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유동인구 많은 좁은 길목. 둘, 인파 속 단상.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유세 현장 공식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7일부터 24일까지 문 후보의 유세 현장 대부분을 취재해보니, 문 후보는 이 두 가지 공식으로 최대 효율을 내기 위한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최대한 북적이게, 최대한 많은 사람이 카메라에 잡히도록 유세 현장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문 후보는 지난 17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24일까지 총 15차례 유세를 진행했다. 경쟁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총 12차례 유세를 진행했다.
▲ 문재인 : 대구-대전-수원-서울(17일)-제주-전주-광주(18일)-춘천-원주-청주(20일)-인천(21일)-울산-창원-부산(22일)-천안(24일)▲ 안철수 : 전주-광주(17일)-대전-대구(18일)-서울(20일)-울산-부산(21일)-창원(22일)-목포-함평-나주-광주(24일)이 중 대표적으로 광주 유세를 비교해보면, 문 후보의 전략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일단 야권의 심장부인 광주를 먼저 찾은 건 안 후보였다. 안 후보는 선거운동 첫날인 17일 광주를 찾아 의미를 부여했다. 유세 시간도 오후 6시 30분으로 좋은 시간대를 잡았다.
하지만 장소가 아쉬웠다. 안 후보는 이날 유세 장소로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 앞)을 택했다. 사방이 탁 트인 장소인 데다,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30분에도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곳이다. 장소에 5.18이라는 상징성을 담았지만, 단절된 공간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역동적 유세 현장이라기보다, 당 조직 행사의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말았다.
인파 속 단상, 안철수도 벤치마킹반면 다음 날인 18일 오후 6시 광주를 찾은 문 후보는 5.18민주광장에서 100m 남짓 떨어진 충장로 입구를 유세 장소로 택했다. 이곳은 광주 원도심의 최대 번화가이자, 얽혀 있는 좁은 길들의 초입이다. 또 오후 6시쯤이면 유동인구가 절정에 달하며, 5.18 상징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종합하면 문 후보가 선택한 충장로 입구는 '유동인구 많은 좁은 길목'이란 첫 번째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 장소이다. 불과 100m를 사이에 두고 안 후보와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유세를 벌인 것이다.
당시 안 후보 측은 1만 명, 문 후보 측은 5000명으로 각각 광주 유세 참석자를 추산했다. 각 정당이 추산한 인파를 신뢰할 수 없지만, 어쨌든 추산 인파가 더 적었음에도 현장 분위기는 문 후보 측이 더 뜨거웠다는 평가다.
이 첫 번째 공식은 17일 서울 광화문을 제외하고 문 후보의 대부분 유세에서 적용됐다. 이 공식의 단적인 예로 24일 천안 유세의 장소 변경 사례를 들 수 있다. 당초 민주당은 이날 유세 장소를 아라리오광장으로 공지했다.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좁은 길목이 얽혀 있는 신부문화거리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두 장소 사이는 걸어서 5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전날 미리 현장을 찾은 실무진이 너른 광장이 아닌 좁은 길목으로 장소를 바꿨다는 후문이다.
한편 두 번째 '인파 속 단상' 공식은 문 후보가 현장에 도착하면 적용된다. 광주 유세 장소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운 문 후보는 인파 사이를 뚫고 유세차 정면에서 약 20m 떨어진 작은 단상 위에 올랐다. 문 후보는 그곳에서 양 손을 들고, 지지자들과 사진을 찍고, 꽃다발을 받는 등 긴 시간을 소비한 뒤, 다시 인파 속으로 들어가 유세차까지 이동했다.
이 단상은 문 후보의 유세 현장에 항상 나타나는 필수 아이템이다. 문 후보가 유세 현장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매번 인파에 둘러싸여 환호를 받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단상 때문이다. 안 후보도 20일 서울 남대문시장 유세부터 단상을 활용하기 시작할 만큼, 이는 유세 효과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연출로 문 후보는 다른 유세 현장에서도 안 후보를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관련기사 :
문재인과 안철수의 '부산', 이렇게 달랐다).
그런데 '유세호황=득표'일까?
하지만 유세 현장의 호황이 곧 지지세나 득표를 의미한다고 볼 순 없다. 유세의 본질적 속성, 그리고 갈수록 변화되는 정치 환경을 고려할 때, 유세 호황과 지지세는 꼭 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지난 총선 직전, 문 후보의 광주 방문이 그 단적인 예다. 문 후보는 총선을 닷새 앞둔 지난 해 4월 8일 충장로우체국 앞에서 "호남에서 지지를 거둔다면 대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하며 '조건부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현장 분위기만 놓고 보면, 문 후보와 민주당은 고무되기에 충분했다. 발표 장소인 충장로우체국은 지난 18일 문 후보가 유세를 벌인 충장로 입구와 같은 장소라고 봐도 무방한데, 당시에도 거리는 인파로 가득 했다. 이른바 '반(비)문정서'를 부정하는 기사가 쏟아질 만큼, 당시 문 후보는 광주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국민의당에 '호남 참패'를 당했고, 조건부 은퇴 선언은 문 후보의 발목을 두고두고 잡았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25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예전 김대중 후보가 보라매공원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동원했을 때, 그것만 보면 다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유세 현장에 모인 숫자와 분위기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라며 선거에서 유세가 갖는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박 교수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유세의 변화된 의미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예전에는 유세가 정보를 전달하고, 지지세를 과시하는 역할을 했다. 유세 현장에 누가, 얼마나 모였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라며 "(하지만) 지금은 정보 전달과 지지세 과시 역할은 약화된 것 같다. 단지 정치적 이미지와 조직력을 보여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이젠 후보를 만났을 때 시민들이 보이는 태도, 그걸로 (지지세를) 판단할 수 있다. 사실 그 느낌을 가장 잘 아는 건 후보자 자신이다"라며 "광장보다는 길거리다. 광장에서의 유세, 선거운동으로서의 광장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