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여행'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나 오래된 건물들이 멋들어지게 늘어선 고풍스런 도시, 혹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 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도 준과 나에게 남미여행은 '눈 덮힌 산'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안데스 산맥의 끝을 향해칠레의 남쪽 땅끝 마을,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는 국경만 칠레로 바뀌었을 뿐, 기후나 풍경이나 아르헨티나의 엘 칼라파테와 다를 것이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서 90분 거리에, 또 하나의 눈 덮힌 산, '토레스 델 파이네' 가 있다.
남미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가르는 안데스 산맥이 끝나는 지점,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 평원의 마지막에 자리잡은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는 마치 탑처럼 생긴 봉우리들이 늘어선 장엄한 대자연이다. '파이네의 탑'이라는 뜻의 이름도 바로 그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선 봉우리들에서 생겨났다.
정면이 강물로 막혀 있고, 뒤로는 끝없는 산맥이 이어져 있어 한번 들어 서면 반대쪽으로 완주를 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도 없는 토레스 델 파이네야말로 우리의 여행을 '리얼'하게 만들어 줄 존재라고 믿었던 우리는, 인간의 손이 닿기에는 너무도 멀고 험한 그 대자연에서 마음껏 길을 잃기 위해 사흘치의 식량을 모두 준비했다.
취사장비와 라면, 사흘치의 식량과 텐트, 그리고 방수 장비. 장보기가 끝날 무렵 주류 코너에 멈춰선 준은 기어코 그 무거운 술병을 쓸어 담았다. 대자연의 공기를 안주 삼아 밤에는 독주를, 식사에는 와인을 곁들일 거란다. 그걸로도 부족해 견과류를 비롯한 각종 안주와 고기마저 그의 배낭 한켠을 자리했다.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무거운 일이었다.
절망과 탄성을 동시에 안겨주는 토레스 델 파이네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마을에서 꼬박 이틀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체력을 비축하며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트레킹에 나선 우리는 첫 날, 첫 걸음을 떼고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육체의 한계에 먼저 부딪혔다.
출발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불어 닥친 강풍에 어느새 날아가 버린 배낭 덮개는 그저 시작이었다. 꽤 긴 시간 펼쳐진 녹지의 뛰노는 말들이 작아질 무렵 시작된 오르막 길은 높이라고 해봐야 해발 500m도 되지 않지만 급격한 경사와 등에 멘 사흘치의 짐은 사정없이 발목을 붙잡았다. 사흘치의 생명이 이토록 무거웠단 말인가.
잠시라도 호흡을 멈추면 터질 듯이 팽창한 폐를 껴 앉고 겨우겨우 첫 번째 언덕을 넘자 이번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실수 한 번이면 산 아래 강으로 곤두박질이다. 역으로 부는 강풍에 눈을 못 뜰 지경인데 바닥에 채이는 자갈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느새 회색 구름이 하늘의 남은 푸른색을 모두 흡수했고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마음껏 길을 잃어 보자던 우리의 여행은 어느새 살아남기 위한 생존게임이 되어 버렸다. 아슬아슬한 길을 지나 몸을 굽히면 절벽 아래의 강에 닿을 듯 해질 무렵, 우리는 드디어 첫 번째 쉼터인 칠레노 산장에 도착했다.
나무 데크가 젖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치고 사흘치의 목숨을 내려 놓으니 그제서야 몸이 제자리를 찾은 듯 온기가 돈다. 여기가 끝이면 좋으련만, 3박 4일동안 하루에 하나씩의 전망대를 찍어야 하는 W트래킹 코스의 특성상 기어코 첫 번째 전망대인 '라스 토레스(Las Torres)'에 올라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비가 멎고 구름이 걷혔다는 것 정도일까. 우리는 한줄기 희망을 품고 또 한번 육체의 한계를 겪으며 기어코 전망대에 올라 그 동안 참아왔던 탄성을 뿜어냈다. 구름을 등에 업은 세 개의 탑은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파란 하늘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과연 이 정도 비경이라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먼, 안데스의 끝자락에 숨겨 둘 만하다. 우뚝 솟은 3개의 봉우리는 이 대자연을 지키기 위한 바위 성채 같았다. 더 이상은 침범하지 말라는 자연으로부터의 무언의 경고와도 같은.
텐트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가장 힘들다는 첫날이 이 정도면 할 만하겠다 싶었던 거다. 다시 내려온 칠레노 산장에서 우리는 짐짓 여유를 부리며 여행자들과 그동안의 무용담을 주고 받으며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저녁을 보냈다.
결론적으로 그 평화는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인간을 품을 생각이 없는 대자연의 밤은 그야말로 가혹했다. 해가 지자 비가 뿌리기 시작하나 싶더니 산장의 불이 꺼지고 나자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바깥의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였지만 비에 젖은 텐트 안은 노숙과 다를게 없었다.
잠이 들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쥐어 짜이는 듯한 뒤늦은 근육통과 시린 추위는 아직도 또렷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모든 장비를 텐트 안으로 넣고 나니 준과 나는 마치 한 몸이 된 듯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딱딱한 바닥은 자꾸만 등을 찌르고, 밤이 깊어지고 텐트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몸이 비명을 지른다. 거기에 모든 세포가 마르는 듯한 격한 목마름. 몸을 일으켜 배낭 속의 물통을 꺼내려면 지금의 자세를 깨트려야 한다. 두 번 다시 이보다 덜 불편한 자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이따금씩 얼어붙은 텐트의 입구에 닿을 때마다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떨리던 발에 감각이 없어지고, 차라리 지금 당장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무념무상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쯤 겨우 잠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의식을 잃었고, 그 마지막 순간 단발마처럼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아… 나는 이렇게 죽는 것인가.'
간략여행정보 |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할 길'에 뽑힐 만큼 멋진 자연을 자랑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위해서는 칠레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 푸에르트 나탈레스(Puerto Natales)를 베이스 기지로 삼아야한다. 트래킹 코스는 크게 7박8일 종주코스와 3박4일 W트래킹 코스로 나뉘는데, 종주코스는 오로지 여름 시즌에만 오픈되므로 대부분의 여행자는 W트래킹 코스를 선택한다. 이름 그대로 W모양으로 생긴 45km의 길을 4일간에 걸쳐서 걷는데, W의 아래 꼭지점에 텐트를 치고 윗 꼭지점에 위치한 세 개의 전망대를 하루에 하나씩 정복하는 코스다.
하루에 적어도 15km의 산길을, 사흘치의 식량과 텐트를 지고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남미에서도 남극과 가장 가까운 국립공원인 탓에 산의 빙하와 눈은 일년 내내 녹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흩날리는 눈비와 바람은 배낭을 멘 여행자의 발목을 움켜잡는다. 방수와 방한에 대한 대비는 아무리 지나쳐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한국의 오토캠핑장 처럼 저녁이면 오손도손 불을 피우고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결코 아니니,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과감히 버리고 최대한 배낭의 무게를 줄이자.
공원 안에는 각 중간지점마다 유료산장과 무료 캠핑장이 있으며 유료산장에는 도미토리 형식의 숙소와 간단한 음식을 팔지만, 국립공원 밖에 비해 10배 정도의 돈을 받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가 이어진다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루 정도는 숙소에서 묵는 것이 좋다. (4인 도미토리 1박에 인당 한화80,000원 정도, 2012년 11월 기준)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을 앞두고 있다면 아래 링크를 꼭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088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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