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은 보았네. 작은 장미/ 들에 핀 장미/ 갓 피어 아침처럼 고왔네./ 소년은 얼른 달려갔네, 가까이 보려고/ 큰 기쁨으로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소년이 말했네, 난 널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 장미가 말했네. 난 널 찌를 테야./ 네가 나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그리고 참고만 있지는 않겠어./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그 거친 소년이 꺾었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저항하며 찔렀네./ 비명도 신음도 소용없었네./ 참을 수밖에 없었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들장미>라는 시다. 아름답다 못해 애절하다. 왜 소년은 결국 장미를 꺾고야 말았단 말이냐. 그냥 두고 보면 아름다울 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향기로웠을 것을. 결국 장미는 가시로 소년을 찌르고 말았다. 그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시는 하인리히 베르너(Heinrich Werner, 1800-1833)가 곡을 붙여(슈베르트도 곡을 썼으나 베르너의 것이 더 애창됨) <
거친 벌판 위의 작은 장미, Heidenröslein>라는 원제를 살려 세상에 내놓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괴테는 21살 때 18살 소녀 그리데리케 브리온(Friederike Brin)을 사랑했다. 그러나 10개월 간 사랑했던 그녀를 버렸다. 괴테는 그 때의 충격으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 시는 괴테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들이 사랑한 장미
잘 알다시피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26년 가을 릴케는 한 이집트 소녀에게 장미를 선물하기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장미가시에 찔렸고 후에 상처가 덧나며 파상풍으로 죽게 된다. 릴케는 백혈병을 앓고 있던 터라 장미가시가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릴케의 유서에 담긴 묘비명은 장미와 그의 운명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치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죽은 시인이라고 알려지기를 바랐던 것처럼. 실은 이 묘비명 때문에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죽었다고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장미여, 오오 순순한 모습이여! 이렇게도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아무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내 출퇴근길의 추억을 이야기하려면 장미 이야기를 안 하고는 안 되기 때문에 장황하게 시인들의 장미, 그것도 애절하고 아픈 장미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애절한 장미는 그때 출퇴근길에 눈 시뻘겋게 뜨고 나의 추락과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7년 전이다. 그해 이맘때, 내가 오고가는 출퇴근길에는 장미가 흐드러졌다. 그것도 넝쿨장미가.
장미,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답다', '향기롭다', '사랑하고프다', '향수' 등 온갖 아름다운 단어들만 떠오를 것이다. 물론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니다. 가시를 가리기에 충분한, 너무나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장미가 아름다운 건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장미는 내 가슴속의 응어리의 내비침, 그것이었다. 장미의 선홍빛 빨강색을 대할 때마다 가슴에 멍 하나 더 적어 넣는다. 그것도 출퇴근길에 날마다 보았으니 어떠했겠는가. 지금도 장미는 내게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아직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한다.
취직과 함께 시작된 장미와의 악연
지금 난 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그 전에도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여를 목회할 수 없었다. 오해와 불신의 늪을 헤매다 내가 목사직을 사임하는 게 교회의 평안을 위한 최선책이라 생각 들어 교회에 사표를 덜컹 던졌다. 이때 이후 주유소에 취직을 하면서 나와 장미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7년 전 이야기다. 당시 아이들 둘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교육비가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데 50대 초반인 목회만 하던 목사가 할 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온갖 직업정보지들을 섭렵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사람 찾는 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냥 퇴짜만 맞았다. 찬밥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퇴짜 맞기를 밥 먹듯 하고 있던 어느 날 동네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하는데 주유소 벽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주유원 구함, 초보자도 환영"'오, 할렐루야!' 속으로 이렇게 쾌재를 부르고, 즉각 사장과 면담을 했고, 즉석에서 취직이 결정되었다. 날듯이 기뻤다. 그러나 사장이 제시한 월급은 80만 원. 기가 찾다. 그것으론 아이들 교육비는 어림도 없고 헌금, 아파트관리비, 공과금, 4식구가 세끼 밥을 먹기도 빠듯하다. 그러나 어쩌랴. 그때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그때 썼던 글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상에 소설 같은 일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다니. 소설 속의 비련의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책표지를 뚫고 내 가족 속으로 들어왔다. 9년간 목회하던 공동체가 이리 불신의 소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의심의 그늘을 늪처럼 드릴 수 있는 곳인지 미처 몰랐다. 싸매는 포대기인 줄 알았는데, 헤집는 쇠스랑인 걸. 장미향 가득한 꽃인 줄 알았는데, 가지에 즐비하게 붙은 가시인 것을.
사장은 '내일 출근할 때 주민등록초본을 떼 가지고 오세요'라는 말을 한 것으로 취직시험을 끝냈다. 허! 그리고 난 다음날 아침, 사장과 약속한 시간인 7시에 맞추기 위해 6시 40분에 출근길에 올랐다.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기에. 그렇게 첫 출근이 시작되고 주유소 안에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다 겪으면서 인생의 쓴맛을 느꼈던 1년, 내 출근길엔 대부분 장미가 있었다.
지금도 교회 담장을 타고 오르는 빨간 장미를 보면, 그때 출퇴근길에 흐드러지던 넝쿨장미가 생각난다. 대지를 덮은 눈이 녹으며 민들레가 노란 얼굴을 빼꼼 얼굴을 내밀던 풍경, 초봄 대지가 녹으며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풍경, 아파트 담장너머로 장미가 새순이 나오더니 이파리라는 새끼들을 수도 없이 치던 풍경, 곧 빨간 꽃으로 울타리를 장식하며 자신의 열정 가득한 가슴을 열어보이던 풍경, 그 꽃잎을 지르밟으며 출퇴근을 하던 일, 이젠 옛일이지만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 한 구석에 찬기가 돈다.
장미는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4개월간 아무것도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원까지 들락거리던 내가 버젓한(?) 직장을 얻었는데 그곳이 주유소였다. 임시로 기거하던 아파트(교회를 사임했으니 사택으로 쓰던 집은 조만간 내줘야 했다)와 주유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실은 부러 그런 곳을 직장으로 잡은 것이었다. 차까지 몰고 다닌다면 무슨 수입이 되겠는가.
그때 출퇴근길엔 아파트 울타리에 매달려 몸을 비틀고 올라온 장미가지가 끝마다 빨강 꽃잎을 주렁주렁 달고 뽐내고 있었다. 그 선명함이 볼수록 야물었다. 장미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그때 내게 장미는 그런 장미였다. 장미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실만이 다는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오고, 문학이 나오고, 인생이 나온다.
목사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임시로 주유소에 출근하며 한 달에 80만 원을 벌어 고작 식구들 끼니를 해결한다. 교회는 몇 달도 안 돼 새 목사를 모신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성화다. 정말 갈 곳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집은 전세든 월세든 내 집이든 있다. 그 나이쯤 되면.
그러나 목사는 교회가 내주는 사택이란 데서 산다. 그 집도 비워달란다. 돈도 없다(대형교회 목사들의 이야기만 듣던 사람들은 목사가 왜 돈이 없냐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최저생계비도 못 받고 사역한다. 대책이 없다. 앞이 전혀 안 보인다. 그때로선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희망도 전혀 없었다(지금은 다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그런데 하루하루를 위해 주유소로 출퇴근한다. 그 길에 즐비하게 핀 장미가 장미로 보이겠는가.
아침마다 출근길에서, 저녁마다 퇴근길에서, 장미는 나를 약 올렸다. '나 참 곱지?', '나 참 향기롭지?', 심지어 떨어진 꽃잎도 사람들의 발밑에서 소리 지른다. '나처럼 아름답게 죽는 꽃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 말이 맞다. 다른 꽃은 시들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는지 의심될 정도로 추하다. 그런데 장미꽃은 떨어져 땅에 구르면서도 아름답다. 그땐 그 아름다움이 얄밉도록 미웠다.
낯선 직장 주유소에선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단말기를 제대로 못 긁어 손님에게 호된 야단을 맞는 놈, 주유하고 주는 선물(화장지, 물티슈 등)을 많이 안 준다고 욕하면 욕먹는 놈, 휘발유 차에 경유 넣고 왕창 수리비 물어주는 놈, 기름기 때문에 갈라진 신발바닥을 본드로 붙이고 앉아있는 놈, 자기 차에 기름 빨리 안 넣어준다고 핏대부리는 손님에게 비위 맞추는 놈, 집에 돌아와 검게 탄 얼굴과 팔에 연고 바르는 놈, ……. 난 그런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출퇴근길의 장미는 검붉게 내 안에서 멍드는 피멍울일 뿐이었다.
지금은 교회 담장을 타고 핀 장미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괴테의 <들장미>란 시도 잘 보인다. 베르너의 <거친 벌판 위의 작은 장미, Heidenröslein>도 잘 들린다. 사랑과 평화의 <장미 한 송이>도 지금은 잘 들린다. 힘차게 따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클레오파트라의 장미 사랑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나의 출퇴근 이야기는 배부른 소린지도 모른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일용직 근로자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삶이 고단한 분들의 출퇴근길이 있을 터. 그분들에게 요즘 흐드러진 장미가 정말 장미로 보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프다. 내가 그랬다면 그분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세기의 미인 클레오파트라와 장미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녀는 장미 향수, 장미 목욕 등을 생활 속에서 실현했다고 한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만날 때 수많은 장미 잎으로 장식했다. 장미의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를 추억하면서 자신을 생각하도록 하는 일종의 연애 마케팅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참석하는 연회 때에는 당시 금액으로 1타랑(현재 미화로 1만3000달러)을 들여 마룻바닥에 약 1m 높이의 장미를 깔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장미를 뿌려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와 안토니우스의 열애를 기념하기 위해 터키 수리아 안디옥, 다소(Tarsus)에 '클레오파트라의 문(Cleopatra's Gate)'이 세워져 있다.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의 사랑에 장미가 지대한 매개 역을 했다는 역사는 참으로 흥미롭다.
바울사도의 고향인 다소에 갔을 때 '클레오파트라 문'을 관람하며 그녀의 장미와 나의 장미는 너무도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덧붙이는 글 | [공모] <출퇴근길의 추억> 한 때 버거웠던 시절의 경험입니다. 지금은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열심으로 성도들과 행복하게 사역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지금의 삶이 힘드신 분들이 계시다면 용기 잃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