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에 있어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는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 지난 1년 동안 발의한 법안 4622건 중 295건만 가결됐다. 철회·폐기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3869건 중 상당수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 중에서 "제법이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생활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는 ‘제대로 된’ 법안들을 찾아내서 생생한 현장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
"선관위가 선거 현장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보고 있다. 전국 정치인을 무대 위에 올려두고 춤추게 해놓고 선관위는 구경이나 하겠다는 개정 의견이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6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난타당했다. 선관위가 국회에 제출한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 때문이다.
개정 의견은, 예비후보자 등록을 상시 허용하고 선거사무소 설치 및 후보자 본인이 어깨띠를 두르고 명함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말로 하는 선거운동과 직접 전화를 건 선거운동을 상시 허용했다. 공직선거법이 규정한 '선거운동 기간'에 매어 있던 예비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간 규정을 없앤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금지 됐던 언론사의 후보자 정책 점수 매기기를 허용하고, '토크콘서트' 류의 정책 토론회를 허용하는 방안도 담겼다.
선관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개정 의견을 이날 안행위에 보고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여야 할 것 없이 "그런 걸 다 허용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난색을 표했다. 과도한 제한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정치관계법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골자인 개정 의견은, 첫 걸음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여야 의원들 한 목소리 선관위 선거법 개정의견 비판 시작은 수월했다. 첫 질의에 나선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개정 의견은 이전보다 상당히 진전된 내용으로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며 "특히 인터넷 실명 확인제 폐지는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칭찬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15명의 여야 의원이 발언했지만, 긍정적 평가는 없었다.
가장 큰 질타를 받은 것은 '예비후보 등록 상시화' 안이다.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은 "지금부터 2016년까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예비후보 등록 후) 120일 동안 4시간 자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선거운동을 했다, 지옥의 나날이었다"며 "선거운동 기한을 무한정으로 하면 유권자의 짜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입에게 기회를 주고 유권자에게 알 권리를 주자는 것"이라는 개정 의견의 요지를 전달하면서도 "120일도 죽을 판이다, 예비 후보 등록을 선거 한 달 전에 하자, 그럼 충분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당 김기선 의원 역시 "선관위가 선거 현장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보고 있다, 기묘한 편법이 활개 칠 수 있다"며 "상시 선거운동을 가능하게 하면, 재력 있고 시간이 충분한 사람들만 선거에 나갈 수 있게 되어 전문가들이 선거 현장에 나오는 걸 더 막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영주 의원은 "전국 정치인을 무대 위에 올려두고 춤추게 해놓고 선관위는 구경하겠다는 개정 의견"이라며 "12달, 매일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 돈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유대운 민주당 의원도 나서 "365일 예비후보를 허용하면 개악"이라며 "의원이 국가 일을 돌보지 않고 예비 후보랑 (경쟁이) 붙어서 명함 돌리면 그 경비는 상상도 못할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질타가 쏟아지자 문 사무총장은 "예비후보자 등록을 상시화 해도 후보자 자신만 어깨띠를 두르고 명함을 돌릴 수 있는 것"이라며 "선거사무소를 열 수 있게 한 조항만 뺀다면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내가 원외 위원장이면 지금부터 띠 두르고 (2016년 총선까지) 다닐 것"이라는 황영철 새누리당 의원은 "이런 발언이 마치 (현역 의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주장처럼 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경쟁자 혹은 정치 신인들의 활동 기회를 줄여 '현역 프리미엄'을 유지하려는 거 아니냐는 시각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의원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프랑스·미국·독일·영국 등 대개의 나라에는 사전 선거운동에 대한 제한이 없거나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다. 다만 선거비용에 대한 규제를 명확히 하고 있을 뿐이다. "처음 통행금지를 해제할 때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기우 아니였냐, 예비후보자 상시 등록 허용도 마찬가지"라는 문 사무총장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정책 서열화? 지방 언론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하는데..."의원들은 언론 기관 등이 정당·후보자 정책을 서열화 할 수 있도록 한 방침에 대해서도 반대 뜻을 명확히 했다.
김민기 새누리당 의원은 "지방 언론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냐"며 "그 전제조건은 언론의 공정성 확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덕흠 새누리당 의원 역시 "공약의 순위를 매기게 되면 그것 때문에 (언론사에) 로비를 해야 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해찬 민주당 의원은 "유권자와 후보자 사이에 누군가가 개입되면 다 왜곡된다, 시민단체나 교수의 (평가가) 객관적으로 되냐"며 "지방 가보면 (언론사들이) 광고 달라고 얼마나 성가시게 하는지 아나, 광고 주면 (정책 평가 점수를) 높게 해주고 이러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같은 당 박남춘 의원은 "영향력 있는 언론 기관을 가지고 있고, 평가단으로 구성되는 시민단체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유리하다"며 "평가 자체가 자의적일 수 있다, 해당 조항에 대한 근본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권자와 후보자 간 '정책 토론회'를 허용 하는 안도 부정적인 여론이 높았다. '돈' 때문이었다. 백재현 의원은 "합법을 가장한 비용이 수반 된다, 아무리 좋은 정책 설명회를 해도 '뭔가' 작용해야 사람이 모인다"며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찬열 의원은 "옥내 토론회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옛날에 다 했다가 없어진 거다, 예전 사랑방 좌담회 아니냐"며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될 거고 배고프면 김밥을 먹을테고 김밥도 한 사람 당 네 줄씩 먹지 않겠냐, 그게 다 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선관위는 조항이 악용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유권자나 후보자에게 어떤 피해가 갈 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악용 될 소지가 있으니 각종 규제를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과도한 선거 규제를 풀어야 한다"던 민주당의 기조와는 상반된다.
안행위에서 '일시 정지' 된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 올해 안 처리 미지수선거기간 중에 국민운동단체 등의 회의나 모임을 금지했던 항목을 없애자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역시 '로비' 문제가 뒤따랐다. 백재현 민주당 의원은 "관변단체들은 대게 회의를 한 달에 한 번 하는데, 선거운동 기간은 불과 2주 아니냐"며 "회의를 허용하게 되면 음성적 비용을 수반하게 되거나, 후보자를 괴롭히는 모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사무총장은 "관변단체라 해도 선거기간에 회의조차 못하게 하는 건 과잉 규제라고 판단해 '선거운동 목적으로 한 회의'를 제외하고 허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 제기는 계속됐다. 박남춘 민주당 의원은 "국민운동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경비를 지원 받지 않나,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승우 새누리당 의원도 "관변단체의 압력이 얼마나 심한 줄 아나, (그렇게 되면) 돈이 든다"고 밝혔다.
이처럼 비판만 쇄도한 것이 머쓱했던 탓인지, 강기윤 의원은 회의 막판에 "여야 의원들 얘기를 보면 정치적 이해관계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변했다.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선관위와 '규제를 풀어서는 안 된다'는 의원들의, 양측의 뒤바뀐 입장차는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3시간 여의 회의 동안 결론은 나지 않았다. 김태환 안행위 위원장은 "한 번 더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갖자"고 했다. 국회 보고 후 정치쇄신특위나 안행위를 통해 법안으로 만들어지는 단계를 밟아야 하는 개정 의견은 안행위에서 '일시 정지'됐다.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가 없는 올해 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