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 반 사이, 광해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 사극이 세 편이나 나왔다. 2012년 9월에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가짜 광해군이 주인공으로 나왔고, 2013년 7월에는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광해군이 여성 도자기공의 파트너로 나왔다. 또 지난 11월부터는 관상을 소재로 광해군 시대를 다룬 KBS 드라마 <왕의 얼굴>이 방영되고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광해군의 성격이 명확히 묘사되지 않았다. 이 영화에 주로 나온 것은 가짜 광해군이었다. 이에 비해 <불의 여신 정이>의 광해군(배우 이상윤 연기)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원만했다. <왕의 얼굴>의 광해군(서인국 분)도 비교적 정이 많고 원만한 편이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좀 불투명했지만, 두 편의 드라마에서는 광해군의 성격이 다정다감하고 원만하게 묘사되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모습은 광해군의 실제 성격과는 좀 다르다.
물론 '광해군의 성격은 정확히 이러이러했다'고 역사 기록에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해군의 성격을 추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이 자기의 성격을 꼭 집어서 말해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A). 평소 언행이나 인생사 혹은 건강 같은 것을 토대로 그 사람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B). 우리가 주변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법은 A보다는 주로 B에 가까울 것이다.
광해군도 그런 접근법이 가능하다. 기록에 나타난 광해군의 언행이나 인생사 혹은 건강 문제를 통해 광해군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광해군의 성격에 접근하다 보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광해군의 성격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차남 콤플렉스에 시달린 광해군, 형을 죽이다광해군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는 그가 서자 출신인 동시에 비(非)장남이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은 적자나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 때문에 능력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광해군은 어려서부터 유능했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에게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 만약 임진왜란이라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아버지가 거의 전적으로 능력만을 근거로 그를 세자에 책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면, 이로 인한 콤플렉스가 광해군의 성격 속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존경 받을 만한 군주였지만, 그 역시 콤플렉스로 인한 성격상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원만한 성격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광해군은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점은 그가 자신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준 사람들에게 공격을 가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광해군의 친형이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은 차남인 광해군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주었다. 두 사람은 동복형제였지만, 장남인 임해군의 존재는 광해군의 앞날에 먹구름이 되었다. 일반 가정과 달리 왕실에서는, 아버지를 승계하지 못한 차남은 죽은 듯이 지내든가 아니면 실제로 죽어야 했다. 임해군이 왕이 될 경우, 광해군은 능력을 삭히면서 살든가 아니면 죽든가 해야 했다.
선조의 정실부인이자 광해군의 젊은 새엄마인 인목왕후(인목대비)는 후궁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주었다. 인목왕후의 등장은 적장자 탄생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것은 광해군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은 서자인 광해군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주었다.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선조는 세자를 교체할 징후까지 보였다. 만약 영창대군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선조가 살았다면 선조의 후계자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광해군은 왕이 된 뒤 위의 세 사람에게 공격을 가했다. 1608년에 등극한 그는 1609년에는 임해군이 죽도록 만들었고, 1614년에는 영창대군이 죽도록 만들었으며, 1618년에는 인목왕후(당시엔 대비)를 지금의 덕수궁인 서궁에 유폐시켰다.
물론 임해군·영창대군·인목왕후를 그렇게 만든 표면적인 장본인들은 광해군의 측근들이었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광해군에게 있었으므로, 광해군이 끝까지 저지했다면 세 사람이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원래의 세자였던 큰형(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왕이 된 뒤 큰형을 적극 보호해준 세종 임금의 사례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임해군·영창대군·인목왕후에 대한 광해군의 조치 속에는 광해군의 진심이 어느 정도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적장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그가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런 콤플렉스가 광해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요소는 그의 건강이다. 건강은 한 인간의 이력서 같은 것이다. 건강에는 성격과 인생사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의 건강을 살펴본다면, 그의 성격에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평생 화증·울열증 시달린 광해군
평생 동안 광해군을 괴롭힌 질병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화증(火症, 화를 잘 내는 증세), 울열증(속이 답답한 증세), 안질 등이다.
광해군 2년 4월 23일자(양력 1610년 6월 14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과의 대화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열이 많아 화증과 울열증을 앓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 광해군 10년 윤4월 22일자(1618년 6월 14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내의원 의사들과의 대화에서 '오랫동안 안질을 앓았지만, 효과적인 처방을 받지 못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화증·울열증·안질,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체내의 열이다. 몸 안에 열이 많으면 화증이나 울열증이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도 영향을 미쳐 안질이 생길 수도 있다. 몸 안에 열이 많은 광해군이 안질까지 겪었다는 것은, 그의 체내에 있는 열이 눈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체내의 열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화도 잘 내고 안질까지 겪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콤플렉스가 몸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가 드라마 속의 모습과 달리 다정다감하거나 원만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차별을 받아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몸 안의 열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화도 잘 냈다면, 성격상의 결함이 주변 사람들의 눈에 포착됐으리라고 판단하는 게 경험법칙에 부합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안질까지 겪었다면, 남들에게 편안한 인상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콤플렉스가 있거나 화증·울열증이 있더라도, 이런 것이 성격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신수양을 통해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은, 광해군이 학문을 게을리 하는 편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의 대표적 학문인 성리학은 지적 탐구 못지않게 인격 수양을 중시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다른 임금들에 비해 성리학 공부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임금이 된 뒤에 한동안 문제가 됐던 것은 그가 경연이란 학술 세미나를 제대로 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군주의 학문적 수양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건강 문제 때문에 경연을 제대로 열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문적 열정이 부족했던 측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몸이 허약하다고 해서 학문을 열심히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광해군이 학문적 수양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인격 도야를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했을 가능성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콤플렉스나 건강문제가 그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실제 모습은 원만하거나 다정다감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개혁정치와 실리외교를 추구한 훌륭한 군주다. 또 성격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광해군의 성격이 어떠했든 간에 그것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가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젠틀'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격상의 문제를 가진 개혁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