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산백두산! 예로부터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조종산(祖宗山)으로 일컬어져 왔다. 조종산이란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산을 말한다. 나는 백두산을 세 번 올랐다. 세 번 모두 가는 길도 달랐고, 매번 맑은 날씨로 백두산 상봉과 천지 일대를 굽어볼 수 있었다. 내가 세 번이나 모두 맑은 날씨로 천지를 보았다고 하자, 한 안내인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했다. 그 까닭은 백두산 일대 기후가 악천후이기 때문이다.
백두산 기후에 관한 통계를 보면 연 평균 기온이 영하 7.3도, 적설일수 258일, 연 강우일수 209일, 연 강수량 1340mm, 연 강설량 320mm, 강설일수 145일, 안개일수 267.1일, 폭풍일수 272일이라고 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백두산에 첫 눈이 내린 날은 8월 20일이고, 마지막 눈이 내린 날이 6월 24일이라고 한다(연변대학출판사 '연변관광자원과 리용').
예로부터 백두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천경계를 잘 구경하기 위하여 미리 목욕재계하고 산신에게 제사까지 지냈다고 했다. 솔직히 수륙만리 예까지 찾아와 허무한 운무만 보고 떠난다면 얼마나 허망하랴.
첫 번째 등반나의 첫 번째 백두산 등반은 1999년 8월 6일에 이루어졌다. 그날 이른 아침 옌지(연길)를 출발하여, 용정의 서전서숙과 어랑촌, 천수평, 청산리 등 항일전적지를 둘러보고, 곧장 백두산으로 갔다.
백두산의 지형 특징은 경사가 매우 완만한 점이다. 천지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부터 백두산이 시작된 듯, 거기서부터 서서히 오르막길이었다. 그날 차를 타고 간 탓인지 높은 산을 오르는 기분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경사가 완만했다.
수목 한계선인 정상 직전은 가스래나무가 땅 위를 기듯이 삼림군락을 이뤘다. 고산에다 모진 비바람과 많은 눈 때문일까, 원래 나무의 태생이 그럴까, 아무튼 처음 보는 기묘한 장관이었다.
마침내 '장백산'(長白山: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함)이란 요란한 현판이 달린 누각을 지나자 백두산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백두산은 명산답게 예로부터 불함산·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노백산 등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건국 이후부터 '백두산'으로 통용되고 있음이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백두산 정상은 일 년 중 두 세 달을 빼놓고는 눈에 덮여 있을 뿐 아니라 2500미터 이상의 산등성이 일대는 바람이 하도 세차 나무 한 그루도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정상 일대는 바위와 흙도 백색의 화산암이다. 그래서 산봉우리가 마치 머리가 하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여, '백두(白頭)'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나는 그날 오후 3시, 마침내 백두산 천문봉에 올랐다. 눈 아래 펼쳐지는 천지(天池)! 천지는 온통 쪽빛이었다. 그 천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40여개 봉우리들. 장군봉(일명 백두봉·병사봉)·천문봉·관면봉·천활봉·백암봉·용문봉·자하봉·백운봉·지반봉·옥주봉…. 수많은 멧부리와 천지가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 조물주가 빚은 최대 걸작이었다.
독립군의 요새백두산 일대는 구한말 이래 항일전적지로, 독립군 전사들의 피눈물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일찍이 구한말 백두산 포수 홍범도의병대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까지 숱한 항일 전사들이 일제 침략자들과 맞서 싸운 해방 공간이었다.
이 일대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울창한 삼림으로 유격 전술을 펼 수 있는 여건이 좋았고, 또한 이 부근에는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기에 그들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대 산악은 개마고원, 낭림산맥으로 이어져 무장투쟁 범위를 국내로 확산하는데 아주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백두산은 항일 전사의 보금자리로, 일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위 하나에도 그분들의 피 어린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는 항일 유적지다. 나는 하산 길에 백두산 폭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비룡폭포(중국에서는 장백폭포라 함)를 벅찬 마음으로 바라본 뒤 하산했다. 정말 두고 떠나기에 너무나 아쉬운 장엄한 산하였다.
두 번째 등반나의 두 번째 백두산 등반은 2004년 5월 31일이었다. 나는 그때 안동문화방송 다큐 '혁신 유림' 프로의 코디 역을 맡았다. 애초 방송 팀의 여정은 길림성 삼원포 일대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뒤 다시 선양으로 가서 항공편으로 연길에 가기로 된 것을, 나의 제의로 거기서 육로로 백산, 무송을 거쳐 백두산 가는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1920년 경신참변 이후 우리 독립군들이 그 길로 이동하였기에 때문이다.
우리 답사단 일행은 5월 30일 백산 빈관에서 묵은 뒤, 다음날 아침 승합차로 백두산을 향했다.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도 그랬지만, 백산에서 백두산 오르는 길도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에 정우현(靖宇縣)이 나왔다. 동북항일연군의 양정우 장군 이름을 붙인 도시였다. 백두산 가는 길은 차량도 뜸한 온통 자작나무 숲길이었다. 산에서 고사리를 뜯는 남매가 보여 차를 세우고 해맑은 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날 오후 2시,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 무송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백두산으로 달렸다. 거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였다. 백두산이 가까울수록 길은 이만저만 험하지 않았다. 이런 멀고도 험한 길에 우리 독립전사들을 군장을 메고 한 달여 도보로 이동했다. 그때의 기록에 따르면, 독립전사들은 날이 저물면 아무 숲 속에서나 자고, 비상식량이 떨어지면 풀뿌리를 캐 먹으면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행군이었다.
지도상 애초에 서너 시간이면 넉넉히 백두산에 닿으리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게다가 그날 늦은 오후부터는 비까지 내린 탓으로 길이 곤죽이 되어 승합차가 지그재그로 달리기에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노면의 요철이 매우 심해 엉덩이가 아팠다. 무송을 출발한 뒤 계속 쉬지 않고 달려도 백두산(장백산) 어귀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아 애간장이 탔다.
애초 예상의 배나 된 8시간을 승합차로 달린 끝에 그날 초저녁,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장백산 어귀에 이르렀다. 백산에서 백두산까지 생각보다 먼 길이었지만, 숲의 바다를 헤쳐 온 듯 새로운 비경을 맛보았던 장엄한 여로(旅路)였다.
이튿날(2004. 5. 31) 백두산 일대는 온 누리가 흰 은세계로 눈이 소복이 쌓였다. 오전 8시, 백두산 정상을 오르고자 매표소로 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간밤에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에 눈이 한 자 이상 내려 한창 제설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이 끝나야 오를 수 있다고 하여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백두산을 오르는 전용 지프차에 오를 수 있었다. 오전 10시 20, 마침내 백두산 천문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 일대는 그때까지 눈이 녹지 않았다. 뒤돌아 만주 벌판을 바라보자 일망무제, 아! 천하는 이렇게 장엄한가?
세 번째 등반세 번째 백두산 등반은 2005년 7월 23일이었다. 나는 '2005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문학작가대회'에 참가하여 세 번째 백두산을 오르게 되었다. 대회 사흘째 날(7. 22.)은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비행기로 삼지연으로 간 뒤, 배개봉 호텔에 묵었고, 이튿날(7. 23.) 새벽 백두산에 올랐다. 내 조국 산하를 밟으면서 백두산에 오르자 가슴이 더욱 벅찼다.
2005년 7월 23일 새벽 5시 5분, 마침내 백두산 장군봉 일대에 두꺼운 검은 구름 장막을 헤치고 시뻘건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이 순간 백두산 상봉에서 해돋이를 기다리던 200여 남북 및 해외동포 작가들이 서로 얼싸안고 "조국통일만세"를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본 뒤 천지의 아침을 카메라에 담고자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때 소설가 남정현 선생(대표작 '분지')은 몸이 불편하여 행사장에는 참석치 못하고 차 안에 계셨다. 예까지 와서 백두산 상봉과 천지를 직접 보지도 못하고 하산한다면 두고두고 얼마나 섭섭하실까?
나는 마침 해가 오른 뒤라 기온도 조금 오르고, 바람도 한결 잦아졌기에 남 선생님을 부축하여 밖으로 모시자 선생은 활짝 웃으시며 어린이와 같은 표정으로 '조국통일 만세!'를 부르셨다. 나는 천지를 배경으로 선생의 만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정현 선생님은 몸이 불편하여 일어서지 못하시고 그냥 주저앉은 채 백두산 상봉과 천지의 장관을 굽어보며 느꺼운 마음으로 줄곧 "조국통일 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