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지난 기사] "박정희판 '위안부' 사건, 제보자는 <1박 2일> PD""야 이놈아 뭐가 불평이니! 임마 너희들은 버젓이 사모관대를 쓰고 남부럽지 않게 호화로운 결혼식도 올렸지 않니? (중략) '놈'은 단장이 단원을 부르는 애칭이다. (중략) 단원이나 새댁들은 모두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 <월간 여월> 1964년 1월 르포 '간척지에 꽃은 피는가, 개펄 인생' 중기사 중간 제목은 '공명심 없는 아버지'였다. 서산개척단원 출신 인물들이 '강제 노역'과 '강제 결혼'의 책임 대상으로 꼽는 민정식 서산개척단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민씨를 향해 "윗선이나 공명심은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색다른 인물"이라는 칭송도 곁들였다.
실제는 어땠을까. 증언자들은 민정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마다 거칠게 비난하거나 공포감에 떨었다. 개척단원 출신인 윤기숙(85)씨는 "얼마나 무서운 줄 아느냐"며 그와 관련한 대화 자체를 꺼려했다. "옆에 있으면 씹어 먹어도 시원찮다"라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전국 각지의 민간인을 데려와 개척 사업에 투입하고 합동결혼의 도구로 삼는 동안, 언론은 이를 홍보하고 미화하기 급급했다. 통치 기간 내내 언론탄압이 자행됐던 그때, '펜'들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이 사건을 오래 추적해 온 이조훈 감독은 지난 11월 2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언론의 행태를 꼬집었다. 이 감독은 "(자료를 찾아보니) 1960년대 나온 기사가 대부분이었는데, 사실이라면 엄청난 역사적 과오 아닌가"라면서 "개척단 운영이 잘 되고 있다는 식의 홍보성 기사만 있는지, 그게 더 놀라웠다"라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 "박정희판 위안부 사건, 제보자는 1박 2일 PD").
50년짜리 '범법자' 낙인
"나이고 지랄이고 간에 장가를 강제로 보냈어." - 서산개척단원 출신 정영철(76)씨"마음에 있거나 없거나 강제로 시키는 거야. '너는 이 사람하고 해라' 하면 해야 혀. 싫어도 해야 혀.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해." - 서산개척단원 출신 정화자(75)씨당시 언론이 보도한 '남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결혼식'에 대해 증언자들은 정반대의 진술을 들려줬다. 자발적 결혼이 아닌 강제 결혼이었다는 증언이다. "억지 결혼"은 곧 불화의 씨앗이 됐다. 정화자씨는 지난 9월 6일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자신의 집에서 기자와 만나 "좋지도 않은 사람과 살았는데 무슨 정이 있었겠느냐"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당시 기사는 정반대의 풍경을 묘사했다.
"여기 또한 모두 수수한 여염집 주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착한 살림꾼들의 모습뿐이다. 밤늦은 뒷골목에서 남자들의 소매를 끌던 여인들이었다는 내 건성 지식에 회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중략) 125명의 신부가 면사포를 쓰고 일제히 신랑 앞에 절을 올린 지는 지난 9월 26일이었다지만, 이마 4월부터 와서 충분한 약혼 기간을 두고 사귄 사이니까 서로의 신뢰감은 아스토리아 예식장에서들보다 더 깊은 것이었으리라." - <월간 여월> 1964년 1월 르포 '간척지에 꽃은 피는가, 개펄 인생' 중시작부터 끝까지 미담이었다. 강제 결혼 당한 여성들은 '남자 소매를 끌던 여인' '윤락한 여성'으로 통칭됐다. 그들의 노역을 미화하며 "노동의 기쁨과 신성함을 아는 여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절대로 윤락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대전 모포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민 단장에게 '꼬임을 당해' 개척단을 찾았다는 정씨는 이러한 낙인에 가장 분노했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깡패들이 들어와서 산다고 (서산개척단을) 무섭게 알고 여자들도 안 좋게 봤다"라는 것이다. 낙인은 자식에게 대물림되기도 했다. 정영철씨는 "(자식들이) 학교 다닐 때 충격을 많이 받았다"라면서 "(자식의) 친구들이 개척단 이야기하며 어쩌고 하니까 많이 싸우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다른 언론은 어땠을까.
"홍등가 출신의 여인 100명(서울 57명, 충남 43명) 이 밖에 단원과의 결혼을 자청해온 15명의 처녀를 입단시켜 이미 115가구의 새살림을 꾸며주었으며 이들을 위한 합동결혼식도 준비중이다." - <경향신문> 1963년 7월 22일 르포 '황해의 갯벌 다져 안주의 터전' 중"재생 윤락 여성 15명 뽑아 개척단원과 가약 맺기로" - <동아일보> 1963년 4월 4일 "이들은 거리에서 단속 수용된 거지 불량배들인데 서산개척지에서 황무지를 개척하며 정착하게 된다." - <동아일보> 1962년 9월 15일 르포 '오물을 묻은 부랑아의 양지' 중지옥을 유토피아로
증언자들이 "돼지우리처럼 끔찍했다"라고 상기한 개척단의 생활상은 기사 속에선 유토피아였다. 갱생의 보금자리. 글만 놓고 보면 한 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영치기 영차! 흙을 파헤쳐라' 사정없이 퍼붓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허허한 갯벌을 다지고 있는 800여 명 청소년들의 알찬 함성이 황해의 물결을 메아리치고 있다. (중략) 1만여 그루의 이탈리아 포플러가 감싸고 있는 이 녹원촌의 주인공들이 그날그날 누리는 의식주를 더듬어 본다." - <경향신문> 1963년 7월 22일 르포 '황해의 갯벌 다져 안주의 터전' 중"새로 태어난 어린이 32명 가운데는 사내아이가 29명이나 되어 '개척촌의 물이 좋다' '앞날의 좋은 징조'라는 등 좋아서 야단들이다." - <동아일보> 1964년 6월 15일 '피땀흘려 살쪄간다 보람찬 갱생' 중'녹원촌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성재용씨는 고아원에서 자라 기관의 권유에 서산개척단에 들어온 인물이다. 성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돌아간다면 서산으로 오겠느냐'는 질문에 "지금 생각한다면 절대 가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구속당하며 살았"고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었다"고 했다.
정영철씨는 민정식의 그늘을 벗어난 날을 '민주화 된 날'이라고 불렀다. 화장실을 갈 때도 2~3명씩 조를 짜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누군가 하나 도피하면 굴비 엮이듯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성씨는 "도망가다 붙잡혀 골병 들어 죽은 사람 많이 봤다"라고 기억하기도 했다.
언론은 개척단원 모집도 직접 나섰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16일의 독자 질의란에는 아래와 같은 답변이 소개돼 있었다. 당시 개척단원 백성옥씨가 쓴 수기 '나의 대열의 참가하라'를 보고 독자들이 참가 방법을 문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참가절차 = 아무런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본사에 찾아오시면 본사는 청소년 개척단 민정식 단장과 협의하여 현지에 보내드립니다. (여비도 필요 없음)"백씨의 수기는 총 상·중·하 세 편으로, 백씨가 개척단에 내려와 "민 단장의 알선으로" 합동결혼하고, "알뜰한 보금자리"를 일구고 있다는 달콤한 광고였다. 마지막 편의 마무리는 이렇게 끝났다.
"이 수기를 읽고 백씨의 대열에 참가할 것을 희망하는 분은 본사 사회부에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 수기를 읽고 언론사를 찾았다는 이들의 이야기도 게재됐다. 1963년 8월 2일자 기사다. 제목은 '개척의 길, 자원 10명 전과 9범 백성옥씨 수기에 감동의 메아리'였다. "백 형님의 뒤를 따라 새 길을 가보겠다" "아무래도 무슨 죄를 저지를 것 같아 죄 짓기 전에 백씨의 뒤를 따라 힘껏 일하겠다" 등 수기를 동력으로 한 개과천선이 이어졌다.
"우리 가정에 기약된 3천여 평의 옥토(간석지)" - 1963년 7월 31일 <경향신문> 백성옥 수기 연재 '나의 대열에 참가하라' 중 언론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었다. 개척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공범'이었다.
언론이 기록한 '기약된 옥토'
"장차 저 논을 분배받았을 적엔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부터 양계 양돈 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는 그녀는 여러 가지 앞날의 설계가 많은 모양이다." - <월간 여월> 1964년 1월 르포 '간척지에 꽃은 피는가, 개펄 인생' 중 개척한 땅은 곧 내 땅이 된다는 약속도 활자로 기록됐다. 성씨는 "(오기 전에) 돼지, 집 한 채, 땅 정보를 준다고 하더라. 솔깃했다"라면서 자신이 받았던 약속을 또렷이 상기했다. 당시 언론에서 강조한 '기약된 옥토'였다.
내 땅이라 생각하고 개간한 토지는 어느새 국유지가 돼 있었다. 정씨는 "일만 실컷 하고... 이제 벼가 나오니까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분토했다. 정씨는 누가 가장 원망스럽느냐는 질문에 "미운 사람은 없다"라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내 신세 조져놓은 놈들... 그 놈들이 웬수지. 미운 정도가 아니지. 우리 같은 놈들이야 자기들 눈꾸녕으로는 벌레 같았겠지."당시 언론들은 이 말에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까.