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많은 애환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도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 시절로 돌아간다. 가까운 지난날의 추억보다도 아주 오래된 추억일수록 더욱 찡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도 출퇴근길에 최고의 교통지옥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내 젊은 날의 초상이었던 한세대 반을 훌쩍 넘긴 60년대, 군사문화의 독제개발시대 때에 일이다. 10살에 6.25 전쟁을 겪고 자유당정권하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3에 4월 혁명에 참여했다.
그리고 대학입학 5.16군사정변으로 그만 징병 기피자가 되어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어서 제대 5개월 남기고 65년초, 전쟁과 평화에 관심과 호기심에 다가가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하였다. 한국군 최초 해외파견자 비둘기부대의 일원으로 디안에서 주둔했다.
이어 계속된 한국군 베트남 파병은 그해 8, 9월에 맹호와 청룡이 파견되고 다음해에 백마부대까지 무려 5만 명의 주둔군이 미국의 용병이 되었다. 맹호와 청룡은 무리한 베트콩소탕작전 1년 만에 3500명이 전사해, 그들의 영혼 미사를 드리며 13개월 만에 귀국했다.
전쟁은 참으로 무모하고 아까운 생명을 앗아갔다. 귀국 후에 6월6일 현충일 날 내 전우가 잠들고 있는 국립묘지를 찾았다. 전우 묘 앞에는 전우 어머니와 쌍둥이 형제가 나란히 흐느끼고 있었다. "저만 살아 귀국해 죄송합니다." 사죄했지만 자식 잃은 슬픔이 가실까.
그해 나는 10월에 동숭동 서울대교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때는 3선 개헌파동으로 대학로에는 데모가 계속되었다. 개헌반대와 독재타도, 민주를 내걸고 마로니에와 법대 은행나무 아래에는 정의의 종을 울린다. 개헌반대 투쟁은 각 대학은 물론 전국으로 번져갔었다.
나는 교직원으로 교정의 성토대회와 거리로 진출한 학생들에 대한 역할을 다해야 했다. 학생이 경찰에 붙잡혀 가고 얻어터지고 장기집권으로 가는 독재의 정치는 계속되었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젊은 새내기 학생들의 올곧은 정의와 민주 주장은 당연했다.
나는 초기에는 홍릉종점에서 단칸방에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 학교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어 부득이 변두리에라도 방 두 칸을 마련하느라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격으로 당시 브라질 촌으로 불린 상계동 옆 중계동에 입주권을 구해 신혼살림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의 동쪽 변두리로 교통사정이 최악이었다. 시간도 1시간 이상 소요되고 버스가 자주 오지 않아 콩나물시루처럼 버스는 대만원이었다. 그것도 제 시간에 타지 못하면 필경 지각을 하고 만다. 시간을 당기고 미리미리 한 시간여를 할애해야 했다.
그런 교통지옥을 나는 막내 동생과 계속해야 했다. 출근 때도 어느 때는 버스가 기다리는 정류장에 서지도 않고 무사통과다. 그러기에 종점이 서너 정거장인 곳까지 걸어가서 타야 출근시간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돈이 있었다면 동숭동 쪽에 방 얻어 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학생들과 씨름하고 퇴근할 무렵이면 또한 종로 5가에 서야할 버스가 무사통과다. 이러면 할 수 없이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겨우 앉아갈 수가 있어 그리했었다. 언제나 최악의 교통체증이 풀리고 출퇴근이 편해질 수 있을까가 바람이었다.
그런데 교통사고도 빈번했다. 버스들이 정원 45명의 3배인 120명이나 태우느라 차를 좌우로 흔들면, 차체는 곧 넘어질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었다. 땀을 흘리며 출퇴근 하는 날들이 고역이었다. 언제나 이런 교통지옥을 면할 수 있을까? 소망이었다.
드디어 집 앞 정류장에서 앞차가 그 많은 승차인원을 태우고 좌우로 흔들다가 결국 하천가로 굴렀다. 차안에서 비명과 아우성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아찔했다. 내가 무리해서 그 차에 승차했더라면, 어찌했나. 중상이 30명 경상이 50명이나 대형 사고였다.
그래도 서울시는 배차간격도 버스도 증차하지 않았다. 나는 하천부지에 방 둘에 부엌이 달리고 장독과 꽃밭도 있는 20평의 아담한 신혼살림에 그런대로 살고 있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어느 때는 분명 나은 생활이 올 것이라 믿었다.
어쩌다 자주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아직 다리도 없어 허벅지까지 걷고 개천을 건너야 했다. 여러 차례 허술한 부엌구조에다 시멘트 불럭건물이기에 연탄사고가 세 번이나 났었다. 하마터면 연탄가스에 일가족이 목숨을 잃을 뻔도 했었다. 그때의 삶은 그리도 고단했었다.
허지만 출퇴근과 하천건너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모님 모시고 동생도 학교에 보내면서 아들을 둘이나 낳아 오붓한 가정이었다. 태릉 서울공대로 서울대 이전이 백지화 되면서 나는 봉천동 낙성대로 주거를 이전했다. 걸어서 30분을 숲속의 산소를 마시며 출근했다.
사노라면 보다 나은 삶이 오고 만다는 만고에 진리같은 꿈을 꾸면서 살아왔던 시절, 서울 최악의 교통체증의 출퇴근이 이제는 재현할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지난주에는 상계동 불암 산자락 청학동의 동창 집에 가는 상계동과 중계동의 교통편이 최상이었다.
이번 출퇴근길의 추억을 살리면서 과연 한세대 반이 흘러간 오늘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아주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에 때어난 2세들이, 불혹의 나이에 들어 손주들이 셋이나 태어났다. 그들은 초등 중등학교를 집주변에 가까이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손주들에게는 할배가 겪었던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지도 못하고 있다. 젊은 날의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이라는 게 꼭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다하는 생각을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있고 참고 인내하는 자만이 성공한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끝으로 세월호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에게 부디 영면을 빈다. 나라는 '안보 불감증'만이 아닌, 생명에 대한 '안전 불감증'에도 보다 더 배려를 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출퇴길의 추억' 공모글입니다.
한세대 반의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 다시 오래된 추억을 살리는 순간, 마음이 기뻤다. 누구에게나 있는 추억들, 그러나 나만이 귀히게 간직한 추억의 글쓰기다. 앞으로도 내 젊은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찾는 순간들이 많았으면 한다. 오마이뉴스에 감사하면서 자주 글쓰기에 접근하련다. 앞으로도 추억 살리기 글들을 자주 쓰고 싶다. 나를 돌아보는 아주 중요한 글쓰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을 올리지 못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