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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의 진면목

빙하의 세계로부터 도망친 우리에게 산티아고는 마치 추운 겨울의 온돌방과도 같은 존재였다. 활기찬 거리에 가득한 카페와 각종 가게는 눈을 즐겁게 하고, 상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틀어대는 '강남스타일'은 마치 한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숙소에서는 요일마다 다른 콘셉트의 파티가 벌어졌고 우리는 그 곳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갔다.

  매일매일 다른 콘셉트의 파티가 벌어지는 안데스 호스텔에서 3주만에 다시 만난 코다이와 룸메이트 토니. 9년전에 사귀었던 여성을 만나러 산티아고에 다시 왔다는 그의 쿨함은 본받아야 하는 것일까?
 매일매일 다른 콘셉트의 파티가 벌어지는 안데스 호스텔에서 3주만에 다시 만난 코다이와 룸메이트 토니. 9년전에 사귀었던 여성을 만나러 산티아고에 다시 왔다는 그의 쿨함은 본받아야 하는 것일까?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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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주 전에, 얼음의 세계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생명력이 깎여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는 평화롭고 게으른 나날을 보냈다. 일본에서 홀로 여행을 왔다는 코다이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산티아고의 숙소 입구에서 3주 만에 다시 마주친 우리는 마치 엊그저께 만난 친구처럼 먹고 마시며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같은 방을 쓰던 미국인 토니는 어떤가. 한 번 입을 열면 2층 침대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어정쩡한 자세가 아파져 오거나, 갑자기 독한 목감기라도 걸리기 전에는 말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대륙이 아시아라며 연신 반가움을 표현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테라피스트로 일한다는 토니는 남미의 각국에 있는 여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해마다 여행 중이란다. 그의 멈추지 않는 입담 덕분에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는 낯선 대도시의 호스텔에서 하루 종일 깔깔대며 웃는다. 불혹을 코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나이 들지 않을 이 남자 덕분에 차갑고 낯선 공간은 오랜 친구의 기숙사 방같이 따뜻해졌다. 그런 나날들이 익숙해질 때 즈음, 우리는 언제나처럼 도시의 높은 곳에 올랐다.

  걸어서 5분이면 오를 수 있는 산타루치아 언덕은 사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을 상대하기 위한 요새였다.
 걸어서 5분이면 오를 수 있는 산타루치아 언덕은 사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을 상대하기 위한 요새였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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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가사로 익숙한 산타루치아(Santa Lucia)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수호신으로, 산티아고에 있는 산타루치아 언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잘 꾸며진 정원을 지나 바위로 된 언덕을 깎아서 만든 꼭대기에 오르고 보니 산타루치아가 단순한 언덕이 아님을 느꼈다. 알고 보니 산티아고를 세운 스페인 정복자 발디비아가 저항하는 원주민을 막고자 건축한 요새였던 것. 그들에게는 이 요새가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을까.

그리 높지 않은 요새의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은 낯선 도시를 감상하기에 적절했지만, 극 대륙을 제외하고는 지구 상의 모든 대륙을 방문한 나에게는 한없이 부족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하얀 물체를 발견했고 우리는 주저 없이 더 높은 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서는 1년 내내 산티아고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마리아 상과 도시를 둘러싼 안데스 산맥의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서는 1년 내내 산티아고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마리아 상과 도시를 둘러싼 안데스 산맥의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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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언덕의 이름은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동물원과 야외 수영장, 넓은 산책로에 멋진 전망대까지, 산타루치아 언덕보다 훨씬 높게 자리 잡은 아름다운 언덕의 꼭대기에서 빛나던 하얀 물체는 마리아상이었다. 그 끝에 올라 광활하게 펼쳐진 도시와 안데스 산맥을 보고서야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바로 이거야."

바둑판 형태로 잘 짜여 진 도심의 풍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눈에 덮인 안데스 산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나들며 여러 번 지나쳤던 안데스 산맥이지만 그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다.

마치 도시를 지키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그 모습 아래에는 스모그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는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로막았지만, 오히려 이 천혜의 요새 도시를 더 신비롭게 만든다. 동시에 하필 산티아고를 떠나는 날 산크리스토발에 오른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밤에 왔으면 분명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을 텐데. 흘러내리는 땀을 보상하고도 남을 그 풍경을 음미하면서 며칠 전 지독히도 마셔대던 와인이 떠오르는 건 너무 지나친 낭만이었을까? 글쎄, 적어도 칠레에서는 자연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른다.

칠레의 해산물과 와인

소고기와 와인은 무언가 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르헨티나가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해산물과 와인은 어떨까? 국토의 서쪽 경계선을 따라 무려 4300km씩이나 바다가 이어지는 칠레의 주식은 단연 해산물이다.

  단 돈 몇천원이면 원하는 해산물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중앙시장과 태평양 바다를 그대로 담은 칠레표 해물뚝배기 빠일라 마리나
 단 돈 몇천원이면 원하는 해산물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중앙시장과 태평양 바다를 그대로 담은 칠레표 해물뚝배기 빠일라 마리나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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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게 채색된 교회와 옛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구시가지의 뒤쪽에는 산티아고의 중앙시장인 메르카도 센트럴(Mercado Central)이 있다. 칠레의 넘쳐나는 해산물 덕택인지 '시장'이라는 이름과 달리 오로지 해산물만을 판매하는 전통시장에 들어서자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가게마다 한 명씩 뛰어 나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쏘아댄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산티아고에서도 볼 줄이야. 눈에서 온통 광선을 쏘아대는 준과 달리, 탕과 해물 면에서는 전 세계에 한식의 적수가 없다고 믿던 나는 그저 비릿한 생선냄새를 즐길 뿐이었지만, 칠레표 해물탕을 먹고는 벌어지는 입을 멈출 수 없었다.

한국으로 치면 해물뚝배기쯤 되는, 겨우 3500원에 불과한 빠일라 마리나(Paila Marina)는 해삼, 멍게, 새우, 조개, 전북 등 말 그대로 태평양 바다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한국의 것처럼 얼큰한 맛은 없지만, 적당한 비린 맛과 조미료가 전혀 없음이 분명해 보이는 그 풍부한 맛은 한 번 맛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무엇보다 싼 가격에 취한 우리는 전복을 비롯한 갖가지 해산물을 사서 매일 저녁 라면에 넣어 새로운 요리를 시도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산티아고의 물가를 봐서는 전복을 라면에 넣어먹는 사치를 부릴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시작된 식도락은 멈출 줄을 몰랐고, 다음날 우리는 세계 10대 와인 생산국이라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인 콘차이 토로(Concha y Toro)를 방문했다. 창립자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기린 이 와이너리가 생산하는 와인의 이름은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 칠레의 국민 와인이라더니 이름에 '악마'가 들어간다.

  세계10대 와인생산국 칠레의 국민와인,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 훨씬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세계10대 와인생산국 칠레의 국민와인,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 훨씬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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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서야 오렌지 주스만큼이나 흔한 와인 중에서도 '국민'이라는 칭호를 얻은 와인의 이름에 '디아블로'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가 재미있다. 농장주가 거주하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거대한 대저택의 창고에 가득 찬 와인을 훔쳐가는 도둑이 많아지자 주인은 이 창고에 악마가 출몰한다는 소문을 냈다고.

그만큼 맛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에피소드일 테지만, '악마의 창고'라고 이름 붙여진 어두운 저장소의 귀퉁이에서 누군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면 무서울 법도 하다.

  단돈 만원이면 해산물이 가득 들어간 훌륭한 안주와 더불어 와인 한 병을 혼전히 비울 수 있던 그 시절, 우리의 밤은 언제나 와인 잔에 비친 세상처럼 울렁거렸다
 단돈 만원이면 해산물이 가득 들어간 훌륭한 안주와 더불어 와인 한 병을 혼전히 비울 수 있던 그 시절, 우리의 밤은 언제나 와인 잔에 비친 세상처럼 울렁거렸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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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된 시음의 순간. 와인 마니아가 아닌 나는 밸런스나 바디감 같은 전문적으로 와인의 맛을 표현하는 단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지만, 칠레에서는 해산물과 와인이라는 묘한 조합만으로도 충분히 그 맛을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7천 원으로 맛보는 악마의 속삭임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간략여행정보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고 있는 산티아고지만, 아직까지도 와인과 해산물 만큼은 저렴하다. 산티아고의 중앙시장인 메르카도 센트럴(Mercado Central) 에 가득찬 어느 가게에서도 태평양의 풍미를 한껏 느낄 수 있고, 굳이 근교의 와이너리를 방문하지 않아도 동네 슈퍼나 마트 어디에서든 한 병에 5000 ~ 1,0000원이면 훌륭한 칠레 와인을 구할 수 있으니, 산티아고야 말로 주지육림에 빠지기 쉬운 도시다.

산티아고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산 크리스토발(San Christobal) 언덕은 걸어서는 1시간 정도 걸리는 가파른 언덕이지만 입구에서 왕복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언덕 곳곳에 위치한 다양한 테마파크에 들려보는 것도 좋을 법하다.

아래는 그 외에 산티아고에서 방문할 만한 장소들
아라우코 몰(Parque de Arauco) : 서울에서나 볼법한 현대식 대형 쇼핑몰.
도미니코스 공예마을(Los Dominicos Hand-craft village) : 알려지지 않은 칠레 예술가들의 다양한 수공예품을 살 수 있는 곳. 특히 칠레 원주민을 주제로 한 독특한 작품들은 얼마를 지불하든지 갖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 물론 무사히 가져갈 수만 있다면.

좀 더 상세한 산티아고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2259560



#산티아고#칠레와인#콘차이토로#카시에로델디아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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