬으면 좋겠는데.
꿈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택시 운전을 그만두고 아버지가 택한 길은 장사였다. 조그마한 동네 구멍가게. 이번엔 어머니와 함께였다. 새벽 6시 오픈과 밤 12시 클로즈를 도맡아 하셨고, 어머니와 교대하며 일 년 365일을 매일같이 18시간 일하셨다. 10여년을 하셨으니, 나의 초중고는 수많은 군것질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IMF 전까지는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너무나도 꽉 막히고 단조로운 생활에 지치고 병이 들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 인생의 전성기는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2000년대 초반, 집에 이어진 공간에서 하던 구멍가게를 접었다. 그리고 선택한 길은 역시나 장사였다. 나와 동생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을 하다 보니 어머니가 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같이 할 수 있는 건 장사였던 것이다. 구입했던 아파트 단지에 인접한 상가에 조그마한 신발 가게를 오픈했다. 대신 아파트는 팔 수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버지와 나, 동생 삼부자가 같이 시간 날 때 마다 가서 지켜보던 아파트 공사 현장이. 갈 때 마다 점점 올라가던 아파트를 보며 우리 가족의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곤 했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시곤 했다.
"곧 있으면 저기에서 살 게 될 거란다. 근사하지?"아버지의 평생 꿈이었을 텐데, 결국 그 꿈을 이루셨는데, 나와 동생의 미래를 위해 그 꿈을 접으셨다. 지금 아버지의 꿈은 나와 동생의 화창한 미래에 있다. 나의 꿈을 이룰 때 이왕이면 아버지의 꿈도 이루어질 수 있기를. 새삼스레 다짐해본다. 아버지는 지금 다시 운전대를 잡으셨다. 택시가 아닌 트럭 운전대를. 아버지의 새로운 전성기는 다시 시작되고 있다.
아버지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한 마디어렸을 적 아버지와 나, 동생 삼부자는 잘 어울렸다. 아버지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같이 목욕탕을 갔으며, 집에 와서는 티격태격하며 같이 누워서 TV를 보았다. 아버지에게 안겨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곁에만 있어도 포근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벽을 마주하고 누워계시면, 굳이 아버지와 벽 사이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아버지라는 믿음직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로움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지금도 그 포근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그려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고,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공간이 어색해졌다. 동생은 변함없었지만, 나만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많이 서운해 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불효자식이다.
아버지 친구들을 만나곤 하실 때 나에 대한 자랑을 하신단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가 아들하고 친구 같이 지낸다고 자랑하실 때는 말문이 딱 막히신단다. 나도 말문이 막히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진다. 내 진심은 이게 아닌데. 나도 아버지랑 도란도란 얘기하며 술도 한 잔하고 싶은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가끔 부모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당신들의 고생밖에 없었던 삶, 꿈을 잃어버린 삶,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고 계속되는 고난한 삶. 그 삶의 무게가 전해질 때 눈물샘이 반응하는가 보다.
나도 가장이 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럴 나이이고. 축 처진 것만 같아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헤쳐 오셨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본인 삶의 무게에, 자식의 삶을 1/3 이상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의 무게에, 쉴 새 없이 아버지를 짓눌렀을 허무의 무게를 어찌 이겨내셨는지.
내가 듣고 보고 느낀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니, 글의 시작과 끝에 느끼는 아버지의 상(像)이 완연히 다르다. 어렴풋했던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듯하다. 느끼지 못했던, 느끼려고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사랑이 강렬하다. 이 글을 아버지께 바치며, 말씀드리고 싶다.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출간 기념] 기사 응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