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방영된 MBC 드라마 <기황후> 10화의 한 장면. 카리스마를 뽐내며 등장한 돌궐족 족장의 딸 연비수(유인영 분). 그녀의 첫 등장이었지만, 그녀가 착용한 갑옷은 첫 출연이 아니다. 다른 사극에서 만들어진 갑옷이 '재활용'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갑옷이 돌궐 갑옷과 무관하다는 사실.
이는 본래 드라마 <주몽>의 해모수(허준호 분)가 입었던 것이다. 같은 복식이지만 이를 착용한 이의 국가와 민족은 다르다. 게다가 시간 차도 크다. <주몽>의 시대적 배경인 부여와 <기황후>의 시대적 배경인 원 간섭기는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의 격차가 있다.
시대와 국적 넘어 마구잡이로 활용되는 사극 속 갑옷
<기황후> 5화에서도 이른바 갑옷 재활용 행태가 목격된다. 고려로 유배 온 황태제(황제의 형제)를 암살하기 위해 고려 땅을 밟은 원나라 장수들. 이들이 입은 갑옷의 출처도 원나라나 고려와는 무관하다.
당기세(김정현 분)와 탑자해(차도진 분)의 갑옷은 각각 <주몽>에서 주몽(송일국 분)과 대소(김승수 분)가 입은 바 있다. 백안(김영호 분)과 탈탈(진이한 분)의 갑옷은 <선덕여왕>에서 신라 화랑들의 갑옷으로 제작돼 주연 및 조연배우들이 착용한 것이다. 몽골 전사들이 부여 왕자와 신라 화랑의 갑옷을 입은 셈이다.
복식이 시대와 국적에 무관하게 마구잡이로 쓰이는 사극은 <기황후>뿐이 아니다. 사실 시공간을 넘어선 복식의 재할용은 한국 사극에서는 흔한 일이다. 디자인에 변형을 주기도 하지만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해신>에서 신라인인 장보고(최수종 분)가 입던 갑옷이 <대조영>에서 당나라 사람인 강하왕(정재곤 분)의 갑옷으로 재등장하는 게 대표적이다. 또한 건축물까지 시대와 국가에 무관하게 이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관련기사 :
고구려 배경 사극에 등장한 광화문 황당하네).
한 사극에 복식과 건축의 재활용 문제가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주몽>(2006~2007)에서는 <신돈>(2005~2006)의 고려 세트장과 고려 갑옷이 재활용돼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또 <천추태후>(2009)에서는 <연개소문>(2006~2007)의 수나라 궁궐 세트장이 고려 궁궐로 쓰였고, <대조영>(2006~2007)의 연개소문 갑옷은 거란 장수 소배압(정층채 분)이 착용하기도 했다.
이는 시청자로 하여금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시대별 특성을 왜곡하는 문제를 낳는다. 또, <대장금> 이후 우리 사극의 수출이 연이은 상황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복식의 재활용은 국제적 망신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라도 기본적 고증은 충실히 지켜야일본 NHK 사극 <쇼토쿠태자>는 박물관을 재현했다는 평까지 나올 정도로 동아시아 고대 복식과 건축을 충실히 구현해냈다. 우리 사극 중에서는 <근초고왕>(2010~2011)이 이례적으로 '개념 고증사극'이라 불린다.
이는 사료에 충실한 고증 덕이다.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우리사극 최초로 삼국시대에 걸맞는 토성, 초가궁궐 등의 건축을 구현했으며 유물 및 벽화를 바탕으로 고대 갑옷을 실감나게 고증했다. 현대적 재해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기초적인 면에서 고증에 충실한 까닭에 사극 마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사극 기획 및 제작 단계 때 기초적인 복식과 건축 고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해당 시대에 걸맞게 구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극의 특성상 유연성과 상상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사극 내용이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 '사실'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엉뚱한 복식과 건축을 상상력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순신 장군이 남산타워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를 '타임슬립물'이나 '판타지물'이 아닌 '사극'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극적 상상력'이나 '현대적 재해석'은 시대별·국가별 특성에 맞는 기초적인 고증을 거친 뒤에 이뤄져야 한다. 고증에 충실하지 않은 복식 제작,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분별한 재활용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