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걸고 그는 떠나갔다공연한 이야기만 남기고 떠나갔다그의 이야기가 절망인 것이 아니라그의 모습이 절망인 것이 아니라그가 돈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그가 범죄자이었다는 것이 아니라더욱이나 그가 외국지(外國地 ) 양복이나지아이 가리(미군 부대원 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른 모양을 가리키는 말-기자 주)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라그가 나갔을 때양반(洋盤) 반주곡이 감상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더욱이나 푸른 창가에황혼이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이더욱이나 아니라나의 주위에 말짱 '반동'만 앉아 있어객소리만 씨부리고 있었다는 것이더욱이나 더욱이나 아니라이런 황혼에는 시베리아의어느 이름 없는 개울가에서들오리가 서투른 앉음새로병아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심심해서 아아 심심해서(1961. 3. 23)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양키(yankee)'의 나라다. 지금은 그 정도가 덜하지만, 지난 세기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양키'라는 말은 정치적 금기어였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패권국인 미국과 미국인을 경멸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양키'의 어원은 다양한다. 식민지 시절, 뉴암스테르담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정착해 살았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철수'와 '영희'처럼, '얀(jan)'과 '키스(kees)'를 많이 썼다. 영국인들은 이들 네덜란드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이 '얀'과 '키스'를 이어붙여 '양키'라고 불렀다.
아메리카 토착 인디언 부족인 체로키 부족 유래설도 있다. 이들 인디언 부족이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을 '겁쟁이'라는 의미의 'eankke'로 조롱하듯 불렀다는 것이 그것이다.
18세기 영국 장군 제임스 울피와 관련된 어원설도 있다. 울피 장군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뉴잉글랜드 농민 출신의 오합지졸 병사들을 얕잡아 '양키'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실제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국은 '양키 두들(yankee doodle)'을 군가로 쓰기도 했다. 'doodle'은 '겁쟁이, 바보' 등을 뜻하는 게르만어 'dudel'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양키'가 그런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양키'는 미국의 실질적인 주류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후손들로 식민지 시절 종주국인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 독립을 쟁취하고, 경건한 태도로 하느님을 섬긴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후대의 교육을 위해 아이비리그(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들을 일컫는 이름)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키'는 현실 세계에서 그런 실제의 뜻과는 무관하게 패권국 미국을 조롱하는 말로 더 널리 쓰였다. 그것은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학자인 찰스 라이트 밀즈가 <들어라 양키들아>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양키들'을 향한 외침에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김수영은 1961년 5월에 <들어라 양키들아>라는 제목의 산문을 쓴다. 밀즈의 책에 대한 일종의 서평이었다. 그 전에 김수영은 이 책을 읽은 뒤의 소감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들어라 양키들아>(C. 라이트 밀즈 저) 독료.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며 읽었다. 사상계사에 Book Review를 썼다. 아아, <들어라 양키들아>. (<김수영 전집 2 산문>, 510쪽)<들어라 양키들아>는 당대의 진보적인 매체인 <사상계>의 청탁으로 쓰인 글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발표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서평의 대상이 된 라이트 밀즈의 책은 반미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수영이 쓴 서평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아마도 글이 쓰인 후 보름이 지나 터진 박정희의 5·16 쿠데타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들어라 양키들아>의 어조는 자못 선동적이다. 냉철하고 차분한 듯하면서도 흥분에 들뜬 김수영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대의 주류 세력이 글을 가만히 놔두기에는 내용이 불온하기 짝이 없다.
혁명은 상식이고 인종차별과 계급적 불평등과 식민지적 착취로부터의 3대 해방은 '3대 의무' 이상의 20세기 청년의 '상식적'인 의무인 것이다. (중략) 혁명을 하자. 그러나 빠찡꼬를 하듯이 하자. 혹은 슈샤인 보이가 구두닦이 일을 하듯이 하자. (<김수영 전집 2 산문>, 166쪽)김수영 특유의 이른바 일상의 혁명론, 삶의 혁명론이다. 좀더 거친 비유를 들자면 '온몸'의 혁명론이다. 그가 보기에 혁명은 육중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다. 그랬기에 그는 이미 <눈>과 <쌀난리>, <사랑> 등에서 혁명에 대한, 그리고 민중에 대한 굳은 믿음을 드러낸 것이다. 4월의 광장이 어둠속에 스러졌던 바로 1년 후쯤에 말이다.
일상의 혁명론, '온몸'의 혁명론은 김수영의 주변을 "반동만 앉아 있어 / 객소리만 씨부리고 있"(1연 14, 15행)게 만들었다. 그는 아마 쓸쓸했을 것이다. 그 외로움에 하루하루의 '황혼'이 그저 평범한 저물녘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는 "시베리아의 / 어느 이름 없는 개울가에서 / 들오리가 서투른 앉음새로 / 병아리를 품고 있"(2연 1~4행)는 장면을 상상한다. '들오리'가 '병아리를 품'는 이유? 그가 그 장면을 떠올리는 배경? 별다른 것 없다. "심심해서 아아 심심해서"(2연 5행)다.
그 광막한 '시베리아'의 어느 한 구석 '이름 없는 개울가'에서 '병아리'를 품는 '들오리'를 그려 보자. 들오리는 미미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온 우주에 유일한 생명을, 아마도 그에게는 광대한, 그러면서도 유일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낮잡아 말하면, 이것은 아마도 김수영식의 '정신적 승리법'일지 모른다. 세상은 혁명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전히 일상의 혁명론, 삶의 혁명론을 믿는다. '온몸'으로 하는 유쾌한 혁명론에 달떠 있다. 그러니 그는 스스로를 마취시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
황혼 무렵은 쓸쓸하다. 하지만 이 시의 황혼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들오리'가 병아리를 품는 생명의 시간, 새로운 희망이 잉태하는 우주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황혼>은, 4월의 함성을 잊지 못하는 김수영 식의 결연한 추도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