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법치국가에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는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 지난 2013년 6월까지 발의한 법안 4622건 중 295건만 가결됐다. 철회·폐기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3869건 중 상당수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 중에서 "제법이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생활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는 '제대로 된 법안'들을 찾아내서 생생한 현장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실험 1. 작은 상자에 살아 있는 토끼를 넣어 목을 고정시킨다. 실험물질을 토끼의 눈에 넣는다. 몇 시간 간격을 두고 최대 3주 동안 계속 투약한다. 실험에 이용된 토끼들은 안락사 시킨다. 안구는 적출해 약물 반응을 관찰하는 용도로 쓰인다.

실험 2. 임신한 토끼나 쥐에게 실험물질을 강제 급여한다. 새끼를 밴 상태로 죽인다. 특정 물질이 수정이나 태아 발달에 문제를 일으키는지 여부를 측정한다.

화장품 개발 과정에서 이뤄지는 동물실험들이다. 사람 얼굴과 몸에 직접 바르는 화장품이 인체에 무해한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다. 속눈썹을 길고 풍성하게 만드는 마스카라를 위해 토끼들은 눈에 제품을 수십 번 이상 발라야 하고, 피부 노화 방지용 에센스·크림을 위해 동물들은 강제로 제품을 먹은 다음 생을 마감해야 한다. 

잔인한 화장품 동물실험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법이 국내에서 최초로 나왔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문정림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화장품동물실험금지법(화장품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불필요한 화장품 동물실험을 금지·회소화해 생명의 무분별한 희생을 줄이자는 취지다.

문 의원은 "전 세계적인 화장품 동물실험 반대 움직임이 법안 발의의 계기가 됐다"라며 "2년 반 동안 동물보호 시민단체, 식품의약품안전처, 대한화장품협회 등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법안을 준비해왔다"라고 설명했다.

동물실험 안 한 화장품, 우리나라에서도 살 수 있다

 한 화장품 회사에서 동물실험 반대를 콘셉트로 내놓은 브랜드 광고.
한 화장품 회사에서 동물실험 반대를 콘셉트로 내놓은 브랜드 광고. ⓒ 비욘드 광고 갈무리

실제로 유럽, 미국, 뉴질랜드 등의 국외에서는 일찍부터 동물실험 금지 운동이 확산돼왔다. 신뢰성과 성공 확률이 낮은 동물실험을 대체할 시험법이 개발되면서다. 토끼 눈에 실시하던 자극 실험은 도축된 소의 각막으로 대체 가능하게 됐고, 독성 반응 검사 역시 굳이 동물을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생명 희생 없이 화장품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동물실험 금지 요구가 탄력 받게 된 것이다. 

유럽연합(EU)은 현재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의 제조·생산·유통·수입 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2004년부터 화장품 제품 자체의 동물실험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2013년부터는 화장품 원료로 금지 범위를 확대했다.

예를 들어, '샤넬(CHANEL)'이나 '디올(DIOR)' 등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들은 자국 내에서 신제품 출시를 위한 동물실험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동물실험을 거친 국외 화장품도 유럽연합 국가에서는 판매가 불가능하다.

한국과 더불어 미국, 일본 등 34개국이 참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은 '화장품 독성시험 및 동물대체시험법 가이드라인(2004년)'을 마련해 회원국들에게 대체시험법 11종을 활용토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화장품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추세다. 동물보호 시민단체인 동물자유연대가 2011년 6월부터 4개월 동안 국내 소비자 24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7.4%가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제품을 선호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최근에는 시민단체 '카라'에서 작성한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착한회사 리스트'가 온라인에서 회자되는 등 소위 '윤리적 소비'를 둘러싼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일부 화장품 기업들은 소비자 여론을 의식해 동물실험 반대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러시(LUSH)', '더바디샵(THEBODYSHOP)', '비욘드(BEYOND)'가 자체적으로 동물실험 반대 서명운동 등의 캠페인을 벌인 게 대표적인 사례다. 식약처도 OECD가 권고한 대체시험법 중 9개를 이미 도입해 화장품 심사에 활용하는 등 동물실험 최소화에 동참하고 있다.

중국 수출 기업은 예외... 법안 실효성 의문 제기돼

 왼쪽부터 동물자유연대 이형주 정책국장, 새누리당 문정림 국회의원(비례대표),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Cruelty Free International) 닉 팔머 정책이사가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 퍼포먼스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동물자유연대 이형주 정책국장, 새누리당 문정림 국회의원(비례대표),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Cruelty Free International) 닉 팔머 정책이사가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 퍼포먼스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이정화

문정림 의원이 낸 개정안은 동물실험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동물실험을 거쳐 제조·수입한 화장품을 유통하거나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내용이다. 동물실험을 한 원료로 만든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이를 어길 경우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또한 식약처장은 동물실험을 대체할 시험법을 마련하고, 화장품 제조·판매업자들이 대체시험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다만, 예외 조항이 있다. 살균 보존제·색소·자외선 차단제 등 사용 제한이 필요한 원료가 들어가거나 대체시험법이 개발되지 않은 경우에는 동물실험을 할 수 있다. 동물을 이용한 실험 자체를 금지하는 EU와는 다른 대목이다.

수출국이 동물실험을 요구하는 경우도 제외된다. 사실상 화장품 수출 기업들의 현실을 고려한 조항이다. 중국이 수입화장품 안전성 검사 시 동물실험을 의무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 의원은 "한국 전체 화장품 수출의 약 22%를 차지하는 게 중국"이라며 "우리나라 기업들이 2013년 한 해에만 약 2억8700만 달러어치의 화장품을 중국으로 수출했다"라고 설명했다.

법안의 유예기간은 2년으로 설정했다. 화장품 기업들이 대체시험법을 도입할 수 있는 여유기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일각에서는 예외조항 때문에 법안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사용 제한 원료, 수출 제품 등을 제외하면 그만큼 법망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문 의원은 "현실성을 반영해 법안 통과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라며 "동물실험 금지라는 대의와 업계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 결과로 이해해달라"라고 말했다.

이번 법안 작업 과정에 참여한 이형주 동물자유연대 정책기획국장은 "동물실험으로 국내에서만 연간 200만 마리에 달하는 동물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라며 "무분별한 동물실험에 제동을 걸었다는 데 이 법안의 의의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 국장은 "처음 동물보호단체들이 요구한 안보다는 후퇴했지만, 향후 법이 통과돼 시행되면 점차 동물실험 전면 금지로 확대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라고 덧붙였다.

 문정림 새누리당 의원
문정림 새누리당 의원 ⓒ 문정림 의원실 제공

다음은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문정림 의원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 화장품 동물실험 금지 법안을 발의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의사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동물 생명 문제를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해왔다. 야당 의원들이 추진하는 동물복지법 제정에 새누리당 의원으로서 유일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화장품 동물실험 문제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두고 검토해왔다. 2년 반 동안 토론회, 간담회를 개최해 관련 의견을 청취했다. 식약처와 대체시험을 위한 예산확보 방안 등을 두고 업무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정부부처와 화장품 업계까지 동의할 만한 수준의 개정안을 내게 됐다."

- 동물실험을 실시하지 않은 화장품을 써본 적 있나.
"스킨이나 에센스 등 기초화장품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을 쓴다. 공식적으로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기업들도 있는데, 해당 기업 매장에 일부러 들려 화장품을 구입할 때도 있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 중 친환경 원료를 쓴 제품은 같이 사는 반려견을 목욕시킬 때 쓰기도 한다."

- 국내 화장품 기업들이 동물실험 금지를 반대하지는 않을까.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화장품 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문제없을 거라 본다. 게다가 업계 현실을 고려해 예외 조항과 유예기간 등을 두었다.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내용이므로 지키지 못할 법이 되진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예외조항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법안인 건 맞다. 동물실험을 전면 금지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현실적인 여건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상적인 조항만 담을 경우 화장품업계의 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될 수도 있다. 향후 국·내외에서 동물실험 반대 움직임이 더욱 확대되면, 언젠가는 예외조항의 필요성도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법안의 실효성이 커지게 될 거라 예상한다."

- 올해 안에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고 전망하나.
"저를 포함해 이인제, 진영, 이우현 의원 등 22명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법안 발의 기준인 10명의 2배 수준이다. 이 법안을 심사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 소속 의원 다수가 공동발의자로 나선 만큼, 통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법안 내용도 이해 당사자 간의 큰 이견이 없기 때문에 법안 처리 과정에서 특별한 갈등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화장품동물실험#동물실험#화장품#문정림#새누리당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