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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온 이 기사는 이번 20회로 마무리합니다. 미처 못다 한 이야기는 추후 일반 기사로 쓰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 기자의 말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 눈빛출판사 제공

일제 권력의 상징 '조선총독부'

연전에 구한말 의병사(義兵史)의 대가이신 박민영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을 독립기념관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나는 그분에게 의병사에 대한 이런저런 자문을 받았다. 자문이 끝나자 그분은 특별히 나를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가 전시된 공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철거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자재로 전시공원을 조성한 곳이다. 이 공원에는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뾰족탑과 기둥의 상부, 정초석 등 총독부 건물 철거 부재들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안에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 부재 기념공원 안의 조선총독부 뾰족탑
독립기념관 안에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 부재 기념공원 안의 조선총독부 뾰족탑 ⓒ 박도

나는 박민영 선임 연구워원 안내로 이 건물 철거 부재들을 보면서, 사람 팔자만 아니라 '건물 팔자도 알 수 없다'는 세월 무상, 영고성쇠의 세상 진리를 새삼 터득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는 천년만년 조선을 통치하고자 새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기획했다. 사실 신축된 조선총독부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 설계한 이는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Georg de Lalande)로 1912년부터 청사의 설계에 착수하여 1914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기초 설계를 마쳤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마무리 완성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중앙청(기자가 NARA에서 찾은 사진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중앙청(기자가 NARA에서 찾은 사진이다). ⓒ NARA, 눈빛출판사

10년 만에 짓다

공사 시공은 1916년 6월 25일 지신(地神)에게 공사의 안전과 건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인 지진제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 7월 10일에는 정초식을, 1923년 5월 17일에 상량식을 가졌다. 일제는 공사 시공 10년 만인 1926년 1월 4일에 건물을 완공하여 시용식을, 같은 해 10월 1일 건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을 가졌다.

조선총독부는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층과 지상 4층을 올린 총건평 9,600여 평의 건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기둥 사이의 벽을 채우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한 위에 돔 모양의 중앙탑옥을 얹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식민지 지배기구로서 권위를 강조하였다. 총독부 청사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하지 미 조선점령군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하지 미 조선점령군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1945. 9. 9.). ⓒ NARA, 눈빛출판사

1926년 10월 1일 낙성식과 함께 조선총독부로 사용된 이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에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군 군단장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과 제9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1945. 9. 9. 오후 조선총독부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있다.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1945. 9. 9. 오후 조선총독부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미 군정은 이 청사는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렀고, '중앙청'이라는 이름은 정인보 선생이 캐피탈 홀을 번역하여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를 열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팔자 사나운 조선총독부 건물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퇴각하면서 방화하여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1950년 9월 26일에 중앙청은 유엔군이 다시 탈환하여 9월 29일  이곳 중앙홀에서 서울 수복식을 가졌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86년 8월 21일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8월 15일에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뾰족탑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 1996년 11월 13일에 총독부 청사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다.

 왼쪽은 싸구려 여인숙으로 변한 하얼빈 옛 일본총영사관. 오른쪽은 하얼빈 시 화원소학교로 변한 옛 일본총영사관.
왼쪽은 싸구려 여인숙으로 변한 하얼빈 옛 일본총영사관. 오른쪽은 하얼빈 시 화원소학교로 변한 옛 일본총영사관. ⓒ 박도

조선총독의 권위의 상징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그 잔해만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서 볼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은 "영원한 것은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일제가 500년 조선의 맥을 끊고자 악랄하게도 하필이면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세운 천 년을 꿈꾸며 세운 건물도 불과 70년 만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조선총독부 건물만이 아니었다. 내가 국내외 역사 현장을 둘러본 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은 일제 패망 후 한때는 싸구려 여인숙이 되었다가 지금은 화원소학교로 변해 있었다. 내 고향 구미시 오태동의 장택상 전 국무총리 사저는 한동안 영남 제일의 갑부로 그 위세를 떨치다가 집안이 몰락하자 한때는 절로, 이즈음에는 한식집으로 변했다는 소문이다.

사람의 팔자도 굴곡이 심하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에서 주인 안쇼는 어느 날 버려진 아이 히스클리프를 주어다가 길렀다. 그 아이가 후일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와 자기를 학대한 주인 아들 힌들리를 타락시키고, 주인 딸 캐서린의 시누이와 결혼하는 등, 안쇼가를 파멸시킨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이 사형수가 된 것도 모든 국민이 지켜보았다. 긴 역사로 볼 때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도, 건물도 영원한 것은 없다. 나라도 지도자도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우러러고 백성을 사랑하다)하는 자만이 그래도 오래갈 수 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영남 제일 갑부 장택상 본가의 행랑채. 한때 절이 되었다가 한식집으로 되었다고 한다.
영남 제일 갑부 장택상 본가의 행랑채. 한때 절이 되었다가 한식집으로 되었다고 한다. ⓒ 박도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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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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