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해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피난민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한 흥남부두 연가 <굳세어라 금순아>가 내 가슴에 잿빛 감정이 돼 머무른다. 여기에 아침 안개와 찌푸린 구름이 마음 속 우울함을 더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에게 제일 중요한 공장
부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공장이 있다. 마치 중학생이 돼 공장에 견학가는 기분이다. 흥남 비료공장에 대해서는 학교 때 들어본 적이 있어서 과연 어떤 곳인지 기대도 되고 조금은 흥분도 된다.
입구에 들어서자 울긋불긋한 갖가지 구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거나 '지도자를 높이 받들자'는 내용이다.
우리는 '흥남비료 혁명사적관'이라는 건물로 안내받는다. 건물 앞에 있는 구호에 눈길이 간다.
'흥남아 일어나라 백두산이 본다. 전민이 너를 따르리! 항일만이 살길'지금까지도 '항일'의 구호가 붙어있다. '아직도 항일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항일 빨치산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자'는 뜻일까. 아마 북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항일'이란 두 글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사적관 건물로 들어선 뒤 해설원에게 공장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관광지 이외의 곳은 가기를 싫어하는 남편이지만, 이곳에서는 온갖 질문을 한다. 그의 관심은 북이 필요로 하는 식량의 총량과 이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비료의 양 그리고 이 흥남 비료공장에서 생산하는 비료의 양이다. '공장 같은 데는 왜 가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더니 질문은 혼자 다 하고 있다.
해설원이 사무실 이곳저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중 또 하나의 구호가 눈에 들어온다.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구호가 바로 그것. 식량만은 누구에게나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백번 수긍이 간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굶주림에 못 견뎌 음식을 절도한 사람은 무죄라고 하지 않는가.
사적관을 나온 우리는 공장 안으로 안내된다. 기계설비와 비료의 생산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솔직히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북한 동포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공장을 견학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이해했다. 부디 비료가 펑펑 쏟아져 누런 쌀알이 주렁주렁 매달린 벼가 황금벌판을 이루길 공장 한가운데 서서 기도한다.
'함흥차사' 고사가 탄생한 곳
비료공장을 떠나 함흥으로 향한다. 흥남이 산업도시인지라 길가에 공장들이 많이 늘어서 있다.
우리가 가고 있는 다음 목적지는 '함흥본궁'이라는 유적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식들 싸움에 진절머리가 나 왕위를 내려놓고 한때 이곳에 와 기거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귀경을 권하기 위해 자식이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고 해 전해진 '함흥차사' 이야기가 이곳에 얽혀 있다. 소나무 밭을 지나 함흥본궁에 닿았다. 역사 유적지인 만큼 주위도 잘 정돈돼 있다.
이성계는 이곳에 있는 '풍패루'에 올라 기생들을 불러놓고 술을 마시며 시름을 달랜 모양이다. 여기에 얽힌 육담(음담패설)과 'X팔X두'라는 욕의 기원을 이곳 여성 해설원이 자세히 설명해 준다(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애꿎은 차사를 죽이다니 이성계가 성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함흥본궁의 문화재적 가치나 건축미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이곳에서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궁궐을 흉내 내 축소해 놓은 조선의 건축물 정도로만 보일 뿐. 게다가 이곳에 얽힌 옛이야기들도 크게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 유명한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가 탄생한 장소를 내가 와봤다는 사실이 감동이라면 감동이랄까.
'원조' 함흠냉면을 놓치다니...
함흥본궁을 떠나 시내 구경을 나선다. 함흥 시내 역시 평양과 마찬가지로 도로변에 잔디를 까는 작업이 한창이다. 설향이 말에 의하면 함흥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 또한 대단해 지는 것을 싫어한단다. 그래서 극장 하나를 지어도 평양보다 더 크게 짓는다고 한다.
오후 5시까지 평양에 도착해야 하는 까닭에 시간에 쫓기며 이동한다. 수박 겉핥기식이다. 그래도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함흥이 이제까지 내가 본 북한의 도시 중 평양 다음으로 큰 도시 같아 보인다.
북한의 도시는 일반적으로 어둡고 삭막한 느낌이 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건물에 간판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는 상업용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손님을 유혹하는 화려한 간판들로 장식돼 있어 밤이면 더욱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이런 건물들에 간판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의 거리 또한 상당히 어둡고 삭막하게 보일 것이다. 북한에서 독립채산제가 정착하고 약간의 경쟁구도가 형성되면 거리 모습도 변할 게 분명하다.
원래 우리는 함흥시를 구경한 뒤에 '신흥관'이라는 냉면집(북한에서는 그냥 국수집이라고 부름)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예정시간보다 일찍 평양으로 향해야 하는 까닭에 아쉽게도 식당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냉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의 '심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영길 아우가 남편을 달래느라 진땀을 뺀다.
"형, 가는 길에 정말 경치 좋은 폭포가 있는데 원래는 일정에 없던 곳이야요. 대신 거게서 벤또를 먹을 예정입니다. 함흥서 국수 한 그릇 드시는 것과는 상대가 안 될 거야요."심술이 난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뭐라고 한 마디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은 분위기인데 가만히 화를 억누르는 듯하다. 참 다행이다.
사방 40리에서 폭포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함흥을 떠난 우리는 평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예닐곱 시간은 걸릴 것이란다. 함주·정평을 지나 금야라는 곳 바로 못 미처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요덕'이라고 쓰여진 교통표지판이 그 길을 가리킨다. 언론이 보도하고 일부 새터민들이 증언하는, 무시무시한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바로 그 '요덕'인가? 아니면 그냥 같은 지명의 다른 도시일까.
30분 정도 더 가니 '울림폭포'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폭포 소리가 사방 40리까지 들려 '울림폭포'라 부른단다. 사람들이 폭포 쪽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는 걸 보니 꽤 유명한 폭포인가 보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다 폭포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서고 말았다. 떨어지는 물의 양도 엄청날 뿐 아니라 밑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주 작게 보일 정도다. 규모가 대단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나라서 이제까지 본 폭포 중 제일 큰 듯하다. 제주 정방폭포 높이의 서너 배는 족히 될 듯하다. 절벽 중간에서부터 물이 떨어져 나와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다. 장관이다.
이 울림폭포는 방금 우리 일행이 타고 온 도로를 건설하던 군인들에 의해 2001년 발견됐다고 한다. 이 엄청난 폭포가 최근에야 발견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이 거대한 폭포를 몰랐을 리 없지 않은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많은 북한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자연경관들이 꽤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흘러가는 계곡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는다. 함흥에서 제일 크고 유명하다는 신흥관에서 '원조 함흥냉면'을 못 먹어 온갖 불만을 터트리던 남편은 쥐죽은 듯 고요히 앉아 있다. 멍하니 폭포를 바라보며….
봉건사상에 찌든 일부 북한 남성들
계곡에는 물놀이하는 주민들로 가득하다. 수영복을 입은 채 계곡물에 몸을 담그거나 불을 피워 음식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그들과 한데 어울려 한 잔 하고 싶은지 눈길을 자꾸 그들에게 보낸다.
여전히 사람들이 폭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 행렬 속에서 나는 북한에서 제일 보기 싫어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 여성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거나 두 손 가득 들고, 남성은 유유자적하게 걸어가는 모습이다. 한 번은 시골에서 이런 광경까지 본 적이 있다. 부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데, 남편은 뒤에서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모습 말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이처럼 뻔뻔하고 째째한 남성들이 또 어디에 있으랴.
이런 현상은 평양보다 지방으로 갈수록 더 심한 것 같다. 유교 전통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어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말끝마다 '봉건의 잔재'를 들먹이다가도, 남성에게 편할라 치면 슬그머니 '아름다운 우리의 풍습'이라며 덮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이런 '남존여비 봉건잔재'는 없애지 못한단 말인가. 여성인 나로서는 대단한 불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남성이 모든 것을 다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 말대로 '능력에 따라 일을 시키고, 필요에 따라 배급을 주라'는 뜻이다.
돌팔이 북한 전문가들환상적인 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울림폭포의 메아리를 들으며 우리는 평양을 향해 출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에 '마식령'이라는 교통표지판이 나온다. 대규모 스키장을 건설한다는 바로 그곳이다.
'마식령 스키장' 근처를 지나니 한국 텔레비전에 등장한 한 일본인 북한 전문가가 떠오른다. 한국어를 그런대로 구사하는 그 '전문가'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마식령이란 곳에 스키장을 건설한다는데,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스키가 무슨 말인지조차도 모른다"고 험담을 늘어놨다. '돌팔이 전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북한에서는 '마식령 속도'라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나부끼고 있다. 즉,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하는 그 속도로 모두 일떠나서자'라는 구호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스키가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니 '말이 되는 말인가' 묻고 싶다.
탈북 여성들이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스키를 타본 적이 있는 이, 손을 들어보라"는 질문에 몇 사람이 손을 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이 탔다는 스키는 우리가 말하는 그런 스키가 아닌, 그야말로 집에서 자체 제작한 스키일 게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스키가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끼치는 일이다. 그런 허무맹랑한 평론보다는 차라리 '대규모 스키리조트 건설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고 있으며 수익성을 위해 관광객은 충분히 유치할 수 있는지' 등의 분석을 하는 게 그나마 틀려도 창피하지는 않을 듯하다.
소위 '북한 전문가'들이 소설 같은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말이나 주장이 설사 틀렸다고 해도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에 또 다른 '북한 전문가'들이 가세한다. 소위 '고위층 탈북자'들이다. 이들은 '자체 정보망' 또는 '통신망'까지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살다 온 고위층이었다고 하니 이들의 소설 같은 '북한별곡'은 설득력마저 갖고 있다. 이들이 탈북한 지 오래돼 지금의 북한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남과 북이 평화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잘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사실만을, 그리고 그 사실에 바탕을 둔 분석을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남한에서만이라도.
자랑스러운 민족의 딸, '순희'
어느덧 우리의 차는 평양에 진입하고 있다. 설향이는 피곤한지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한 잠에 푹 빠져 있다. 관광 안내원이라는 직업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온종일 손님 뒷바라지로 하루 일정을 끝내고, 자기 전엔 다음 날 일을 준비한다. 또 아침이 되면 손님들보다 일찍 일어나 대기해야 하니 말이다. 남편이 영길 아우에게 묻는다.
"5시까지 평양으로 와야 했던 이유가 뭐야? 대체 어디를 가는 거야?""가 보시면 압니다. 형이 제일 좋아하실 낍니다.""울림폭포 보다 더 멋있는 곳에 가나?""…."우리 차가 들어서는 곳은 이미 와본 적이 있는 '만경대 소년궁전'. 나도 이곳에 다시 온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면 그렇지, 남편이 이내 '폭발'한다.
"작년에 왔었던 여기를 또 오려고 마전에서 아침부터 서둘렀단 말이야? 관광안내를 어쩌면 이딴 식으로 하나?""…."우리는 한 건물로 안내돼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남녀 중학생들이 유도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순간 남편이 나를 쳐다보며 "혹시 계순희를…"이라며 혼잣말을 한다. 우리 일행을 보자 매트 한가운데서 인공기가 붙어있는 도복을 입은 한 여성이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다.
그리도 만나고 싶어 했던 계순희 선수를 본 남편. 계순희 선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그녀의 두 손을 잡는다. 내가 다가가자 계순희 선수가 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준다. 키가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계순희 선수로부터 받은 첫 인상은 '겸손'이다. 북한에서 계순희 선수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온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런 대 선수가 한낱 관광객에 불과한 우리를 대하는 모습이 수줍음 많은 소녀와도 같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런 말도 없이 엷은 미소를 보인다. 순박함을 그대로 간직한 소녀의 미소다. 도저히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일본의 전설적인 '유도의 신' 다무라 료코를 누르고 금메달을 딴 선수라고 믿기지 않는다.
흥분을 가라앉힌 남편이 평소답지 않게 차분하게 질문을 건넨다. 수첩까지 꺼내 들고 적어 가면서.
"역사에 치욕을 남긴 일본에게 질 수 없었다"
"계순희 선수가 다무라 료코 선수를 누르고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렸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매트에 오르기 전 심정이 어땠어요?""일부 사람들이 '계순희가 결승에 오른 것 만도 큰일을 해낸 거다'라며 아직 시합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내가 질 것만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다무라 료코도 인간이다, 그녀에게도 빈틈이 있고 인간은 실수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은근히 오기가 생겼어요. 어쩌면 주위의 그런 말들이 저를 더 자극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특히 그날은 우리의 전승기념일(정전협정일)이었습니다. 적지(미국)의 한가운데서, 그것도 우리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일본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운동선수는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경기에 임합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전승기념일날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말함)을 위해 꼭 금메달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고 올랐습니다."계순희 선수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무척 숙연해진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가 계순희 선수에게 물었다.
"계순희 선수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국수를 좋아합니다. 하루 세끼 국수만 먹어도 될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리고 고기도 잘 먹습니다.""무슨 고기를 좋아하세요?""두 발, 네 발 가리지 않습니다."순간 웃음들이 터져 나오면서 일순간에 분위기가 전환된다.
"집에 갈 때는 나 죽었습니다 하고 갑니다"... 왜?
"경기 전날에는 무슨 음식을 드셨어요?""굶었습니다. 체중 조절하느라고."나는 체급이 있는 경기의 운동선수들이 경기 전 체중 조절을 위해 굶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배가 고파서 어떻게 경기를 할까. 배를 굶은 가엾은 선수들이 하는 경기를 우리는 재미있게 구경을 하는구나.
"혹시 실례지만 결혼은 하셨나요?""네, 결혼한 지 7년 됐습니다.""애기는요?""아직 없습니다."계순희 선수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남편이 질문을 이어간다.
"계순희 선수, 혹시 부부싸움할 때 남편을 엎어치기로 냅다 던져버리지는 않습니까?"주위가 또다시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룬다. 계순희 선수는 나즈막히 대답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나 죽었습니다' 하고 들어갑니다. 여성이 여성다움을 잃으면 여성이 아니지요."계순희 선수는 현재 북한 청소년 유도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다. 그녀에게 '남한에도 많은 팬들이 있다'는 말을 건네며 남녘 동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는다.
"남녘의 동포 여러분, 그리고 저를 사랑해 주시는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계순희입니다. 조국이 분단된 지 60년이나 흘렀습니다. 통일이 되어 함께 살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그때가 오면 저 또한 통일조국의 선수단을 이끌고 조국을 드높이 모시는 가슴 벅찬 일을 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동포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세계 유도계가 인정하는 일본 '유도의 신' 다무라 료코를 누르고 금메달을 딴 계순희 선수는 당시 중학교 학생이었다. 불과 만 16세의 어린 소녀였다.
다무라 료코가 완벽한 기술을 갖췄다는 일본의 유도선수라면, 계순희는 완벽한 미덕을 갖춘 우리의 여성이다. 겸손하기가 이제 막 유도에 입문한 어린 소녀와도 같고, 소박하기는 행주치마를 두른 우리네 어머니와 같다. 그녀는 조국을 위해 운동하며, 굳은 의지로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계순희. 부르기도 정겨운 우리의 이름 '순희'. 그녀의 엷은 미소에는 16세 당시 '순희'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담겨있다. 작별의 손을 흔들어 주는 '순희'에게 속삭인다.
"강인하고도 어진 우리 민족의 딸 '순희'야, 통일 조국의 하늘 아래 그때의 영광을 재연하며 함께 살아갈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