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살 생각이 없다면 보지 않는 게 좋아요."
때는 2009년 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비대한 몸의 부동산 대리인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을 허투루 오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데다, 월세도 살고 있던 집에 비해 200달러 정도 쌌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과 샤워부스가 부엌에 있을 정도로 좁은 집이란 설명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때 살고 있던 집에서는 끊임없이 쥐가 출몰했다.
"보여주세요."대리인이 헐떡이며 다섯 층을 올라가 보여준 집은 10평 남짓했지만 쾌적했다. 소형세탁기, 전자레인지, TV를 빼면 이렇다할 것도 없는 이사짐을 옮기고, "트럭이 대문 안으로 못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짐꾼들에게 사정해서 운반비를 깎았다. 이제 드디어 '홈 스위트 홈'이 만들어지는가 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늦은 시간 집 앞 계단에 낯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는 한쪽 발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옆에 두고 있어, 흡사 노숙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계단식으로 된 아파트라 한 층에는 우리집 뿐인데, 그 남자는 가끔 우리집 윗쪽이나 아래쪽 계단에 앉아있곤 했다. 복도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그런가 싶어 관리실에 몇 번 전화를 했다가 램프 재고가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듣고 시청 주거환경개선과 핫라인까지 연락을 한 뒤 겨우 고쳐졌지만, 혼자 사는 처지에 그런 남자의 존재는 문 밖을 나설 때마다 두려움을 자아내었다. 그러던 어느날.
'쨍그랑!'사회주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나라와 이웃나라 핀란드까지 합세해 모두들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신다는 5월 1일 노동절 다음날이었다. 문 밖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와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니 어떤 시커먼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사람임에 분명했다.
아마도 한 달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계단에 앉아있던 남자. 그때도 그는 그는 내가 지나가자 "열쇠를 안 가져와서, 기다리고 있는데···"하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 삼켰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어떤 집에서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어느 날 저녁 마지막 층인 우리집 윗층 현관 앞에 있다가 이웃과 실랑이를 벌이고 쫓겨난 터라, 난 그 남자가 노숙자일 거라는 추측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하지? 구급차? 경찰서?'
결론은 쉽게 났다. 그가 건강한 상태는 아니겠지만 구급차가 온다면 만취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여기고 후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계속 내 문 앞에 깨진 병과 함께 죽치고 있다면? 나는 오랫만에 찾아온 쉬는날에 외출도 못하고 집안에서 떨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 경찰을 부르는 거야.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본 것은 처음이다. 대학교 때 처음 소개팅에 나갔다가 오락실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지구대에 찾아가 신고하려다가 면식범 소행이 아니냐고 신고 접수도 안되었던 기억이 있다. 여기 타국에서도 경찰은 골치아픈 거주등록 관련해서 신분증을 검사해 돈을 뜯거나 PC방에서 도난당한 스위스칼 겸용 메모리스틱을 찾아달라는 내 말에 "형법에 따르면 분실과 도난은 현저한 차이가 있으니 잘 생각해보고 네 여권이 학교에 있다는 게 더 미심쩍으니 신고할 생각 하지말고 집에 가라"고 하는 등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과연 전화 한통으로 올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무슨 사고가 나면 흔적이라도 남겨야지 싶어서 전화를 했다.
경찰은 30분 만에 왔다. 깨진 병과 함께 퍼진 남자는 반쯤 취기에 오른 목소리로 자기는 이웃집에 산다고 했고, 이 모든 과정을 초인종 유리로 지켜보던 나는 그의 거짓말에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갔다.
"내가 신고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 여기 안 산단 말이에요."
"전화 좀 써도 되겠습니까?"
경찰은 남자가 내민 거주지 증명서를 들고는 서에 전화를 해서 신분을 조회해보겠다고 했다.
"옆집에 등록된 게 맞네요."
옆집이라고는 하지만, 계단식으로 마주보고 있는 집이므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있는 집을 말한다.
그럴리가, 그곳이 세입자가 여러 명인 건 알았지만, 한 번도 들고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저 남자가 거기 산다고? 그럼 왜 윗집 계단에도 앉아있었단 말인가? 거주등록제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온 타지역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서류상으로만 아랫집에 사는 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여기 사시는 줄 몰랐어요." 다시 기세가 등등해진 남자는 애꿎은 경찰관들에게 화를 냈다.
"나는 이 나라 국민인데 말이야, 이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여자 때문에 나보고 이러는 게 말이 돼?"
'나는 여기서 근로하고 세금을 냅니다, 아저씨. 술이나 깨시지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경찰관들도 기가 찬 모양인지 대꾸가 없었다.
"그러면 아랫집 앞에 앉아 계시지 왜 우리집 앞에 계신 거예요. 경찰관 아저씨, 좀 옮겨 주세요. 무서워요."
경찰관들은 순순히 남자를 옮겼다. 다행히도 그 뒤로 남자가 우리 집 앞에 앉아 있는 일은 없었지만, 상대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란 그의 말은 러시아 서민들의 속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오래 기억에 남았다.
90년대 말에 시작된 사회개방과 외국인 자본의 유입, 급격한 시장경제화 과정에서 도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랄까. 더불어 아직도 마음 한 켠에는 그가 노숙자였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지만, 그의 차림새를 보고 내가 가진 편견에 대해 다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