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사흘. 산티아고가 주는 '주지육림의 휴식'은 4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새벽녘 추위에 하얗게 변한 창에 그리운 이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막 잠에서 깬 준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버스터미널로 나섰다. 힘들다고 죽어갈 때는 언제고 고작 4일 만에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이 힘겨워지다니…. 천상 여행자가 체질인 모양이다.
산티아고의 근처에는 그런 도시에 지친 여행자들의 힘겨움을 덜어줄 만한, 발파라이소(Valparaiso)라는 도시가 있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이 항구도시는 태평양과 접해 있는 남미의 제1무역항으로 칠레의 수출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다. 호스텔에 놓인 관광안내 책자를 읽는 내내 나는 내 고향 부산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부산항을 꼭 닮은 고즈넉한 항구
부산역에 내려 정면을 올려다보면, 산자락 가득히 자리 잡은 집들이 있다. '산복도로'라고 불리는 언덕길 위아래로, 산을 깎아 만든 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높은 곳에 서면 멀리 영도를 비롯한 부산항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파라이소가 딱 그렇다. 내리자마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나는 지나치는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는 적당히 높은 곳에서 내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목욕탕 굴뚝이 아니었으면, 어디로 보나 여기는 부산이다. 조금은 오래된, 부산의 구도심 같은 느낌이랄까.
익숙한 풍경을 담아놓고 있으려니 흐린 날씨 탓인지 조금씩 추위가 몰려왔다. 고작 두 시간 거리에 있던 산티아고는 늘 빛나는 태양과 신선한 공기로 가득 찼지만, 발파라이소의 10월은 유난스레 날씨가 변덕스러운 모양이다.
애초에 계획이 없이 오기는 했지만 조금씩 몸이 차가워졌다. 기온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우리는 추위를 피해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빛나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언덕 위의 파스텔 집들과 멋진 태평양 바다가 최고의 볼거리인 발파라이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외투를 걸친 사람들 틈에서 여름 피서객 차림을 한 채 떨고 있는 게 안타까웠는지, 길을 지나가던 한 노신사가 문득 반갑게 인사를 한다. 짧은 영어를 안타까워하던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그곳으로 가보라고 권하는 듯했다.
우리는 노신사의 말을 따랐다. 번잡한 도로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서 좁은 골목에 '콘셉시온 언덕'(Cerro Concepcion)이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우리는 만들어진 지 100년은 돼 보이는 듯한 등산열차에 올라탔다. 탑승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금방 무너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낡은 선로와 태풍이라도 불면 부서져 나갈 것 같은 등산열차는 노신사의 휴대전화 사진 속에 있던 바로 그곳, 콘셉시온 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을 떠올리게 만드는 콘셉시온 언덕에는 경쟁이라도 하듯 저마다 예쁜 색을 칠한 카페들이 가득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는 벽이라면 어김없이 벽화가들이 무언가를 그려넣었다. 골목마다 화가를 마주칠 것만 같은 언덕, '이렇게 예쁜 집이라면 하루쯤 머물다 가도 괜찮겠다' 생각되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셔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점점 진해지는 것 같은 언덕 위의 풍경을 맴돌던 우리는 마침내 한 화가를 만날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는 내가 다가서자 밑그림을 그리던 연필을 내려놓고 인사를 건넸다. 한눈에 봐도 뛰어난 실력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 그의 그림들은 발파라이소의 풍경을 담아놨다. 내가 정말로 이렇게 멋진 곳에 있나 싶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정확하게 같은 생김새와 같은 색깔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유일한 차이라면 하늘을 가려버린 흐린 날씨일까.
그중에 보고만 있어도 시력이 좋아지는 착각이 들 것 같은 작품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꺼내 들어 화가의 눈치를 봤다.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은 여행 탓에 그림을 보관할 수 없음을 설명한 나는 약간의 돈을 쥐여주며 그의 작품을 카메라에 담았다.
'왜 나는 그림을 배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던 그의 그림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많은 여행자들과 함께하고 있을까. 앞으로도 그의 그림은 긴 시간, 이 고즈넉한 항구와 함께 조금씩 바뀌어 갈 것이다. 춤을 추는 듯 화려한 색감을 뽐내던 그 시원한 풍경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내가 도시를 떠난 뒤에도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그래서 당신의 그림이 이 풍경을 좀 더 오래 붙들었으면.
칠레 제1의 휴양도시라지만, 날씨가 흐리면...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메트로를 타고 칠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도시, 비냐델마르(Vina del Mar)를 찾았다. 무려 4300km나 이어지는 태평양을 가진 나라의 휴양도시라고 하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은 지상의 모든 것을 회색으로 물들여 버렸다.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의 장소가 됐음에 틀림이 없는 꽃시계 역시 그 특유의 빛을 잃었다. 꽃시계 뒤편의 언덕을 따라 줄지은 고급 주택가에는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지만,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해변 산책로는 허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맨살을 드러냈다. 겨울이 지나간 지 한참 됐지만, 날씨의 변덕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든 거리를 몇 발자국 걸어보는 게 전부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소풍날 비 오는 날씨를 마주한 꼬마의 기분이 돼버린 우리는 텅 빈 백사장의 파도를 몇 초간 바라보다 금세 발길을 돌렸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그 길을 무심하게 걷기는 싫었던 것이다. 가는 곳, 하는 것마다 놀이가 됐던 우리 여행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던 곳이 4300km 길이 태평양 바다의 제1휴양지라니…. 이 또한 여행의 재발견이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시장, 토마토에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든 것은 아마도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언덕 위에서 불어오는 묘한 바람냄새를 벗 삼아 빛나는 과일과 와인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텅 빈 바다가 가끔 그립다.
간략여행정보 |
산티아고 근교의 대표적인 여행지인 발파라이소와 비냐델마르는 하루에 두 도시를 모두 둘러보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깝다. 산티아고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발파라이소까지는 두 시간, 발파라이소에서 비냐델마르는 메트로나 시내버스를 타면 수십 분이면 닿을 수 있다. 비냐델마르에서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버스 역시 많기 때문에 다시 발파라이소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세계문화유산도시로 선정되기도 한 발파라이소에 가면 '콘셉시온 언덕'(Cerro Concepcion)으로 가자. 1분 미만의 짧은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에 올라서면 관광객을 위한 카페 골목과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 http://saladinx.blog.me/3015225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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