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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역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에는 우리 민족의 전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역사를 찾아서 '강화나들길'이 갑니다. 저는 강화에 산 지 16년이 되었고 나들길을 걸은 지도 5년이 넘었습니다. 저와 함께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시기 바랍니다. - 기자 말

남녘 꽃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강화도의 꽃들도 수선스럽게 봄 마중을 한다. 빈 산에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진달래도 뒤를 따라 봄나들이를 간다. 강화도는 지금 꽃 잔치가 한창이다.

이런 날에 그냥 집에 있으면 어딘가 손해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럴 때는 그저 들과 산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가볍게 차려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겨우내 누런 빛 일색이던 마당도 어느 결에 초록빛이 비집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부지런한 토끼풀들이 잔디보다 더 일찍 마당을 선점하려고 나서고 있다. 다 같은 초록이건만 토끼풀은 반갑지가 않다.

토끼풀은 이름과는 달리 힘이 세어서 곁에 누구도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토끼풀이 뿌리를 내린 곳에는 다른 풀들이 자라지를 못한다. 잔디밭에 토끼풀이 번졌다 하면 그곳은 그야말로 볼 짱을 다 본 것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니 어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남편은 토끼풀이 성하게 난 곳에 아예 소금을 한 줌씩 뿌려두고는 하는데, 그래도 매번 지는 눈치다. 그깟 소금에 기가 죽을 토끼풀이었다면 애초에 잔디밭에 발을 들이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조고개'에 얽힌 고려의 흔적

 올해는 진달래가 보름 정도 일찍 피었습니다.
올해는 진달래가 보름 정도 일찍 피었습니다. ⓒ 문희일

산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토끼풀들을 뿌리째 뽑기 시작했다. 그러나 뿌리가 딱딱 끊어지는 게 잘 뽑히지도 않는다. 초장에 잡아야 하는데, 이러다 잔디밭이 토끼풀밭이 되는 건 아닐까.

새로 나라를 세운 조선에 멸망한 고려는 어쩌면 토끼풀과 같지 않았을까. 왕씨의 나라를 없애고 이씨 왕조를 세웠건만, 민심은 한동안 구 왕조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조선의 녹(祿)을 먹는 것을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떠난 72현도 있지 않은가.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 충절 있는 선비들은 고려를 추앙하며 끝내 조선을 거부했다.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어찌 두문동에만 있었겠는가. 강화에도 두문동과 같은 곳이 있었다. 새 왕조를 거부하고 옛 왕조에 충절을 다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구신골(舊臣谷)'과 '부조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가 강화읍의 남문밖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의 옛 신하들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새 정부에 벼슬하지 않기로 맹세한 고개라고 해서 부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는 조선을 부정한다는 의미의 부조(不朝)고개였는데 지금은 음만 같은 부조(扶助)고개로 표기하고 있다.

그들이 모여 살았다는 '부조고개'는 강화읍 남산 자락 아래에 있다. 조선을 부정하고 고려를 섬긴 그들의 충성과 지조는 대단하지만 그러나 삶은 어떠했을까. 재빨리 변신을 해서 새 왕조에 충성을 맹약했다면 그들에게는 안락한 삶이 보장이 되었을 텐데 왜 보장받은 그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했을까. 그것은 대대손손 후손에게까지도 신분과 지위의 박탈로 이어지는 길인데도 그들은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와서 몸을 숨겼다. 

 조선을 부정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부조고개'는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을 부정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부조고개'는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 문희일

강화도로 온 고려의 옛 신하들과 그들을 따르는 천여 명의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강화를 핍박하지는 않았을까. 자신들을 거부하고 옛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좋게 봐줬을 리가 있겠는가. 고려의 흔적들 역시 방치를 하고 훼손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를 나타내는 유적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천몇 백 년 전의 시대인 신라의 유물과 유적들은 많이 남아있는데 신라보다 더 후대인 고려의 유적들은 왜 남아 있는 게 얼마 없는 것일까. 고려 궁지를 거닐면서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고려는 분명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님인데 우리는 고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신라의 유물과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고려는 대범하고 호탕한 나라였음이 분명하다. 옛 왕조를 존중해준 그 점만 봐도 고려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고려 자신은 이렇게 후대에까지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고려는 자주적인 나라였다

우리 민족이 살아가는 터전인 한반도를 가리키는 '코리아'라는 단어는 '고려'에서 연유했다. 그것은 유럽의 무대에 우리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바로 고려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는 안정된 경제력과 국방력을 바탕으로 국제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고려 상인은 바다와 육지를 통해 세계를 누볐으며, 송나라와 금나라 또 일본과 아리비아 상인들까지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이처럼 고려는 문호를 활짝 열어 세계를 받아들인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자기중심을 잘 유지하여 우리 것을 잃지 않았던 나라이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자 천 여 명의 사람들이 조선을 부정하며 강화로 와서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고려가 망하자 천 여 명의 사람들이 조선을 부정하며 강화로 와서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 이승숙

고려는 세계의 중심을 고려에 두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대외인식이란 것은 대부분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는 한편으로 고려를 중심에 놓고 이해하는 면도 강했다.

즉 고려의 세계관은 이중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부르며 천자국임을 자청했던 나라였다. 중국의 사신에게도 '사대의 예'로 대접을 했던 것이 아니라 '손님의 예'로써 접대하였던 자주성이 강했던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민족의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은 많이 줄어들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事大)정책을 취했다. 그것은 조선이 취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큰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그렇게 했겠지만, 우리 민족의 기백은 많이 사라졌다. 그 점을 생각하면 조선의 사대정책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고려궁지에서 고려를 생각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떠올렸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였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구려를 따서 고려라고 지었다. 고구려가 어떤 나라이던가. 대륙으로 나아갔던, 기백이 넘쳤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강인하고 웅혼한 기상으로 중국과 대적해서 이겼던 나라였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와 강한 자주성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고구려를 잊고 있다. 고려 역시 잊고 지냈다. 오랫동안 작은 영토 안에서 강대국들에 둘러 싸여 있다 보니 우리는 그만 왜소해졌다. 힘과 자신감이 넘치며 생동감으로 뭉쳐 있는 고구려와 고려를 우리는 잊고 있었다.

 고려궁지로 들어서는 '승평문'입니다.
고려궁지로 들어서는 '승평문'입니다. ⓒ 이승숙

지금 우리나라에 고려를 위한 지분은 없다. 고려는 잊힌 나라이고 역사이다. 고려궁지 역시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몇백 년 동안 내버려져 있었다. 대륙과 해양을 통해 세계 속으로 나아가던 고려의 개방성과 역동성은 지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려를 찾는 길, 통일로 가는 길

고려궁지에서 나와 뒷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이 산은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 중에서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북산'이라고 불리는데 예전 고려 시대에는 개경의 산 이름을 따서 '송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북산의 산마루를 따라 돌로 성(城)을 쌓았다.

그 성곽은 북산의 반대편에 있는 남산으로 이어져서 마침내는 강화읍을 한 바퀴 다 두르고 멈춘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를 해왔던 그 시대에 쌓았던 성이었지만, 무너지고 흩어진 것을 조선 숙종 시대에 다시 쌓은 성이다.

무너진 성을 다시 쌓고 이은 것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 갈라져 버린 우리나라도 하나로 뭉쳐질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잊고 지냈던 고려를 다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잊고 지냈던 고려와 고구려를 되살리면 우리나라는 하나로 뭉칠 수가 있지 않을까.

북산 등성이에서 바라보는 강화의 산과 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누런빛 일색에서 연두색으로 물이 오르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불그레하게 진달래꽃도 피어있다.

 강화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읍과 강 건너 북한의 모습입니다.
강화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읍과 강 건너 북한의 모습입니다. ⓒ 문희일

나무들은 힘차게 물을 빨아올려 생명을 움트게 한다. 땅속 뿌리에서 높다란 가지 끝까지 물이 올라갈 것이다. 물이 돌아야 생명이 움트고 꽃이 피는 것처럼 사람 역시 피가 통해야 운신을 할 수 있다. 막혀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깃들지를 못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막혀 있다. 반만 년의 역사 속에서 보면 백 년도 안 된 세월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막힌 곳을 뚫으면 금방 새 살이 돋고 움이 터서 활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막혀있는 세월이 오래가면 그곳은 곪고 또 썩을 것이다.

북산 산마루에서는 저 멀리 북쪽 땅이 빤히 바라보인다. 모두 말없이 북쪽을 바라본다. 지금은 갈 수 없는 우리의 땅,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가 될 우리나라 우리 땅이다. 북쪽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을 한다.

"우리나라가 다시 살려면 막혀 있는 곳을 뚫어야 해요. 피가 통하면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나잖습니까. 그것처럼 남한과 북한이 서로 왕래를 하면 우리나라가 다시 살아납니다."
"맞아, 서로 왕래를 해야지요. 개성공단도 살리고 금강산 관광도 하고 또 북한에 비료도 보내주고 그러면서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일 거예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게 곧 통일로 가는 길일 겁니다."

 강화 북산에서 우리나라의 평화 통일을 외쳐봅니다.
강화 북산에서 우리나라의 평화 통일을 외쳐봅니다. ⓒ 문희일

남북이 서로 왕래를 하고 동질성을 찾아가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면, 곧 그것이 우리나라가 대륙으로 나아가던 저 먼 고구려 시대를 다시 찾는 길이고 또 우리 민족이 융성해지는 길일 것이라고 모두 한목소리를 말을 한다.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 또한 높아진다. 북녘 산하를 바라보며 통일을 꿈꾸니 가슴이 저절로 뛰어오르나 보다.

강화읍 북산에서는 때 아니게 통일의 꽃이 피었다. 산기슭에서는 진달래가 분홍빛으로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아직은 바람이 순하지 않은 4월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통일과 평화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산마루에 서서 강화 읍내를 둘러보았다. 우리나라에 고려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화에 고려가 있었다. 잊고 지냈던 고려를 찾는 길이 바로 통일로 가는 길이었다. 통일의 길은 고려를 찾는대서 부터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북산을 내려 왔다. 


#강화도#고려궁지#고려#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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