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지난 기사] : 박정희가 만든 '매머드 결혼식', 강제로 끌려온 신부들"좋지도 않은 사람과 살았으니 무슨 정이 있겠어. 자식 보고 산거지. 요즘 짐승들은 대우나 받고 살지, 짐승도 그런 짐승이 없었어." "애 봐줄 사람이 어디 있어, 업고 하는 거지... 흙일 할 때는 세숫대야에 퍼서 머리에 이고. 북한하고 똑같았어. 텔레비전 보니까 북한 여자들도 그러고 살 더만."정화자(75)씨는 수시로 개척단 생활을 북한에 비유했다. 이동의 자유도, 소비의 자유도 없었다. "개만도 못하게 살았다"고 했다.
결혼 생활은 독박 육아와 중노동의 나날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남편과 대원 5명의 밥을 챙겨주고 나면 언제나 자신의 몫은 없거나 턱없이 부족했다. 돌봐 줄 사람이 없어 포대기에 애를 업고 돌을 캤다.
이 때문인지 정씨와 윤기숙(83)씨는 허리와 어깨가 고장 나 있었다. 집에 아이를 가둔 채 일을 나온 엄마도 많았다. 정씨는 "울다 지쳐 배고파 똥을 집어먹어 입에 똥칠을 한 애들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대원들 밥 퍼주다 보면 내 밥은 없는 거야. 그럼 굶어. 어떻게 또 잘 푸다보면 밥이 남아. 그럼 먹는 거여. 옆집에서 '언니 나 밥 없어' 하면 남은 보리밥을 몽땅 끓여서 '이놈 나눠먹자'하고 먹었어. 맛이 있간디. 살라고 먹는 거지."서산개척단은 1966년 해산할 때까지 모든 식량을 배급제로 운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연병장에 밥을 타러 가면 간장, 일본식 된장, 소금을 드럼통에 부어놓고 집마다 한 '바케쓰'씩 나눠줬다. '알랑미'라 불리는 찰기 없는 묵은쌀과 보리 등 혼합곡이 배급됐지만 언제나 모자랐다.
윤씨는 특히 남편 포함, 총 열한 사람의 밥을 지어야했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여덟 사람으로 줄어들었다. 습지에서 잘 자라는 소리쟁이 풀을 꺾어다 소금국을 자주 끓였다. 대원들은 그마저도 맛있다고 잘 먹었다. 할머니는 굶는 날이 많았고,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도 자연히 말라갔다.
곳곳에 도사린 '죽음'에 대한 공포
"걸리면 죽어유. 몽둥이로 막 때려유. 죽도록 때려유. 배고프니께. 도망가다가 붙들려서 죽고. 거적때기 싸서 묻어버리고.""우리 대원하나는 붙들려서 죽어버렸어유. 도망가다가. 막사에 드러누워 버렸다고. 흰죽을 쒀가지고 입에다 떠먹였는디 못 일어나대유."배고픈 일상만큼 떠올리기 싫은 것은 폭력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윤씨는 자신의 밥을 받아먹던 대원 하나가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또렷이 상기했다. "열댓 살 쬐깐한 것들부터 스무 살 장정들"까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웃들이 '얻어터지고 죽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개척단원 정영철씨의 부인인 장교수(71)씨도 '도망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하나가 튀어 들어오니 깜짝 놀랐지. 울 아버지가 '쟤 붙들리면 죽으니께 구석에 이불 쌓아놓고 덮어라'고 하대. 그리고 두 명인가 들어와서는 '사람 안 들어왔느냐'고. 방이고 어디고 다 쑤시고 가더라고. 새벽 1시쯤인가 서산 시내에 데려다 줬어. 잘 갔으면 편지라도 쓰라고 주소를 써줬는디. 연락이 없어. 수수께끼여.""결혼 날짜 잡아 놓고 강제로 끌어다가 사진을 찍는디... 서울 워커힐에서도 그랬디야. 우리 애들 아배가 그랬잖여. 장가들 생각도 없는디 어떤 여자 데려다가 사진 찍었대잖아. 그렇게 짝을 지어줬디야. 그래서 이내 헤어져 부렀지."간척장 마을인 모월리 옆 동네 산동리 출신인 장씨. 정씨가 1964년 서울 워커힐에서 강제 결혼한 여성과 이별한 후, 옆 마을에 옷을 떼러 갔다가 '홀딱' 반해 청혼한 이가 장교수씨다. 모월리 지척에서 살다 보니 개척단원들이 도망치다 "얻어터지는 것"도 자주 목격했다. 1963년 1차 강제결혼식 때는 동네 또래들과 하얀 꽃을 접어 신부의 가슴팍에 달아주기도 했다.
가난에 꼬질꼬질 찌든 남편이었지만, 어쩐지 "불쌍하고 안타까워" 1969년 식을 올렸다. 신혼 생활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신혼집에는 남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 넷이 웅크리고 있었다. 남편이 개척단 해체 후 거둔 대원들이었다. 대원들은 장씨를 '엄마'라고 부르다 장성한 뒤에는 '형수'라 불렀다.
"며칠 전에는 부산서 사는 (개척단) 삼촌이 술 한 잔 거나하게 하고 왔더라. 눈물을 막 흘리면서 '형수, 우리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고생했는데 보답도 제대로 못하고 죄송하다'고 하대. '형수 인자 괜찮아, 남한테 무릎 안 꿇려' 했제."여전한 가난, 전무한 보상강제 결혼과 강제 노역. 일상적인 폭력, 또는 누군가의 죽음. 당하고 목격한 이는 있는데 가해 주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정씨는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는데 여길 떠나느냐"고 했다. 도배를 반복하고 장판을 새로 깔면서도 이 '빌어먹을' 땅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윤씨는 특히 개척단 해체 후 가분배 받은 3천 평 중 1천여 평에 '논 값'을 대고 있었다. 나머지 2천 여 평은 40여 년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르느라 "헐값에 팔아버렸다"고 했다. 정씨는 "농사 지을 능력이 없어 일찍이 팔았다"면서 "지금 같으면 1정보(3000평)에 몇 천 만원인데, 그때만 해도 몇 십만 원이었다"고 한탄했다. 할머니들이 무상 강제 노역에 대한 인건비와 강제 결혼으로 인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누가복음 10장 5절' 매점과 가정집이 붙어있는 정씨의 집 곳곳에는 '평안'과 '평화'가 쓰인 성경 표구가 걸려 있었다. 부엌 한편에는 낡은 냉장고 3대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제철마다 거둔 나물과 식재료가 가득 들어있다고 했다. "못 먹고 산 설움 때문에 음식 해다 남에게 주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막걸리 10병만 갖고 갈게유" 가끔 들리는 손님은 습관처럼 외상을 달았다. 노령연금과 두 아들이 붙여주는 용돈이 할머니의 생활비였다.
윤기숙씨는 집 보여주기를 극도로 꺼렸다. "동네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 부끄럽다"는 이유였다. 먼지가 시커멓게 내려앉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는 시멘트 담벼락이 대강 둘러섰다. 집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었다. 지붕과 천장 사이로 넓은 틈도 간간이 보였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청년대원 8명과 부부와 아들이 살았다고 했다.
없는 게 많은 집이었다. 보일러가 없어 연탄으로 불을 때고, 세탁기가 없어 팔십 노인이 함께 사는 큰아들의 빨래까지 하고 있었다. 유일한 수입은 나라에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 20만 6천 원. 윤씨는 쑥스러운 얼굴로 "그냥 조금... 조금만 보상해줬으면 좋겠어유"라고 말했다. 보상 받으면 뭘 하고 싶냐고 묻자 "집 좀 고치고 싶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렇게) 산 걸, 인정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보상도 보상이지만, '당신들이 그만큼 고생하고 살았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정씨는 그저 "알아 달라"고 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노라고. 이어 "다만 얼마라도 인건비로 보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국가로부터 "징역살이보다 더한" 노역에 시달렸고, "사랑 없고 정 없는" 결혼을 강제로 당했지만, 누구도 책임지거나 보상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끝으로 다시 국가에 부탁했다. 새로 바뀐 대통령에게 보내는 읍소였다. 이따금 목이 멨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고생하고 산 거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지. 이해 못하시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많은 것 안 바래. 다만 우리가 다만 그렇게 고생했다는 것, 그 보상 조금이라도 해주면 우리가 덜 억울할 것 같어. 노다지 굶고 살았어. 맞아서 죽고 배곯아서 죽었어. 지금 같으면 그렇게 고생하고 산다 싶음 죽고 말지 누가 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