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부터 방영될 MBC월화드라마 <기황후>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이 만만치 않다.
드라마 제작진이 기황후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묘사하겠다고 밝힌 것이 논란의 시작이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기황후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인물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설정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입지전적인 인물 기황후
기황후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에서 궁녀로 시작해서 황후까지 올랐으니 그렇게 평가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외국 여성이 백악관 인턴 직원에서 퍼스트레이디에 오른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씨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33년에 공녀가 돼 몽골에 갔다. 그곳에서 궁녀가 된 그는 빼어난 미모와 학식을 바탕으로 몽골 토곤테무르칸(중국식 명칭은 혜종 황제)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 때문에 황후의 혹독한 학대를 받기도 했다.
6년 뒤인 1339년, 기씨는 토곤테무르칸의 장남을 출산했다. 이 아이가 훗날 토곤테무르칸의 뒤를 이어 아유르시리다르칸(소종 황제)이 된다. 황자의 출산을 발판으로 1340년 제2황후가 된 기씨는 고려 출신 환관들의 도움에 힘입어 권력 실세가 되고, 1365년에는 제1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궁녀로 입궁한 지 26년 만에 황궁의 안방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몽골 황제의 혈통은 기황후의 핏줄로 채워졌다. 몽골제국이 중국 땅을 잃고 몽골초원으로 돌아간 뒤인 1370년부터 1402년까지의 몽골 황제들은 모두 기황후의 자손이었다. 32년 동안 등극한 다섯 명의 황제는 기황후의 아들에서 3세손까지였다.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에서 궁녀가 왕후가 된 사례는 장옥정(장희빈)뿐이다. 그런데 장옥정은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왕궁에서 출세한 데 비해, 기황후는 고려 사람으로서 몽골 황궁에서 출세했다. 이국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약점을 딛고 황후까지 되었으니, 장옥정보다 기황후가 훨씬 더 입지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
기황후가 고려에 지은 죄악 만약 기황후가 인생을 그렇게 마감했다면, 그에 대한 고려인들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외국에 나가 고려의 국위를 선양한 인물로 평가됐을지 모른다. <기황후> 제작진의 설명처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그를 묘사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기황후는 단순히 출세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조국인 고려에 죄악을 지었다. 그는 몽골제국의 위세를 빌려 고려를 압박하고 괴롭힌 기씨 집안의 몸통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다.
어떤 논문에서는 기황후가 몽골 황궁에서 음모를 꾸미고 세력확장을 도모한 행위까지 죄악으로 취급하지만, 모든 정치행위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어떤 것이 음모이고 어떤 것이 기획인지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기황후의 행적 중에서 확실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기씨 집안의 몸통이 되어 동족인 고려를 괴롭힌 부분이다. 일종의 민족반역행위라 할 수 있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기황후는 기씨 집안을 조종해서 '정동행성'에 관여했다. 정동행성은 처음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 기구로 출범했지만, 나중에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는 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물론 전적으로 고려에 간섭하기 위한 기구는 아니었지만, 이 기구가 그런 성격을 띠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와 비견될 만한 '고려총독부'라 할 수 있다.
기황후의 후원을 받아 정동행성의 수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둘째 오빠인 기철이었다.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서도 고위직에 오른 기철은 충혜왕이 축출된 1332년 이후와 충목왕이 사망한 1348년 이후에 정동행성 수장의 직무를 대행했다.
기철은 고려총독부의 성격이 있는 기관에서 수장 역할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이 정도면 명확한 친몽골파요 민족반역자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그를 죽인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기철이 그런 길을 걸은 것은 기황후의 전폭적 후원 덕분이었다.
기황후, 사극의 낭만적 주인공으로 제격일까
둘째, 기황후는 몽골 군대가 조국인 고려를 침략하도록 부추겼다. 공민왕이 반몽골(반원) 정책을 전개하자, 몽골은 고려 왕족인 덕흥군을 내세워 고려를 침략했다. 1356년의 이 침공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기황후였다. <고려사> '최유 열전'에 따르면, 기황후가 황태자에게 고려 침공을 부추긴 일이 이 전쟁의 발단이었다.
또 기황후의 조카이자 기철의 아들인 기새인첩목아는 1367년 몽골 군대를 모아 고려를 침공했다가 이성계·지용수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이 역시 기황후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몽골의 고려 침략과 연루된 기황후를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킨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셋째, 기황후는 기씨 집안이 고려 서민들을 착취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고려사> '기철 열전'에서는 이 집안의 횡포로 인해 "전국이 고통을 당했다"고 했다.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 남의 땅을 강탈하거나 유부녀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기황후는 집안사람들에게 자제를 당부했다. 하지만, 기씨 집안의 횡포는 기황후의 권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그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렇게 고려 서민들의 원성을 산 기씨 집안의 몸통인 기황후를 사극의 낭만적인 주인공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역사 기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기황후는 단순히 몽골에 가서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에 그치지 않았다. 또 그는 단순히 매력적인 악녀에 불과하지도 않았다. 그는 집안사람들과 함께 고려를 간섭하고 침략하는 데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고려 서민들을 착취하는 데도 책임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고려를 망가뜨리려 한 배신자였다.
기황후는 개인적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공적으로 보면 동족의 피눈물을 이용해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을 드라마의 소재로 할 수는 있겠지만, '이국땅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황후> 드라마에서는 기황후의 개인적 성공과 더불어 그의 반민족 행위가 명확히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