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품은 도시

시리아 내전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요르단과 터키의 사이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는 육로로 터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시리아 사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결국 시리아에 남은 마지막 최후의 한국인 2명까지 모두 본국으로 소환된 마당에 더 이상 육로를 고집하는 건 무리였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거룩한 술탄 살라딘의 흔적도 더듬어 보고 싶었지만 언젠가 시리아를 다시 방문할 핑계가 생겼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

  밤 늦게 도착한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국제공항
밤 늦게 도착한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국제공항 ⓒ 김동주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보물찾기를 끝내고 마침내 돌아온 문명의 세계 터키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초저녁에 도착한 이스탄불의 깔끔한 지하철과 강을 두고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페리들. 목적지인 술탄 하흐멧(Sultan Ahmed) 역에 도착해 밖을 나오니 축제라도 벌어진 듯 온통 소란스럽다. 바람에 나부끼는 터키의 붉은 깃발과 '친구'를 외치며 지나치는 터키 사람들, 한참을 낑낑거리면서 열어야만 열릴 것 같은 거대한 성문을 가진 모스크와 그 옆에서 어울릴 듯 안 어울릴 듯 유리로 둘러쳐진 멋들어진 건물들.

한 도시가 이토록 다른 풍경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터키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동양에서 온 작은 손님을 반기는 여러 터키인들과 즐거운 술잔을 기울였다. 전쟁세대가 아닌 나에게 터키가 참전했던 6·25 전쟁은 이미 빛 바랜 얘기지만 이들은 나에게 막역한 정을 느낀다는 것이 생소했다. 그제서야 처음 들은 싸이의 '강남 스타일' 덕분에 우리는 정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묘한 조화를 이루는 최신식 트램과 천년 전의 이슬람 사원
묘한 조화를 이루는 최신식 트램과 천년 전의 이슬람 사원 ⓒ 김동주

얼핏 보면 평범한 보드카 같지만 물에 섞으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터키의 전통주 라크와 함께 한 밤이 지나고 조금이라도 빨리 도시의 전경을 보고 싶었던 나는 아침이 되자 마치 출근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거리로 나섰다.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옛스러움을 간직한 대도시지만 정작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과는 별로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멋스러움을 지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이상한 나라의 거리를 활보한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동서양이 만나고 유럽과 오스만이 만나는 이스탄불의 매력이다.

  이스탄불의 대표 랜드마크, 술탄아흐멧 자미(Sultan Ahmet)
이스탄불의 대표 랜드마크, 술탄아흐멧 자미(Sultan Ahmet) ⓒ 김동주

안타깝게도 그다지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흐른다. 마차가 다닐 것만 같은 길 위에 새겨진 철로를 따라 걷다가 간밤에 지나쳤던 술탄아흐멧 자미에 다다랐다. 터키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술탄아흐멧 자미는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내부를 장식한 2만여 장의 푸른색 타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고 있으면 역시 내부보다는 외관이 더욱 흥미롭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가 갇혀 있을 법한 높은 첨탑과 용이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중앙 돔을 보고 있으면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만 같은 들뜬 기분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히잡을 쓰고 양탄자가 깔린 사원 내에서 정성스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제야 이곳이 이슬람 사원임을 깨닫는다.

발길을 돌려 찾은 아야소피아 광장은 이미 성당을 방문하러 온 관광객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얼핏보면 블루 모스크와 꼭 닮아 구분이 안 가는 이 성당은 비잔틴 제국 시절 지어진 것이란다. 훗날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당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이 되어버린 아야소피아 성당과 달리 매일매일 수천 명의 신도가 오가는 술탄아흐메드 자미를 보면 지금의 이스탄불은 역시 회교도의 도시다.

  블루 모스크보다 천년 먼저 지어진 아야소피아 성당(Ayasofya)
블루 모스크보다 천년 먼저 지어진 아야소피아 성당(Ayasofya) ⓒ 김동주

성당인데도 불구하고 술탄아흐메드 자미와 쌍을 이루는 아야소피아의 크고 웅장한 첨탑은 한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던 역사를 증명하는 흔적이다. 한참을 기다려 입장권을 끊고 들어선 내부는 오래된 성화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려 1500년 세월을 견뎌온 벽화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천장 돔 주변으로 설치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성당 내부를 밝혀 묘한 황금빛을 자아내면 성화 속의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본당 왼편에는 유난히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듯 반들반들한 기둥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이 기둥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빙 돌리면서 소원성취를 기원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를 가도 흔히 있는 미신이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품은 곳에서 비는 소원은 어쩌면 진짜 이루어지지 않을까?

마침내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 ⓒ 김동주

이스탄불의 서쪽, 유럽지구의 신시가지로 가는 길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를 따라 형성된 시장은 출근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시간이 흘러 출근행렬이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낚싯대를 들고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낚시꾼들이 차지한다.

굳이 높은 곳을 찾지 않아도 다리에서 바라보는 이스탄불은 언제나 아름답다. 난간에 기대 차이 한잔을 마시는 사람들 너머로 그림 같은 모스크가 멋진 배경을 만든다. 다리 아래의 레스토랑에서 생선으로 배를 채우고 다리를 건너 유럽에 도착해서는 유럽 대륙의 마지막 기차역인 시르케지 역을 찾았다.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 유명해진 시르케지 역이지만 그보다는 유럽 대륙을 기차로 횡단하게 해준 주역이라는 점이 더욱 놀랍다.

  한 때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마지막 종착역이었던 시르케지(Sirkeci)
한 때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마지막 종착역이었던 시르케지(Sirkeci) ⓒ 김동주

비행기가 발달하면서 승객이 줄어들자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낭만을 운반하던 유럽횡단 열차는 사라졌지만 역사의 모습으로 보아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지금은 그리스로 가는 기차만 간간히 운행되고 있다는데 옛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를 보고 있으면 지금은 향수로만 남아있는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언젠가 다시 타게 될 날이 왔으면 하고 저절로 바라게 된다. 그 기차를 타고 종착역인 파리까지 횡단하는 여행은 얼마나 멋있을까.

신 시가지 쪽으로 방향을 돌리니 관광객들로 가득한 이스티크랄 거리로 이어졌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카페와 명품가게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이스탄불의 붉은 색 전차가 가로지른다. 번화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느리게 오가는 전차의 영향인지 잠시 쉬고 싶어진 나는 전차가 다니는 골목길을 지나 숨어있는 노천 바를 찾았다.

  터키의 카페에서는 차이(Cay) 를.
터키의 카페에서는 차이(Cay) 를. ⓒ 김동주

아마도 혼자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앉아 수다를 떨고 싶었던 그 곳에서 터키의 국민 차 차이를 주문했다. 허리가 쏙 들어간 유리잔에 담겨 나오는 차이는 얼핏 보면 홍차와 비슷한 색깔인데 첫 맛은 제법 씁쓸했다. 같이 나온 설탕을 넣고 나니 비로소 달달함이 퍼지면서 몸이 편안해졌다.

신시가지에서 해변을 따라 걸으니 비로소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 보스포루스 다리가 나왔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봐도 좀처럼 한 화면에 들어오지 않을만큼 긴 보스포루스 다리는 지구에서 가장 특별한 다리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에 속하는 두 지역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330년 로마의 황제가 수도를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 제국에 속했던 이스탄불은 훗날 오스만 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함께 동서양을 모두 가진 독특한 곳으로 변모했다고 하는데 로마에서부터 뻗어 나온 길이 결국 이 다리에서 아시아와 만나는 셈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 ⓒ 김동주

일찍이 나폴레옹은 만약 세계가 하나가 된다면 그 수도는 반드시 이스탄불이어야 한다고 했다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로마 비잔틴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한때 세상의 중심에서 호령하던 이 도시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자고 일어나 유럽으로 출근한다. 옛 도시는 비록 그 영광을 잃었지만 다리 아래 해변가에 길어 이어진 돌마바흐체(Dolmabahce) 궁전은 아직도 그 때의 영광을 가진 듯 그 화려함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화려함 그 자체,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화려함 그 자체,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 김동주

무려 3개의 대륙을 거스렸던 오스만 시대 술탄들은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이 장소에 돌마바흐체 궁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제 모습은 유럽 그 자체였다. 현존하는 궁전 중 가장 화려한 궁전이라는 평을 듣는다고 하는데 1만5000㎡의 넓은 면적에 수십 톤의 금, 은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고 하니 그들의 영광은 과연 하늘을 찌를 듯 했었나 보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궁전에서 가장 특이했던 곳은 역시 '하렘'이었다. 몇 년 전 베르사유 궁전에서 보았던 화려한 카펫과 커튼, 샹들리에로 장식된 방은 더 이상 꾸밀 곳이 없을 만큼 화려했는데 그곳은 세계 각지에서 노예로 끌려온 수천 명의 궁녀들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번 궁에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하니 노예의 신분으로 이런 화려한 곳에 거처를 두고 있었던 그들에게는 기회이자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잔인한 감옥이었을까.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Grand Bazaar)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Grand Bazaar) ⓒ 김동주

거대한 궁전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마치 다른 곳에 온 듯한 시장이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향기를 간직한 듯한 그랜드 바자(Grand Bazar)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시장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마치 또 다른 궁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기라고는 도저히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오래된 석조 건물인 그랜드 바자를 걷다 터키의 고유 음식인 쿰피르를 파는 가게 앞에 섰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지갑을 열었다. 쿰피르는 삶은 감자에 이것저것 토핑을 올리고 케첩과 마요네즈를 버무려 먹는 음식인데 기나긴 아프리카의 정체불명 음식들을 거쳐 마침내 제대로 된 음식을 맛 본 그 느낌도 좋았지만, 한국에 와서도 감자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뿌리는 습관이 들어버렸을 정도로 맛있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석양
보스포루스 해협의 석양 ⓒ 김동주

바깥으로 나오니 보스포루스 해협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거대한 배가 이스탄불의 항구로 들어섰다. 멀리 유럽에서 아시아를 만나기 위해 나타났을 크루즈 너머로 서서히 노을이 지고 다리 위는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는 차량들로 분주하다. 위대한 영광이 사라지고도 여전히 활기와 웃음이 넘치는 이스탄불의 노을은 마치 이 도시의 많은 애환과 사연을 어루만지는 듯 서서히 바다를 검게 물들였다.

이스탄불을 떠나는 마지막 날 밤, 나는 기차를 타고 유럽이 아닌 아시아를 횡단하는 긴 꿈을 꿨다. 파리에서 터키까지, 그리고 터키에서 한반도 까지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가 된다면 그때 나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기나긴 기차를 타고.

간략 여행 정보
이스탄불 여행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를 기준으로 서쪽인 유럽지구와 동쪽인 아시아지구로 나뉜다.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종착역인 시르케지역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관광명소는 유럽지구의 구시가지에 모여 있지만 자동차나 배를 통해 해협을 건너 아시아지구에 들어서면 전혀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거리에서 흔하게 파는 케밥과 쿰피르로 끼니를 떼우고 터키식 홍차인 차이를 곁들인 뒤 전통주인 라크 한잔이면 여느 도시 못지 않은 식도락 여행도 가능하다.

터키의 관광지는 모두 비잔틴 제국의 형성과 몰락에 연관되어 있기에 여행전에 이와 관련된 역사를 알아두면 훨씬 더 알찬 관람이 가능하다. 도시의 규모가 제법 커서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 불편하다면 이스탄불를 돌아보는 시티투어를 이용하면 되는데 한국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한국어로 안내하는 가이드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미리 알아두자.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