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1963년 9월 26일. 거친 흙바닥 위에 새하얀 버진로드(신부가 입장하는 비단 길)가 깔렸다. 남녀 125쌍이 흙길 위에 양 옆으로 줄지어 섰다. 모두 죄인 마냥 얼굴을 푹 숙였다. 웃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을린 얼굴에 갓 스물을 넘은 앳된 얼굴. 신랑의 얼굴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퉁명해 보였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속으로 수 만 번 외친 분노는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맞아 죽을까봐 두려웠다. '명령을 거부하거나 도망치면 맞아 죽는다' 이곳에 내려와 인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태어나 처음 본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니.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씨는 유달리 화창했다. 결혼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만국기가 가을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몸서리치는 그날의 기억
"그래, 수놓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어유." 윤기숙(83)씨는 54년 전 자신을 생지옥에 떨어뜨린 '그 사람'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윤씨의 고향은 전남 해남군. 큰집 사촌언니가 사는 서울에 놀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역전에서 붙들렸다. 소담스레 대화를 나누다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물어 '집에서 수틀을 짰다'고 말했다. 그 두 마디 문답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여기가 학원이라고 하대유. 수예학원이유. 지금 생각하면 민정식 서산개척 단장(현재 사망)이 보낸 사람이유. 그래서 따라 갔어유. (가기 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가더니 한 상 걸게 차려주대요. 난 그걸 못 먹겠더라고유. 어딜 데리고 갈까봐 나를... 무서워서. 그리고 그날 밤, 트럭에 포장을 씌우더니만 10명을 거기 태웠어유."그렇게 도착한 곳은 수예학원이 아니었다. '서산자활개척사업장' 마을 초입에 내걸린 투박한 간판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여기서 살 바에 징역 살지, 똑바로 못 산다, 도망가라." 도착한 첫날, 마을 사람 누군가 다급히 속삭였다. "다시 나가보니까 뺑뺑 보초를 섰더 만유. 싹 다 둘러 쌌어유." 결국 윤 씨는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반백년이 흘렀다. 평생 "인정이라곤 없던" 남편은 40여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권 초반 국토 간척 사업에 열을 올렸다.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3리. 윤씨가 한밤중에 끌려온 마을도 간척 사업장 중 한 곳이었다. 오로지 노역을 위해 조성된 공동체.
1961년 11월 사업가 민정식씨가 국가의 하청을 받고 이곳에 개척단을 열었다. 단원 모집은 비자발적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역전에 홀로 앉아 있던 사람, 거리에서 주먹을 쓰다 경찰서에 잡혀 온 사람, 거리를 떠돌던 노숙인...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유? 정말 무섭게 생겼었어."할머니는 민씨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몸을 떨었다. 남성 단원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면, 여성 단원은 강제 결혼을 당했다. 1963년에 이어 1964년 11월에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225쌍이 합동결혼을 올렸다. 225명이라는 숫자는 곧 개척단의 '성과'로 기록됐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숫자를 채우기 위해 1963년에 결혼한 부부 125쌍 중 일부를 '재탕' 결혼시키기도 했다.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윤치영씨가 주례를 섰다. 일부 언론들은 '갱생의 보금자리' '매머드 결혼식' 등의 표현으로 호화찬란한 포장에 나섰다.
여성들은 강제노역에서도 열외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남성 단원들의 밥까지 따로 지어야했다. 적게는 4~5명, 많게는 10명 이상의 단원들이 각 호마다 할당됐다. "세숫대야에 산에서 캔 돌을 이고" 바다를 함께 메우기도 했고, 위생을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자식을 길렀다. 폭력에 노출된 남편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국가와 언론은 '낙인찍기'에 바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윤락의 길을 걷던 9명의 여성이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소년 개척단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아일보> 1963년 3월 13일자 보도 중 "225명의 신부는 한 때 윤락 여성으로 낙인 찍혀 햇볕을 등지고 살아 서울 시립부녀보호지도소에서 재생한 여성들이다." <경향신문> 1964년 11월 24일 보도 중 당시 국가와 언론은 끌려온 여성을 '재생 대상'으로 집단화했다. 국가의 은혜를 받아 '갱생의 길'을 걷게 됐다는 식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9월 6일과 7일 만난 개척단 출신 여성들은 국가와 언론이 덧씌운 낙인에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화자(75)씨는 자식들에게 그 낙인이 대물림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정씨는 스물한 살 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다.
"밖에서 쟤 아빠는 깡패였네, 엄마는 술집여자였네... 그러면 누가 그렇게 인정하고 싶겠어? 아빠 엄마가 깨끗하든 말든 '개척단'이라고 하면 벌써 (사람들이) '에유, 그런 사람들이여' 해버렸어. 그게 제일 억울하다는 거야. 자식들한테도 미안하고." 정씨는 손끝이 야무져 어떤 기술이고 잘 배웠다. 미용학원을 나와 미장원에서 일하다가 전기 미싱(재봉)을 익혀 대전의 한 봉제공장에서 미군 담요를 만들었다. 민 단장을 처음 만난 곳도 이 공장이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해 "월급도 배로 주고 밥도 먹여 준다"는 감언이설. 할머니는 의심 없이 트럭에 올랐다.
"한 밤 중에 데려 갔어. 딱 와서 보니... 아이고 말도 하기 싫어." 정씨는 총 두 번 도망을 시도했다. 첫 번 째 시도는 오자마자였다. '속았구나' 싶어 같이 온 친구와 작전을 짰다. 도피 가능성이 적은 이들은 당시 '공인증'이라는 외출증을 끊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차저차 핑계를 대고 서산 시내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이내 돌아왔다. 낌새를 눈치 챈 감호반이 "뒤를 밟았다"고 했다. 장정 두 사람이 슬금슬금 할머니의 뒤를 쫓았다. "무서운 마음이 들어 못 가겠더라." 그렇게 돌아온 뒤, 외출의 자유마저 제한됐다.
몇 달 후에는 '강제 결혼' 명령이 떨어졌다. 정씨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머리를 싸매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짓 전보를 치기로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거짓임이 들통난 것이다. 민 단장은 정씨를 불러다 세워 놓고 "너를 내가 딸처럼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그는 증언 도중 "민 단장이 지금 내 앞에 있으면 갈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