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지금 이 의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1년에 1만4500달러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한 번 해봐라(try it). 그럴 수 없다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투표해 달라."지난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 중 박수를 받았던 발언 중 일부다. 그리고 6개월여 뒤 한국의 최저임금위원회는 선심(?)을 썼다. 450원과 8.1%. 2016년의 최저임금 인상분이다.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을 부르짖었던 노동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이에 공감했던 시민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지난 9일 새벽, 최저임금위원회는 난항 끝에 제12차 전원회의에서 2016년 최저임금을 시간당 6030원으로 결정했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26만270원. 지난해 7.1%보다 소폭 상승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이날 회의에서는 전체 27명 위원 중 근로자위원들 9인이 모두 불참했고, 한 공익위원과 사용자위원(각 9명) 16명 중 15명이 찬성했다. 파행 아닌 파행이라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런 시급! 고작 450원 인상이라니...
"최저시급 6000원 넘었다. 이제 한 시간 일하면 김밥나라에서 '뚝불' 먹을 수 있다."
이색 대안학교를 표방하는 학문공동체 '신촌대학교'가 내건 대자보 중 일부다. 여기저기서 최저임금위원회를 비난하는 여론이 드높다. "알바 두 시간에 영화 한 편에 콜라 한 잔"이라느니 "담배 두 개비 값도 안 되는 인상분"이라느니 자조 섞인 의견이 주를 이룬다.
지난해에 이어 지속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관련된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기에 노동, 시민사회의 의견이 폭넓게 반영되지 못한 이번 결정에 반대여론은 높을 수밖에 없다.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경영자총연합회 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알바노조는 "심의가 끝나기 전부터 예상된 상황이었다"며 "내년 최저임금 심의 역시 사용자들은 동결을 주장할 것"이라며 비관적인 논평을 내놨다.
민주노총 역시 논평을 내고 "생계난을 외면했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성계나 시민사회단체 역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기업들과 사용자 측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불만을 표시하는 중이다. 메르스 사태 등 내수부진과 낮은 물가상승률에도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의 인상이 이뤄졌다는 것이 그 이유다. 9일 경영자총협회가 내놓은 '2016년 적용 최저임금 결정에 대한 경영계 입장'의 논평이 이러한 시각을 대변한다.
"우리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은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소상공인과 영세·중소기업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한 채 또다시 고율의 최저임금을 결정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금번 최저임금 인상으로 30인 미만 영세기업의 추가 인건비 부담액은 2조7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최저임금 근로자의 87.6%가 근무하고 있는 영세 기업·소상공인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해당 근로자의 일자리에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금번에 결정된 최저임금 시급 6030원으로 인해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임금근로자는 342만 명이다. 이에 따른 영향률은 세계 최고수준인 18.2%로 최저임금이 경제수준에 비해 과도하게 높게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업종별 최저임금 적용, 산입범위 확대 등을 통해 최저임금 제도를 현실화하고 최저임금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동결'만을 부르짖는 사용자 측의 예고된 엄살
경총의 이러한 확고한 의지(?)는 12차에 걸친 최저임금위원회 회의 발언만으로도 충분히 유추되고도 남았다. 회의록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 당시 전해진 사용자 위원들의 발언은 2015년이 맞나 싶을 만큼 가히 충격적이다(관련 기사 :
"최저임금회의에서 나온 '황당 발언" 모음).
"한 미래학자가 5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한다. 최저임금 올려놓으면 통일됐을 때 그 비용이 국가의 큰 짐이 될 거다." (11차 회의, A사용자위원) "<조선일보> 기사 보니 푸에르토리코와 그리스가 디폴트(국가부도)가 온 이유는 최저임금이 높아서다. 그런 전철을 밟지 말자." (11차, A사용자위원)"방학에 편의점, PC방에서 한두 달 일하는 학생들은 생계 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휴대전화를 바꾸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서 용돈 벌이로 일하는 것이다. 업종별로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10차, B사용자위원)예나 지금이나 동결을 주장하는 사용자위원들의 주장은 성숙해져가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 여론을 반영하기엔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고 비전문적이다. 여러 요인들로 분석이 진행 중인 그리스 국가부도 사태에 대해 최저임금을 끌어들이거나 부지기수가 어리다는 이유로 최저임금도 보장 받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용돈벌이" 운운하다니, 저열하기 짝이 없다.
올 한 해만 해도 꾸준하게 다각도의 최저임금 상승 요인들이 지적돼왔음을 상기한다면 '외눈박이'들이라 할 만하다. 오바마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 여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OECD 주요 국가들이 최저임금을 올리는 추세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그리도 미국을 염원하는 기업들이 최저임금만큼은 "경제수준에 비해 과도하게 높게 설정되었다"고 엄살을 떠는지 모를 일이다.
'생활임금제' 도입하는 이재명에게 배워라
소상공인들이나 중소·영세기업의 피해만을 운운하고 강조하는 것 역시 옹색하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라면 최저임금 상승 이면에 닥칠 소상공인과 중소·영세기업에 대해 세금감면 등과 같은 정책 지원으로 부담을 최소화해주는 것이 맞다.
국민들이 언제까지 '동결'만을 고수하는 기업들의 앓는 소리를 들어 줘야 하는가. 또 언제까지 한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만 인식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9일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저임금 대상에 외국인노동자를 제외해야한다"고 말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은 사용자 측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시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낮은 최저임금을 보충할 대안을 마련한 지자체도 있다. 바로 이재명 시장이 이끌고 있는 성남시다. 성남시는 지난 3일 생활임금 지원 조례를 통과시켰다. 성남시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생활임금제는 근로자 복지 증진과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남시는 최저임금 초과분을 성남사랑상품권과 같은 지역화폐로 지급할 수 있도록 조례에 명시했다. 시급으로 환산하면 6794원, 월 급여는 145만7566원으로 올해 최저임금 대비하면 24.9%가 많다. 성남시는 시 소속 근로자와 시 출자·출연기관 소속근로자 등 공공부문부터 우선적으로 생활임금제를 적용하고, 근로자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업체가 시의 위탁, 용역업체 선정 시 가산점을 주는 등 민간 영역까지 확대토록 했다.
성남시의 이번 생활임금제 도입은 '닥치고 동결'만을 부르짖는 기업과 이를 방관하는 정부가 경청하고 주목해야 할 정책일 것이다. 이를 의식한 듯, 이재명 시장은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이 나기 하루 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적었다.
"지역화폐를 활용한 생활임금제는 공공성 강화가 곧 지역 상권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말로만 선진국이 아닌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나라. 경영자들이 노동자를 가족으로 대접해주는 나라. 골목이 살고 서민이 잘 사는 나라. 그런 나라, 여러분도 함께 만들어주실 거죠?"이재명 시장의 바람처럼 대한민국이 과연 "경영자들이 노동자를 가족으로 대접해 주는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내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역시 사용자 위원들이 '동결'을 주장하는지 벌써부터 근심이 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