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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7대학
파리7대학 ⓒ 김윤주

그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해가 스무 번이나 바뀌었다. 세상에,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것이다. 강 건너 저편에 두고 온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올라 문득 감격스럽다. 스무 해 만에 다시 찾은 파리에 한껏 취하고 싶지만 마냥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매일매일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후에 파리7대학 한국학과 교수와 인터뷰 약속이 있다. 아, 정신 차리고 이제 파리의 하루를 열어 보기로 하자.

파리7대학은 프랑스에서 최근 새롭게 조성한 파리 13구 대학가에 자리하고 있다. 일단 지하철 14호선을 타고 미테랑 국립도서관 역에서 내려 파리7대학을 찾아가야 한다. 서울과 파리를 오간 몇 차례의 메일에 의하면, 그랑 물랭(Grands Moulins)이란 큰 건물로 들어가서 프랑스식으로 4층에 있는 한국학과 사무실 502A호로 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돌면 유리문이 보일 것이고 그 앞에서 오른쪽 문을 열고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한국학과 사무실이 있을 것이다. 더없이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를 받아 둔 터라 마음이 든든했다.

허나, 파리에서 길 찾기가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어찌된 노릇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보니 학장실인지 총장실인지, 중요한 사람이 분명한 누군가의 방으로 바로 이어져 버린다. 복도의 몇 개 방을 기웃거렸지만 502A호는 보이질 않는다.

다시 예의 그 방으로 들어가 비서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한국학과 사무실과 K교수 연구실을 물으니 잘 모르는 눈치다. 황망한 마음으로 돌아서려는데 붙잡는다. 

 파리7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대학
파리7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대학 ⓒ 김윤주

미소를 나눈 그 비서와 여직원 한 명이 자신들의 책상으로 나를 데려간다. 한바탕 소동이 시작되었다. 두 손을 휘젓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을 이야기를 나눈다.

교내 정보 시스템에 접속해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고, 민망할 정도로 심각하고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누더니 결단을 내린 듯 그 중 한 명이 "내 그대를 기꺼이 안내하겠노라. 나를 따르라!" 선언한다.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물어보니, 이 친구는 대만에서 이민을 왔단다. 그렇다고 대만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란다.

마치 비밀의 문이라도 통과하듯 이 건물의 복도와 저 건물의 복도를 건너고, 엘리베이터도 두 번인가 세 번을 갈아타며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몇 번쯤 했을까. 도중에 마주친 새로운 직원까지 합류해 국적이 모두 다른 여자 셋이서 그야말로 파리7대학을 정신없이 헤매 다녔다. 마침내 어떤 복도에 멈춰 섰다.

일본학과, 베트남학과, 한국학과 등 동양학과 사무실과 연구실이 보인다.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다 찾아낸 교수 연구실. 연구실 문의 명패에서 K교수 이름을 찾아내고는 세 여자가 환호성을 지른다. 울랄라! 이렇게 유쾌한 길 찾기라니!

시간이 아직 더 남아, 사무실에서 만난 프랑스인 남자 교수의 안내대로 도서관 구경을 하기로 한다. 도서관은 같은 건물 같은 복도 저 끝 유리벽 너머에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아늑한 도서관이 나온다. 1층에는 동양서적이 잔뜩 꽂혀 있는 서고가 있고, 2층에는 학생들의 열람실이 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서고의 책들을 구경한다. 입구 쪽의 커다란 서고 두 열에는 한국학 관련서들이 마련되어 있고 안쪽으로 일본어, 베트남어 등으로 쓰여진 책들이 보인다. 흥미롭다.

 파리7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대학 도서관
파리7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대학 도서관 ⓒ 김윤주

2층으로 올라가니 공부하는 학생들의 책상 옆에 커다란 유리벽이 있고, 유리벽 너머로 아담한 사각형의 작은 공간이 보인다. 가만 보니 언젠가 어느 기사에서 본 적이 있던 한국식 정원이다.

프랑스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전에도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 같은 언어학자가 있기는 하였다. 1894년부터 1901년까지 완간된 총 4권짜리 <조선서지(Bibliographie Coréenne)>는 지금도 한국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사후 오래도록 명맥을 잇지 못하다 소르본대학에 한국학 연구소 및 한국학과정이 개설된 것이 1959년이다. 기존의 일본학과를 일본-한국학과로 변경한 것이다.

1968년 대학의 학제 개편으로 1970년 동양 관련 학과들이 파리7대학에 흡수되고, 이때 일본학과로부터 나와 독자적인 한국학과가 개설된다. 파리7대학에는 한국학과를 포함해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총 4개의 학과가 동아시아언어문화대학 내에 설치되어 있다.

 파리7대학 동아시아 언어문화대학 도서관
파리7대학 동아시아 언어문화대학 도서관 ⓒ 김윤주

한국학과의 커리큘럼을 간단히 살펴보면, 1학년은 한국어 문법과 회화 능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3학년은 번역, 시사강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 대학은 우리와 달리 학부가 3년이고 한 학기는 12주이다.

한국어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언어도 아니고 수업 시간도 부족하다 보니, 파리7대학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한국학 교육 기관 중 하나라 해도 깊이 있는 학문이 가능할 정도의 고급 수준에 이르기란 쉽지 않다.

한국학과의 재학생은 현재 300명 정도이다. 십년 전인 2005년만 해도 50명이었으니 그새 6배나 증가한 것이다.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이쯤 되면 파리의 한류, K-pop의 위력 등을 외치며 흥분할 만하다. 하지만 그간의 프랑스 내 한국학 전공생 현황을 살펴보면 늘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에는 베트남학에도 뒤질 정도로 학생 수가 감소했던 적도 있었다.

현재 상황을 보더라도 입학생 수는 많지만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학생 수가 현격히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급이 많아 30퍼센트 정도만 상위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처럼 대학 학위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도 아닌지라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하고 머물게 할 매력적인 유인책이 없는 한 이 수치는 언제라도 감소할 수 있다. 잠시 유행하고 마는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유지되는 두터운 학습자층이 형성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통달하고 깊이 있는 한국학 연구를 진행할 연구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지 대학의 특수성에 맞는 한국어교육 방안이 다방면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기분 좋은 만남을 뒤로 하고 한국학과 사무실을 나오니 이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빼곡히 받아 적은 인터뷰 노트를 보물처럼 품고 건물 앞 벤치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어서 호텔에 돌아가 정리를 해야 할 텐데... 앞으로 스무 해가 또 지나면 이곳 파리의 한국학, 한국어교육 현장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때쯤이면 나는 또 무엇을 궁금해 하고 있을까. 해야 할 일이 많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파리7대학
파리7대학 ⓒ 김윤주



#파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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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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