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8일,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인권 박물관을 다녀왔다. 현재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권'을 주제로 내건 박물관이라 예전부터 궁금했던 곳이다. 가보니 소수민족(재일 조선인, 오키나와인, 아이누 등),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한 전시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었다.
평일인 화요일이었음에도 견학 온 학생들로 전시관은 붐볐다. 내게 있어 가장 관심 있었던 코너는 소수민족 관련 코너였다. 우리 동포인 재일 조선인들에 관한 전시물들도 있었고,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온 오키나와인, 아이누 등의 삶에 관한 내용도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물을 살피던 중, 오키나와 코너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보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일본 정부에 의한 피차별자였던 오키나와인들이 또 다른 피차별자인 재일 조선인들을 차별하고 무시했단 내용이었다. 전시 코너에서 보게 된 오키나와인들의 증언 영상에서, 그들은 과거에 오키나와인들이 조선인을 '죠시나'란 명칭으로 부르며 차별했단 이야기를 했다.
그 시점, 그러니까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오키나와인들은 전통적 생활습관을 야마토식(일본식)으로 바꾸는 운동을 진행했다고 한다. 즉, 일본인들처럼 '1등 국민'이 되겠단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도 심해진 것이다. 피차별자들의 또 다른 피차별자들에 대한 차별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보면서, 그러한 차별을 낳은 근본 원인에 대한 고민을 함과 동시에, 그와 너무나도 비슷했던 내 어린 시절의 뼈저리게 아픈 경험이 생각났다.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의 아픈 역사를 보며 한 친구가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나는 너무나 약했다. 지금도 결코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땐 지금보다도 훨씬 약했다. 소위 '괴롭힘'도 자주 당했다. 왕따는 아니었고, 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를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아이들도 매년 몇몇 있었다. 그때마다 그만 하라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맞기만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왜 그랬나 싶다. 그 말을 하는 것마저 힘들 정도로 억눌리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까.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1999년 5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전학생이 왔다고 했다. 앞에 서서 인사하는 전학생의 얼굴을 봤다. 전학생의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흐렸으며, 입은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여는데,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듯했다. 발음이 부정확했다. 나는 그가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들어간 다음에도 그를 좀 더 쳐다봤다. 그 때 내 머릿속엔 무의식중에 '아, 쟨 정신지체 장애인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그와 나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그 전학생 A는 그날부터 다음해 2월 종업식 때까지 나와 함께 같은 반에서 끝까지 생활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날 악랄하게 괴롭혔다. 가끔씩은 이유 없이(적어도 그때 내가 느끼기엔) 내 뒤통수를 때리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릎으로 내 눈 부분을 찍기도 했다. 물론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가끔 그런 식의 폭력을 가했다. 하지만 A에게 가장 많이 맞았던 게 나란 건 확실하다.
더 괴로웠던 건, A는 혼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속한 반의 '싸움 잘 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조직적으로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간간이 기존의 힘센 애들한테 시달리던 것도 힘들던 나는, A를 보면서 공포와 증오가 공존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A는 우리 반의 싸움 잘 하는 아이들이랑 항상 같이 어울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하고만 어울렸다. 지금 와서 보면, A는 그들과 더욱 어울리면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어하지 않았나 싶다. 그 또한 그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즐거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 반에서 가장 싸움을 잘 했던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 또한 '강자'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키나와인들이 '생활습관 일본화(化) 운동'을 벌임으로써 일본인들에게 인정받으려 한 것처럼 말이다.
A는 그들 외의 다른 애들과는, 가끔씩 때리고 화풀이하는 것 외엔 접촉을 거의 안 했다.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이전부터 그렇지 않았을까. 모두가 자신을 '장애인'이라, '바보'라 생각한다 여기고, 모든 주변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품은 듯했다.
나는 그를 증오했고, 그는 모두를 증오했다A에 대한 증오는, 그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풀었다. 그 당시의 나는, 장애인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니까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A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그런 면에 대해선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괴롭힘은 그런 생각을 버리게끔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던 어느 날, A가 그렇게도 의존하던 그 '싸움 잘 하는 친구들'이 A의 흉내를 내는 걸 봤다. 그의 부정확한 발음 및,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웠던 언어 구사력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게 너무나도 웃겼다. A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변 아이들 중에도 킥킥거리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제일 웃었던 건 나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A가 그렇게도 믿던 애들이 대놓고 A를 희화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걸 보면서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런 걸 가지고 웃으면서 A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 순간의 나는 A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할 따름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남들 흉내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A를 알게 되기 이전에도 그랬고, 고등학교 때도 가끔 친한 사람들 흉내를 내면서 남들을 즐겁게 해 줬고, 현재도 이따끔씩 성대모사를 한다. 하지만 이때만큼 내가 그 어떤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다닌 적도 없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의 그것을 말이다. 나는 그 성대모사의 '원조'인 '싸움 잘 하는 애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A의 흉내를 내고 다녔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 내에 적지 않은 애들이 A 흉내를 냈다. 그때마다 같이 있는 애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 또한 A 흉내를 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난 그 녀석을 때릴 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 녀석을 멍청이 취급이라도 안 하면 내 분이 안 풀린다"는 생각도 가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비겁했다. 그러고서 난 그것을 'A에 대한 복수'라 자부했다. 겨우 몇 년 전까지도 말이다. 정말 '비겁한 복수'였다. 조선인들을 향해 '죠시나'라 부르며 멸시한 오키나와인들보다도 훨씬 잔인했다.
내가 가장 자주 따라했던 A의 말은 "아, 죽여버려!"였다. 이 말은 실제로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당연히 그의 부정확한 발음 또한 따라하는 게 '포인트'였다. 갑자기 드는 의문이, 그는 왜 "죽여버려"란 말을 항상 입에 담았을까. 모든 것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모두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정신지체 장애인'이라 해서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것을 그때까지 항상 접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한 1년 약간 안 되는 기간 동안에도 그를 그런 식으로 무시한 사람들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물론 그 중엔 나도 포함이다. 심지어 A가 그렇게도 의지하던 '싸움 잘 하는 아이들'도, 그리고 교사들 중에도 그를 무시하는 이들은 있었다) 그 전엔 더하지 않았을까. 그런 현실을 접하면서 A의 입장에선 "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증오가 샘솟듯 솟아났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증오는 "죽여 버려" 등의 언어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의 표현... "아, 죽여버려!"
다시 A를 처음 본 날로 돌아가보자. 나는 그날 인사를 하고 자리로 온 A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앞서 말한 대로, 그때 내 머릿속엔 '아, 쟤는 정신지체 장애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던 중 A가 나를 봤다. A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면 그는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보고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쟤가 날 바보로 여기는구나'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날 수업이 끝나고, A는 화장실에서 나랑 마주치자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너… 나… 바… 바보?(야, 너 내가 바보처럼 보이냐?)" 난 결코 그런 생각 안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 자체가, 지금 와서 보면 '동물원 동물 구경하듯' 그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내게 그런 반응을 보인 걸 봤을 때, 이전에도 비슷한, 또는 그보다 더 노골적인 무시를 수도 없이 당해왔을 것이다. 나에 대한 그의 분노 표출은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후의 그의 폭력이 정당화될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를 처음 본 그날의 나는 그에게 명백히 잘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 A에 대해선 그런 식으로 노골적인 분노를 품었으면서 정작 A를 더욱 나쁜 길로 물들게 했던 '싸움 잘 하는 애들'에 대해선 왜 그 정도의 분노를 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A는 부정확한 발음이라는 약점이 있으니까 그걸 희화화시켜서 복수해야지'란 생각은 했으면서, 왜 그 애들에 대해선 그런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까.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진다.
아마 오키나와인들 중에도 "그때 우린 조선인들에겐 쉽게 해코지했으면서 정작 차별의 근본구조를 낳은 일본 정부에 대해선 아무 말도 왜 못했을까" 하는 반성이 많을 것이다. A에 대한 '희화화'를 공유했단 점에선 나도 그들과 공범이다. 이 대목에선 내가 '조선인을 차별한 오키나와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그리고 A도 모두 피해자였다. 그리고 모두 가해자였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오키나와인들의 양면성은 모두가 갖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가하면서 "난 저 녀석보단 우월해"란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지 않았을까. A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쳐도, 난 확실히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뒤에서 '희화화'하는 비겁한 행위보단, 내가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치고 받고 싸우는 게 백배는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그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않았고, '희화화'를 멈추지 않았다.
A는 중학교 3학년을 맞이하고 약 한 달 후부터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전학을 간 것이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를 훗날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그리고 그에게 사과받고 싶다. '가장 큰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두 사람의 만남,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혐오, 나의 차별' 기사공모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